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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기사번역

악플러 대처법

beautician 2023. 5. 22. 11:16

 

 

악마의 특징

<사관과 신사>

 

실제 인물이나 사건을 기반한 영화들도 많이 나오고 있지만 그렇다고 영화가 실제 벌어진 일들을 100% 그대로 보여주는 게 아니라는 건 세상 돌아가는 걸 어느 정도 깨달을 나이라면 절대 모를 리 없다.

 

하지만 누군가의 머리 속에서 허구로 만들어진 영화를 보다가 문득 감명을 받거나 깨달음을 얻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나 역시 대학생 시절 갑자기 ROTC를 하겠다고 마음먹고 인생의 진로를 결정한 계기도 리처드 기어 주연의 <사관과 신사>에서 강하고 멋진 군장교에 대한 나름 강렬한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 영화를 대학생 때 봤기 망정이지 고등학교 때 봤으면 사관학교 갈 뻔했다.

 

물론 보는 사람마다 모두 같은 감명을 받는 건 아니다. 어떠 사람에 대한 평가가 모두 각각이듯 영화에서 영감을 얻는 포인트도 각각이다.

 

난 자타공인 호러영화 애호가다. 현실에서 귀신을 만나는 건 절대 사양하지만 영화 속 귀신들은 그리 반갑지 않을 수 없다. 정말 잘 만들어진 공포영화를 한편 보면 그간의 쌓인 스트레스가 눈 녹듯 사라진 것 같이 상쾌함을 느끼기까지 한다.

 

그런 측면에서 인도네시아 공포영화 중에서도 딱 한 편만 추천하라면 조코 안와르 감독의 2022년작 <사탄의 숭배자 2: 커뮤니언(Pengabdi Setan 2: Communion>을 추천한다.

 

< 사탄의 숭배자2>는 일본에서도 <주찬: 사탄의 노예>라는 제목으로 2023년 2월 17일 개봉했다.

 

 

그 <사탄의~>에서는 등장하지 않지만 국내외 많은 영화들이 사람에게 빙의한 악마의 이름을 묻고, 그 악마는 자신의 이름, 이른바 '진명(眞名)'을 감추는 부분에서 인간사회와 악마들이 많은 부분을 비슷하게 공유하고 있다는 엉뚱한 깨달음이 벼락처럼 다가왔다.

 

그런 장면이 등장하는 영화 중 가장 최근에 본 것은 러셀 크로우 주연의 <교황의 엑소시스트(The Pope's Exorcist)>였다. 한국에서는 <엑소시스트: 더 바티칸>이랑 이름으로 개봉된 모양이다.

 

러셀 크로우가 분한 구마사제 가브리엘이 스페인의 한 수도원을 개조한 저택에서 소년에게 빙의한 강력한 악마에게 이름을 묻는 장면이 나온다. 물론 악마는 대답을 거부하지만 가브리엘 신부는 저택 지하의 고대 유적에서 발견한 자료를 통해 악마의 이름을 알아내 본격적인 퇴마의식을 시작한다.

 

이것은 사람들의 이름에 누구에게나 주술적 힘이 깃들어 있어 사악한 주술사가 상대방의 본명을 알게 되면 쉽게 저주를 걸거나 주술적 공격을 할 수 있다는, 그래서 모르는 이들에게 좀처럼 본명 또는 풀네임을 알려줘서는 안된다는 최근 서구 판타지 영화들의 클리셰와도 상통한다.

 

그 장면에서 무슨 감명이나 영감을 받을 수 있겠냐 하겠지만 난 문득 여러 부류의 인간들을 떠올렸다. 연예인들, 고급 술집 아가씨들, 해외출장이 잦은 상사맨들. 이들의 공통점은 대개 영어로 된 예명을 쓴다는 것이다. 물론 그게 문제라는 게 아니다. 그렇다는 것이다.

 

<엑소시스트:&nbsp;더 바티칸>&nbsp;포스터

 

좀 더 뭔가 있어 보이려는 건 모든 사람들이 의식 또는 무의식의 한 부분에서 어느 정도 공유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여러 장의 사진을 찍어 그 중 가장 나은 것을 소셜미디어에 올리고 멋진 외제 승용차가 주차되어 있으면 마치 자기 차인 것처럼 연출한 사진을 찍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다.

 

이름도 그렇다. 권지용보다는 지드래곤, 명신보다는 쥴리라는 이름을 쓰는 건 뭔가 좀 더 있어 보이고 돋보이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악마들이 있어 보이려, 돋보이려 누굴 사칭하거나 이름을 대지 않는 것은 아니니 잘 생각해 보면 연예인, 룸살롱 언니들, 상사맨들이 사실 영화 속에 빙의한 악마들과 별다른 접점이 없다.

 

그 대목에서 싱크로율 99%인 일단의 다른 부류들이 떠올랐으니 바로 온라인 악플러들이다.

이들은 대부분 본명을 대지 않고 익명의 방패 뒤에서 온갖 욕설을 퍼붓는다.

그러다가 본명과 실체가 알려지면 순식간에 전투력을 잃고 상대방에게 고소하지 말고 선처를 바란다며 반성문을 보내오기 시작한다.

 

보이스피싱범들도 마찬가지다. 난 무릎을 탁 치지 않을 수 없었다. 엑소시스트 영화들에 이런 깊은 뜻이……?!

 

진명을 대지 않고 사람에게 빙의해 숙주와 그 가정을 파멸시키려는 악마들,

본명과 실체를 숨기고 상대방을 스토킹하며 온갖 저주를 퍼붓는 악플러들.

 

이들 두 부류는 거의 비슷한 성정과 특징을 공유하고 있는 듯하니 악플과 온라인 스토커에 시달리는 이들은 랩톱 뚜껑에 부적을 하나 붙여 놓거나 컴퓨터를 켤 때마다 성수로 자판과 모니터를 정성들여 닦으면 그 해악이 조금 경감될지도 모르겠다.

 

영화 보면서 이런 감명쯤 받아야 대충 영화평론가 대열에 올라설 수 있는 거 아닐까?

며칠 잠을 못잤더니 갑자기 헛소리가 방언터지듯…… 쿨럭.

 

아무튼 <교황의 엑소시스트>같은 공포영화에 등장하는 악마들의 특성을 보면서 느끼게 되는 건 역시 나쁜 놈들은 자기가 누군지 숨기고 속이려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석연치 않은 일을 지시하고 사주하면서 정작 자신은 그 뒤 흑막 속에 숨어 얼굴도 이름도 밝히지 않는 이들은 분명 저런 악마들과 그외의 많은 특성들도 공유하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영화 한 편 보고 이렇게 세상의 진리를 꿰뚤어봐도 되는 걸까?  

 

 

2023.  5.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