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으로 살아 가기
몰상식의 함정 본문
엔진오일 색깔
일요일 오후에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전화를 건 사람은 2년 전에 산 차를 지인에게 근 1년 넘게 빌려주고 있었는데 차가 퍼졌다는 연락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자기 차를 지인이 고장냈는데 왜 제3자인 나한테 전화했을까요?
“이건 운전수 교육 문제에요. 차를 산 이후 한 번도 엔진오일을 갈지 않은 모양인데 운전사가 거짓말하며 책임 회피한다 합니다”
목소리에 이미 화가 잔뜩 나 있었는데 난 고개를 갸우뚱했습니다.
“벌써 1만 킬로 달렸나요? 지인 분이 차를 멀리 다니셨던 모양이네요.”
요즘은 신차가 나올 때 주행거리 만 킬로 되면 가는 좋은 엔진오일을 넣어줍니다. 그러니 2년 만에 차를 만 킬로를 넘게 타는 건 얼마든지 있는 일이지만 운전사가 여러 번 갈아야 할 엔진오일을 그간 내내 갈지 않은 건 아닙니다. 갈아야 하는 주행거리를 한 번 넘긴 거겠죠.
하지만 그렇다고 엔진오일을 안 갈아서 차가 퍼질까요?
“운전사가 엔진오일을 안 갈았다고 하던가요?”
“그게 아니라, 엔진오일을 갈 때 시커먼 기름이 걸쭉하게 나왔다는 거에요. 척 보면 아는 거죠.”
난 미간을 찌푸렸습니다.
“엔진오일이 다 시커멓지 않아요?”
“무슨 소리에요. 엔진오일 한 번도 안봤어요? 엔진오일이 얼마가 맑은데요!”
그제야 대충 상황이 짐작되었습니다.
“엔진오일 가는 거 한 번도 직접 본 적 없죠?”
“그런 거 내가 왜 가요? 운전사 시켜서 하는 거지. 안봐도 다 알아요!”
“그럼, 3000킬로를 달리던, 만 킬로를 달리던, 차에서 나오는 폐엔진오일이 원래 시커멓고 걸쭉하다는 것도 모르시겠네요?”
이번엔 상대편 말문이 막혔습니다.
“지인분도 아마 이전엔 한 번도 직접 엔진오일 갈아본 적 없는 분인데 이번에 처음 벵껠(차량수리서비스점) 가신 거죠?”
“아, 그게….”
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습니다.
“그래서 그 엔진오일이 시커멓고 걸쭉해서 차가 퍼졌다고 그래요?”
“음, 좀 있다가 다시 전화하겠소.”
그는 그렇게 허겁지겁 전화를 끊었습니다.
운전사 잘못 소개하거나 운전사들을 관리하는 일을 하고 있으면 이런 경우를 당하기도 합니다.
하긴 이런 상황이 전혀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닙니다.
언젠가 자카르타에서 20년쯤 살았던 분이 길이 막혀 자기 차가 제 때 오지 못하자 시내 물리야 호텔에서 내 차를 함께 탄 일이 있습니다. 난 인도네시아 생활 거의 대부분 자가 운전을 했고 그 날도 마찬가지였으니 함께 주차건물로 갔죠.
그분은 주차건물로 들어서면서 감탄사를 연발했습니다.
“내가 여기 20년을 살았어도 이런 대단한 호텔에 이런 컴컴한 주차장이 붙어 있는 줄 몰랐어요. 여기 주차장이 있다는 것도 몰랐네요.”
네. 한국의 회장님들처럼 자카르타에서 평생 운전사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다니면 그럴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차를 20년 차고 다녀도 직접 벵껠에 가서 엔진오일을 교환한 적 없다면 폐엔진오일이 시커멓고 걸쭉하다는 사실을 꿈에도 모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모종의 잘못으로 차가 길바닥에 퍼지게 한 그 지인이란 인간이 자신에게 귀책사유가 있을 그 사건의 책임을 운전사에게 떠넘기려고 그 시커멓고 걸쭉한 폐엔진오일로 빌미를 잡으려 했던 것이고 나한테 전화한 사람 역시 엔진오일에 대한 상식이 없어 그 지인의 세 치 혀에 놀아났던 것이죠.
2023. 5.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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