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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판 바이든-날리면 사태

beautician 2022. 10. 25. 11:18

간자르가 쏘아올린 꽤 큰 공

 

이젠 다들 잊어버렸겠지만 2013년 ‘크레용팝’이란 걸그룹이 ‘빠빠빠’란 노래를 들고 나와 한바탕 세상을 들었다 놓았던 시절이 있었다. 당시 세간에서 주목한 것은 청순함 또는 섹시함을 주무기로 한 기존 걸그룹들과 달리 이들이 추리닝에 오토바이용 반헬멧을 쓰고 나오는 파격을 보였다는 점이다. 노래는 대히트했고 당시 한국 채널 어디에서나 빠빠빠 노래가 흘러나왔다.

 

나한테는 그 노래가 다른 면에서 파격적이었다. 원래 40대 중반쯤 되면 굳이 가사를 따로 찾아보는 것도 귀찮아 들리는 대로 듣는 경우가 많다. 자연히 10대-20대 아이돌 그룹의 빠른 가사가 도대체 뭐라는 건지 이해 안되는 부분이 점점 많아지는 법인데 내게 빠빠빠는 너무나 명백한 부동산 경제에 대한 노래였다. 지금도 유튜브에서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다. 중간에 가수들이 방방 뛰면서 ‘높이 높이!’, ‘점핑’ 같은 가사를 반복하는데 이 곡의 도입부는 분명히 이렇게 시작한다.

 

땅값이 원!

날따라 툭!

 

땅값 떨어진다고 걱정하며 온몸으로 높이뛰기를 하여 애써 땅값 지키려는 어린 걸그룹이 선전하는 걸 보면서 참 대견하다 생각했었다. 굳이 최근 바이든 날리던 논란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그렇게 사람들은 자기 듣고 싶은 걸 듣고 보고 싶은 걸 보는 거다. 물론 어떤 경우엔 다 들리는데 자긴 들리지 않고 남들 다 보는 걸 자기만 못본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10월 18일(화) 버리타사뚜(BeritaSatu) 유튜브 채널에 업로드된 기자회견에서 간자르 쁘라노워 중부자바 주지사가 한 말은 딱 떨어지진 않아도 나름 직역과 의역을 섞어 번역하자면 대략 이런 얘기가 된다. “당이 모든 사안들을 의논한 바에 따라 가장 가장 나은 (대선)후보를 선발하려 한다면, 모두가 이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뒤이어 그는 이렇게 말한다. “국가와 민족을 위한 건데 까짓것 준비 안될 리가 없죠.” 현지 언론들은 이 말을 받아 간자르가 마침내 대선출마의지를 밝혔다고 대서특필했다. 시기적으로 그가 2024 대선출마와 관련해 뭔가 발언을 내놓아야 할 때이기도 했다.

 

가장 최근에 나온 인도네시아 폴링 스테이션(IPS) 설문조사에서도 간자르는 쁘라보워 수비얀토 그린드라당 총재, 아니스 바스웨단 전 자카르타 주지사와 함께 당선가능성이 가장 높은 상위권 그룹을 구축했다. 10월 19일(수) 발표된 이 조사결과는 쁘라보워 30.7%, 간자르 20.5%, 아니스 17.5%로 나타났다. 이들 세 명 중 현재 간자르만 어떤 정당으로부터도 대선 후보로 추대받지 못한 후보로 남아 있다.

 

2024 대선까지 아직 16개월도 더 남은 시점이지만 대선을 위한 대립구도가 착착 모양을 갖춰가는 중이다. 가장 먼저 출마선언을 한 쁘라보워는 이미 정당연합으로 제휴한 국민각성당(PKB) 무하이민 이스칸다르 당대표를 뻘쭘하게 세워둔 채 투쟁민주당(PDI-P)까지 끌어들여 뿌안 마하라니를 부통령 후보 러닝 메이트로 삼으려는 것으로 보인다. 지지율이 훨씬 높은 간자르가 붙어준다면 금상첨화겠지만 대통령 후보로서 각종 여론조사에서 쁘라보워와 엎치락뒤치락하는 간자르는 대통령 자리를 다툴 경쟁상대이지 제휴대상이긴 어렵다.

 

한편 투쟁민주당은 아니스를 대선후보로 추대한 나스뎀당을 조코 위도도 대통령 연정에서 축출하려는 움직임을 강화하고 있다. 연정에 참여한 정당이 별도의 대통령 후보를 추대한 것이 반역행위와 다름없다는 것은 사실 수사에 불과하다. 어차피 민주당, 복지정의당(PKS) 등 야당과 정당연합을 결성해 대선판 입장권을 확보하려는 나스뎀당을 연정에서 쫓아내 이번 대선을 명백한 여당과 야당의 대결구도로 만드는 것이 투쟁민주당으로서도, 그린드라당으로서도 훨씬 유리하기 때문이다.

 

나스뎀당 축출 계획엔 통합인도네시아연대(KIB)을 구성하고 있는 골카르당, 국민수권당(PAN), 통합개발당(PPP)가 감히 나스뎀당을 KIB에 끌어들이려는 시도를 하지 못하게 될 것이란 계산도 엿보인다. 각각의 전현직 당대표들이 장관으로 입각해 있는 KIB 소속 정당들이 아직 조코위 대통령 임기가 남은 상황에서 감히 야당과 손잡는 이른바 ‘반역행위’를 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나스뎀당 측은 민주당 아구스 하리무르티 유도요노(AHY) 당대표를 부통령 후보로 하는 아니스-AHY 구도가 최선이 될 것이며 그 정도는 쁘라보워가 뿌안을 업고서도 얼마든지 상대할 만하다고 여길 듯하다.

 

물론 이 모든 것은 메가와티 수카르노뿌트리 투쟁민주당 총재와 뿌안이 간자르를 주저앉혀 2024 대선에 나오지 못하게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다. 하지만 간자르는 절묘한 시점에 미묘한 수사를 사용해 한편으론 출마선언으로, 또 다른 편으론 그게 아닌 것으로도 해석될 만한 중의적 발언을 내놓았다.

 

간자르 쁘라노워 중부자바 주지사

 

대부분 ‘까짓껏 출마 못할 것 없다’는 의미로 받아들인 간자르의 발언을 마치 성경말씀 묵상하듯 문자 하나하나 분석한 어떤 사람들은 ‘당원이라면 당의 대선후보로 지명을 받을 경우 항상 준비된 상태여야 한다’는 취지의 말을 간자르의 출마의지 피력이 아니라 당의 규정에 복종하겠다는 뜻을 강조한 것으로 완전 반대방향의 해석을 내놓기도 한다. 한 여론조사기관 분석가는 간자르가 해당 발언을 내놓은 것이 그간 그를 대선후보로 추대할 의사를 밝혔던 나스뎀당, KIB의 세 정당, 인도네시아 연대당(PSI) 등을 향해 완전히 문을 닫아버린 것이라고 분석했다. 간자르는 한 마디를 했을 뿐인데 완전히 양극단의 해석이 나온 것이다. 역시 사람들은 듣고 싶은 말만 듣기 위해 스스로의 청력을 의심하거나 자기최면을 걸기도 하는 모양이다.

 

하스토 크리스티얀토 투쟁민주당 사무국장도 10월 19일(수) 기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간자르 발언에 대한 정치적 확대해석을 경계하면서 당원이라면 누구나 다 후보지명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라며 별 의미가 없는 것처럼 무마하려 애썼다. 늘 호전적이고 말꼬리 잡아 조롱하거나 빈정거리기의 명수인 하스토 사무국장이 모처럼 간자르의 해당 발언을 일축하거나 비난하지 않는 모습은 이례적이기까지 하다. 끄자웬의 본고장 중부자바 출신 노련한 정치가답게 간자르는 잘 계산하고 준비된 발언을 통해 분명히 자신이 대선에 나갈 준비가 되었다고 만천하에 밝히면서도 그간 자신을 못잡아먹어 안달이었던 당내 엘리트 간부들의 비난을 사전에 막아버리는 고단수의 수사를 쓴 것이 기가 막히게 먹힌 것처럼 보인다.

 

입에서 불을 뿜을 것이라 예상했던 메가와티 측에서 대체로 침묵하는 것 역시 매우 이례적이다. 하지만 그 이유 역시 사뭇 명백하다. 메가와티도 이제 중대한 기로에 섰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간 모호한 입장을 취해 왔던 간자르가 분명한 출마의지를 피력했는데 이제 더 모욕하고 밀어부치면 그건 간자르에게 탈당 명분을 주는 셈이기 때문이다. 간자르가 자유계약선수로 풀리면 아직 내로라할 자기 후보가 없는 KIB가 제일 먼저 두 팔 벌려 그를 환영할 것이고 여당 vs 야당 대결구도를 그렸던 쁘라보워와 메가와티, 그리고 아니스는 좀 더 복잡한 삼파전을 준비해야 하는 상황에 돌입해야 한다.

 

모든 것은 메가와티에게 달렸다. 이제부터는 더 이상 지금까지처럼 무시와 모욕으로 주저앉히려 한다면 간자르의 탈당을 막을 수 없으니 구슬러야 하는 시점이다. 만약 탈당한다면 한 간자르는 자신의 주지사 임기가 끝나는 내년 9월을 택하거나 그 즈음에 소속정당으로부터 탄압받아 부당하게 쫓겨나는 장면을 연출하려 할 것 같다. 그래야만 가장 효과적으로 투쟁민주당 측 자신의 표를 큰 인원손실 없이 데려갈 수 있을 터이니 말이다.

 

그래서인지 투쟁민주당 당내에서도 뿌안이 간자르에게 대선 출마 길을 열어줘야 한다는 담론이 마침내 나오기 시작했다. 당 중앙위원회가 뿌안을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려는 대령위원회에 가입한 일단의 간부들에게 각각 경고장을 보낸 것에도 특별한 정치적 메시지가 함축되어 있다. 그들과 대립하며 간자르를 지지하는 상병위원회에는 아무런 경고조치가 취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이는 대령위원회 소속 현직 국회의원들을 포함한 당 엘리트들에게 간자르에 대한 공격을 자제하라는 메시지로 읽힌다.

 

간자르가 10월 18일(화) 쏘아올린 공은 그가 난장이가 아닌 것처럼 공도 꽤 컷던 것 같고 이제 그 공이 어디에 어떤 형태로 떨어지든 그 여파가 만만치 않을 듯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