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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리뷰] <군달라: 이 나라엔 영웅이 필요해>

beautician 2022. 9. 15. 11:40

[영화 리뷰] <군달라: 이 나라엔 영웅이 필요해>

 

얼마 전 부미랑잇 유니버스의 두 번째 로컬 수퍼히어로 영화 <스리아시(Sri Asih)>가 2022년 10월 6일 개봉한다는 기사가 나왔습니다. 관련 트레일러도 공개되었죠.

 

영화&nbsp;<스리아시>의 포스터는&nbsp;2022년&nbsp;8월 아직 나오지 않았다.&nbsp;스리아시 역의 페비타 피어스.

 

여기 등장하는 여배우 페비타 피어스는 감히 인도네시아 여배우들 중 가장 예쁜 외모를 가졌다고 생각합니다. 영국인 아버지와 깔리만탄 반자르마신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1992년 태어난 동서양 혼혈로 페비타 클레오 에일린 피어스(Pevita Cleo Eileen Pearce)라는 긴 이름을 가진 그녀는 2013년 작 <판데르베익호의 침몰(Tenggalmnya Kapal Van Der Wijck)>의 여주인공 하야티로 분했는데 그 서구적 미모로 미낭까바우 관례와 전통에 꽁꽁 묶인 시골처녀 하야티를 잘 연기할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하지만 함카의 소설 원작을 보면 그녀가 적격이었다는 걸 금방 알게 됩니다. 하야티는 자기 마을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녀로 묘사되고 있으니까요.

 

그녀는 부미랑잇 유니버스의 첫 번째 영화인 <군달라(Gundala)>의 맨 마지막 장면에도 잠깐 등장해 해당 유니버스의 다음 프랜차이즈 영화에 대한 기대감을 높였습니다. 다행히 첫 영화가 170만 명 가까이 관객이 들며 2019년 로컬영화 흥행순위 10위를 차지하면서 후속작이 무리 없이 나올 수 있는 그린라이트를 선사했습니다. 무려 조코 안와르 감독이 만든 작품이었으니까요. 조코 안와르 감독은 최근 10년 사이 승승장구하고 있고 지난 8월 초 개봉한 <사탄의 숭배자 2: 커뮤니언(Pengabdi Setan 2: Communion)>이 개봉 12일 만에 관객 500만 명을 돌파하면서 2017년 최고 흥행한 전편의 기록을 스스로 깨고 크게 흥하는 중입니다.

 

한편 부미랑잇 유니버스의 라이벌을 자처하며 마하바라타 와양그림자극의 영웅들을 매년 한 편씩의 스크린으로 불러내기로 한 사트리아 데외 유니버스의 첫 영화 <사트리아 데와: 가똣까차(Satra Dewa: Gatotkaca)>가 지난 6월 초 개봉했지만 20만 명을 넘길동말동 하면서 결국 흥행에 처참하게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저렇게 되면 앞으로 계속 만들기로 한 나머지 여섯 편은 나오기 힘들게 되는 거죠. 그것도 조코 안와르 감독과 충분히 비빌 수 있다고 내세운 무려 하눙 브라만티요 감독 작품인데 말이죠. 하눙 감독은 이번에 크게 체면을 구기고 말았습니다.

 

2019년 인도네시아 로컬영화 상위&nbsp;15편 흥행순위

 

<군달라>에는 ‘Negeri Ini Butu Partiot’(이 나라엔 영웅이 필요해)란 홍보 카피가 붙어 있는데 이걸 부제로 오인한 사람들이 많았던 모양이고(홍보행사 당시 배우들이 그런 문구가 다 쓰인 티셔츠를 입고 다녀 더욱 그런 상황을 부추김) 그래서 OTT 플랫폼에는 <군달라: 수퍼히어로의 탄생>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부미랑잇 측은 미국 마블이나 DC를 벤치마킹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군달라>역시 하스미(Hasmi)라는 필명으로 알려진 하리야 수리야미타나 작가가 1969년에서 1982년 사이 23권에 걸쳐 연재한 <군달라, 벼락의 아들(Gundala Putra Petir)>이란 만화를 원작으로 했습니다. 물론, 부미랑잇이 내놓을 다른 모든 수퍼히어로들은 모두 만화 원작을 가지고 있습니다.

 

<군달라,&nbsp;벼락의 아들>&nbsp;만화본

 

<군달라>의 전개는 대체로 단순하고 예측 가능합니다. 아버지가 노동운동을 하다가 죽고 일하러 간 어머니는 돌아오지 않아 혼자가 된 주인공 산차카는 길바닥 야생에서 무술을 익혀 공장 경비원으로 취직합니다. 그가 사는 도시는 현실의 자카르타가 아니라 폭력과 범죄가 판치는, 거의 무정부 상태의 배트맨 동네 고담시와 비슷한 설정입니다. 불의를 보고 지나치지 못하는 정의감과 이웃을 염려하는 연민을 가진 산차카는 한 시장통 사람들을 도와 깡패들과 싸우다가 어떤 시점에 벼락을 다루는 군달라로 각성하여 사실상 도시를 지배하고 있던 악당 뼹코르와 맞서 싸우죠.

 

조코 안와르 감독이 원작을 각색해 시나리오를 썼는데 조금 지나친 설정과 개연성 떨어지는 전개가 곳곳에서 눈에 거슬립니다. 하지만 이 영화가 인도네시아 영화 역사상 제대로 된 첫 현대 수퍼히어로 영화라는 점에서 대체로 용서가 됩니다. 물론 예전에 인도네시아에 수퍼히어로를 다룬 영화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고대 전설이나 민화를 다룬 영화들에는 귀신이나 마물들과 함께 인간의 표준을 아득히 넘어선 신체능력과 도술을 사용하는 도인들이 등장하는데 그게 수퍼히어로 아니면 뭐겠습니까? 그래서 여기 제대로 된 첫 현대 수퍼히어로 영화라는 좀 긴 꼬리표를 단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적할 수밖에 없는 문제점들은 대부분의 후속작을 염두에 둔 영화들이 그렇듯 뿌려둔 떡밥을 후속작에서 회수할 목적으로 정작 이번 작품에서는 인물이나 사건의 배경, 생각의 흐름, 결정의 이유 같은 것들이 제대로 설명되지 않은 부분들이 적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주인공이 아직 길거리 꽃제비로 살던 시절 무술을 가르쳐준 아왕이란 형 뻘 되는 소년과 헤어지게 되는데 뭔가 중요한 인연일 것만 같은 아왕에 대한 이야기가 더 이상 나오지 않는 점, 주인공은 어느날 퇴근하지 않고 영영 돌아오지 않은 어머니가 자기를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다른 도시 병원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만 왜 그랬던 건지, 그래서 어쩌겠다는 건지 후속 전개가 이어지지 않습니다. 마지막 옥상 격투장면에서 주인공이 때리거나 던지면 휙휙 날아가버려 다시 무대로 돌아오지 않는 악당들의 생사여부를 알려주지 않는 것도 꽤 불친절하다고 느껴집니다.

 

이 영화의 최고 빌런 뼹코르는 어린 시절 폭도들에게 부모를 잃고 방화에 휘말려 얼굴 반이 화상으로 일그러진 후 고아원에 버려졌다가 그곳 친구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나쁜 원장과 고아원 직원들을 징계했다는 배경이 그려지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가 극악무도한 악당이 되어 도시를 지배하게 되고 그의 고아원 친구들이 장성해 사회 곳곳에서 자신의 일상을 살면서도 호출을 받으면 살인귀 전사가 되어 뼁코르에게 합류한다는 설정(마치 <본 아이덴터니> 연작에 나오는 미 정보국이 보유 유럽 각 도시의 자산들처럼), 태아 시기에 산모에게 주사하면 이후 태어난 아기가 성장해 부도덕 무정부주의자가 된다는 설정 같은 것들도 좀 억지스럽습니다.

 

하지만 반가운 얼굴들의 좋은 연기가 모든 것들을 말이 되게 만듭니다. 사실 저 배우들이 반가웠던 것은 2022년의 <사탄의 숭배자 2>를 먼저 보았기 때문인데 거기서 본 배우들이 <군달라>에서도 상당수 등장합니다. 조코 안와르 감독은 영화가 바뀌어도 쓰던 사람을 다시 기용하는 타입인가 봅니다.

 

왼쪽부터 아비마나 아리야사트야,&nbsp;타라 바스로,&nbsp;브론트 빨라래

 

이 영화에서는 스스로 군달라임을 아직 자각하지 못하는 주인공 산차카 역의 아비마나 아리야사트야는 82년생 배우로 2005년부터 다양한 영화에 얼굴을 비쳤습니다. 타라 바스로와 브론트 빨라레는 <사탄의 숭배자> 시리즈에서 가장인 아버지와 맏딸로 출연합니다. 이들 말고 <사탄의 숭배자> 우스탓으로 나오는 이도 <군달라>의 시장통에 있더군요. 아마 더 있을 겁니다.

 

영화에서 묘사된 군달라는 마블의 스파이더맨 포지션이란 인상이 강합니다. 풍족하지 못한 생활을 하면서도 정의감에 도시의 밤을 지키는 그런 타입이죠. 한편 영화 마지막에 잠깐 등장한 스리아시는 수행원도 있고 좋은 차에 올라타는 것으로 보아 꽤 부유한 생활을 하는 인물로 보입니다. 등장인물들 특히 수퍼히어로들을 잘 설정하는 건 부미랑잇 유니버스의 영화들이 성공하도록 만드는 핵심입니다. 앞으로 나올 히어로들은 바글거리는데 인도네시아 영화산업의 시나리오 작가들은 그 숫자가 충분치 않고 역량도 많이 떨어집니다. 앞으로 십 년도 넘게 이어질 수도 있는 해당 유니버스 영화들의 스토리가 나중엔 서로 발목을 잡는 그런 상황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출연 대기 중인 부미랑잇 유니버스의 수퍼히어로들

 

설정이나 스토리 전개의 문제라면 그건 비평의 대상이지만 생경한 문화는 설명이 필요한 부분입니다.

 

영화는 대체로 허구의 시간과 공간 위에서 펼쳐집니다. 그런데 인도네시아인들이라면 대개 알고 있을 만한 무속문화를 모르는 외국인이라면 살짝 오해할 만한 장면이 있습니다. 아마도 뼁코르와는 다른 주머니를 차고 있는 듯한 악당들이 누군가의 잘린 머리를 들고와 어떤 지하시설의 벽을 허물고 몸을 찾아내죠. 그 몸에 머리를 붙이니 무시무시한 표정의 노인이 되살아나 벽 속에서 걸어나옵니다.

 

자료를 찾아보니 그는 이후 군달라를 괴롭히는 몇몇 막강한 빌런들 중 가장 강한 불멸자 끼윌라욱(Ki Wilawuk)입니다. 마타람 시대의 인물이라고 하는데 마타람 왕국은 16세기 후반에 시작되니 끼윌라욱은 지금으로부터 600년쯤 전에 활동했던 인물이죠. 인간의 피를 마셔 죽음에 저항할수 있었던 그는 뚜먼궁 위랄라가라는 인물에 의해 목이 잘리고 목과 몸이 따로 보관되죠. 하지만 그건 그가 흡혈귀라서가 아닙니다.

 

목과 몸을 분리하지 않으면 나중에 서로 붙어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흑마술이 적지 않은데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은 일무라웨론떽(Ilmu Rawe Lontek)입니다. 이 주술을 익힌 사람은 창칼에 상하지 않는 금강불괴의 신체를 갖게 되는데 만약 어떤 특별한 방법이나 무기로 그를 죽인다 해도 목을 분리하지 않으면 다시 살아납니다. 죽이기도 힘든데 죽여도 다시 살아나니 여간 번거로운 상대가 아닐 수 없습니다.

 

네덜란드 점령군들과 싸우던 인도네시아의 우국지사들 중에도 전투력과 용기를 끌어올릴 목적으로 이런 주술을 익힌 사람들이 많았다고 하며 자카르타의 전설처럼 전해지는 바타비아의 로빈훗 시삐뚱(Si Putung)도 일무 라웨론떽을 익혀, 그를 죽인 총독부가 굳이 목을 분리해 몰래 따로 묻어 부활을 방지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자칫 시윌라욱을 서양의 흡혈귀 정도로 착각할까봐 이 부분을 첨부합니다.

 

이분이 시윌라욱

 

<군달라>는 이미 2019년에 나온 영화지만 오는 10<스리아시>를 위시해 부미랑잇 유니버스의 후속 영화들을 즐기려 마음먹은 사람드른 우선 OTT에서 <군달라>부터 챙겨볼 것을 권합니다. (끝)

 

 

<군달라>&nbsp;포스터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