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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의 삶

작가의 마감

beautician 2022. 6. 25. 11:57

원고 종류에 따른 중압감과 가성비의 차이

본문 내용과 관계 없음^^

 

한국에 있는 중국, 인도네시아 교민 출신들과 2021년 한 해 동안 매일 함께 글을 쓰는 밴드 모임을 했습니다.

당시, 일년 내내 글을 쓸 소재를 가지고 있었다는 게 스스로도 신기하게 느껴졌습니다.

 

이제 그 모임 마지막 글을 쓴지도 반년쯤 지난 시점에  당시 썼던 글들을 한번 훑어 볼 기회가 있었는데 참신한 소재에 대한 글도 있었지만 대개는 예전에 한번 쓰거나 생각해 보았던 주제에 대한 것들이 많았고 의외로 '마감'에 대한 글도 적지 않았습니다.

 

작가에게 있어 마감이란 운명과도 같은 것인데, 그 주제를 많이 다룬 이유는 최근 스스로 마감에 치이고 있다는 생각을 많이 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2016년부터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 이후 마감이 부담스럽다고 생각한 적이 없는데 최근 들어  마감이 임박할 떄까지 원고의 첫 문장 한 줄도 쓰지 못하는 경우가 점점 더 늘어나고 있습니다. 결국 원고 마감을 하루 이틀 앞두고 밤을 세는 경우가 빈발하고 그간 금기시 했던 마감연장 요청을 최근 1년 간 열 번도 넘게 냈던 것 같습니다. 당연히, 왜 그런 상황이 자꾸 벌어지는지 생각해 보지 않을 리 없습니다.

 

사실 1980년대부터 작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품었습니다. 그것이 이루어진 것이 2016년 이후였으니 30년 넘게 그 꿈을 품었습니다. 그동안 당연하게도 유명한 작가들의 글은 물론 그들에 대한 이야기들에 관심을 가졌고 마감에 시달리는 작가들의 생활에 대해 일종의 동경심을 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나도 마감에 시달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요.

 

그런데 이제 와서 내게 마감이 엄청난 중압감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물론 당연히 작가로서의 책임감이 우선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이지만, 기본적으로는 내게 잘 맞지 않는 글, 감당하기 어려운 주제, 가성비와 관련된 경제적 문제 등이 복합적으로 엮여 있기 때문이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작가라면 모름지기 기본적으로 써야 할 창작물, 즉 단편소설이나 수필 같은 것에는 별다른 부담이 없어야 합니다. 더욱이 긴 글을 즐겨 쓰는 사람으로서 A4 기준 3~6장 정도를 써야 하는 수필이나 간단한 에피소드들은 쉬운 과제입니다. 별다른 준비를 하지 않더라도 어떤 사물이나 사건에 작가 스스로 가지고 있는 가치관과 세계관을 투영하면 자연스럽게 발현되는 느낌과 감정을 쓰는 것이니 말이죠. 글의 종류에 따라 어느 정도 사전 자료준비가 필요하지만 기본적으로 이게 안되면 작가가 아닌 겁니다.

 

평론이나 리뷰 같은 것들은 관련된 책을 읽거나 영화를 봐야 하는 시간, 공간적 선행행위가 있어야 하므로 반드시 사전에 시간을 할애할 필요가 있지만 일단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나면 어렵지 않게 쓸 수 있는 원고들입니다. 단지 내가 어느 정도의 기초지식과 취향,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느냐에 난이도가 결정됩니다. 그러니 그 글을 쓰는 것은 내 소양의 문제일 뿐 마감을 좌우하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오래동안 해온 영화와 출판 관련 문체부 산하단체의 조사 보고서들은 조금 더 자료 준비에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합니다. 하지만 미리미리 기사들을 스크랩해서 번역해 놓고 전반적인 해당 산업상황을 이해하고 있다면 크게 어렵지 않습니다. 단지 출판 부분은 영화에 비해 관련 기사가 적고 출판협회나 출판사들이 내는 보도자료, 관련 행사들이 적어 자료 축적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하지만 한 달에 한 번 제출할 보고서를 위해 매주 자료 스크랩을 하면 마감에 맞춰 원고를 준비하는 데에 큰 지장은 없습니다.

 

실제로 마감의 중압감을 주는 것은 격월로 마감이 찾아오는 한국언론재단의 '신문과 방송' 원고입니다. 현지 산업현황이나 현지 정치-사회-문화에 대한 동향, 분석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런 것들의 보도에서 발견되는 현지 언론들의 보도행태, 관련 법규, 정부나 관련 기관, 단체의 입장, 시각 같은 것에 대한 글을 써야 하는 것이죠. 이것은 현지 매체들의 보도를 읽고 상황을 이해, 분석하는 것을 넘어, 그 기사를 쓴 기자나 매체의 논조를 곱씹어봐야 한다는 점에서 난이도가 조금 올라갑니다.

 

거기에 인도네시아 대부분 매체들은 기사에 기자나 데스크의 논조, 기조, 정치적 성향, 결론에 대한 방향성 등을 다분히 담는 조중동과 달리 대부분 드라이하게 팩트만을 적기 때문에 행간에 있을 지도 모를 기자의 의지를 읽어야 한다는 점에서 난이도는 또 한 단계 올라갑니다.

 

그리고 인도네시아는 UU ITE 법이 시행되어 보도 한 번 잘못하면(심지어 SNS에 말 한 번 잘못 해도) 잡혀가기 쉽고 SARA 규정이 강력해 법적 사회적 문화적으로 물의를 빚는 내용은 매체에 실리지 못하거나 사회적 지탄, 법적 규제의 대상이 됩니다. 그러니 '신문과 방송' 원고를 쓰려면 좀처럼 보이지 않는 부분을 찾아내 써야 한다는 부담을 감수해야 합니다. 격월제이니 원고를 준비할 시간이 두 달이나 되지만 이 원고의 마감을 대기 힘든 이유는 그런 점에 있습니다. 주제를 정하기가 우선 어렵고, 주제를 정해도 어떻게 첫 문장을 쓸지, 어떤 기조와 방향으로 글을 이끌어 갈지 쉽지 않기 떄문이죠.

 

이번 달에도 6월 8일 마감인 이 원고를 6월 14일이 되어서야 간신히 보냈지만 스스로도 원고 내용이 아주 훌륭했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주제는 흥미로웠고(인도네시아 정부가 보로부두르 사원 입장료를 15배 올리려 했다가 좌절된 사건) 이와 관련해 거의 모든 매체들이 1주일 사이 적게는 수십 개 많게는 수백 개의 관련기사들을 쏟아냈지만 팩트 전달 이상의 기조나 의지를 내포한 기사들을 찾아내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마감을 지키기 어려운 원고들은 가성비와도 관계가 있습니다. 현지 매체에 기사를 번역해 제공하는 일은 일반적으로 한국매체들에서 받는 원고비에 크게 미치지 못하지만 위에 언급한 집필작업을 하기 위한 기초 정보를 축적한다는 측면에서 과외의 도움이 되는 부분이 큽니다. 그러니 원고료를 받지 못해도 꼭 해야 하는 일을 어쨋든 유료로 작업하니 오히려 가성비가 높다고 할 것입니다.

 

아예 원고비가 책정되지 않은 원고들의 마감독촉을 받는 건 좀 곤란한 일이지만 전업작가가 되고 책을 여러 권 낸 이후 이런 경우는 현저히 줄어들고 있어 지금 원고비를 받지 않고 글을 보내는 것은 대개 내가 스스로 원해서 하는 것들인 경우가 많습니다. 

 

정말 문제는 원고료는 받지만 가성비가 너무 떨어지는 것들입니다. 통신원을 선발해 놓고 기사 당 5만 원 원고비를 책정했는데 한 달 원고비를 40만원, 즉 8회 게재하는 것으로 정해놓은 매체들이 있습니다. 그게 어디냐 할 수도 있지만 전 세계 곳곳 시간대가 다른 곳에 사는 통신원들에게 한국시간 9시까지 기사제안을 넣고 데스크가 거기 동의하면 작성하여 제출하는데 관련 사진들도 저작권 문제 없는 것들을 스스로 찾아야 하고 그렇게 제출한 원고가 데스크를 통과하지 못하는 경우도 생깁니다. 결국 한 달에 8회 게재하기 위해서는 10~15회 정도 이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한달의 반 정도를 여기 매달려야 40만원을 벌 수 있다는 얘기가 되는 겁니다. 다른 매체나 기관, 단체에서 A4 3~6장 짜리 원고 하나에 50~70만 원 정도를 받는 상황이 되면 한국 매체와 이런 조건의 통신원 계약을 맺거나 유지하는 것이 더 이상 불가능하게 되는 거죠.  

 

한국 A지는 한 때 전세계 통신원들이 자신이 일하고 있는 국가에서 편한 시간대에 현지 기사를 송고하면 데스크가 열일하며 거기서 괜찮은 기사들을 뽑아 웹신문에 게재하고 좀 더 유력한 기사들은 데스크가 편집, 수정하여 종이신문에 실었습니다. 정상 월급을 받는 본사 정직원 기자들에게 적용하는 규정을 강요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아마도 그렇게 지불하는 원고료가 예산을 초과했는지 지구 반대편 통신원들이 도저히 따라가기 힘든 규정을 또 다시 강요하기 시작해 그 사이 전세계 40-50 개국에서 선발한 통신원들 중 실제로 기사를 송고하는 사람들은 3~4명으로 대폭 줄어들고 말았습니다. 나 역시 더 이상 계약을 연장하지 않았어요. 그 마감을 그 조건으로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너무 많은 곳에 원고를 보내고 있기 때문에 마감에 대한 중압감이 커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A지와 계약을 연장하지 않은 것은 잘한 선택이라 생각합니다. 보사부 산하기관 통신원으로 선발된 것도 몇 개월 전의 일이지만 이 일도 거의 손을 뗀 상태입니다. 우선 인도네시아 통신원이 나 혼자가 아니라 한 명 더 있으므로 내가 모든 책임감을 떠안을 필요도 없거니와 가성비와 조건 면에서 A지와 크게 다를 바 없기 때문입니다. 장기적으로 산업동향을 모니터링해 한달에 한 번 관련 조사보고서를 제출하는 예의 두 군데 문체부와 달리 이 기관은 관련 규정의 발표나 변경이 발생한 날로부터 2일 이내 보고서 제출 등의 규정이 있어 매체에 최신기사를 보내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앞서 언급한 1년간 글쓰기 했던 내용 속 마감 관련 글들을 보면 너무 징징거렸다는 느낌도 강합니다. 물론 그만큼 중압감을 느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예전에 꿈꿨던 대로 낭만적인 작가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글쓰는 일감에 대한 전반적인 구조조정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명색이 작가라면 글 쓰는 일이 즐거워야 할 테니까요.

 

2022. 6.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