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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의 삶

CGV 바우처 사기꾼으로 몰린 날

beautician 2022. 6. 10. 12:11

예기치 않았던 영화 바우처 논란

 

마지막 한 장 남은 바우쳐

영화 바우처를 선물받는 건 기분 좋은 일입니다.

 

비록 2D 영화에 한정되어 있어 3D 영화나 고급 클라스 상영관에는 들어갈 수 없지만 평일보다 비싼 가격을 내야 하는 주말이나 휴일에도 추가 비용을 내지 않고 바우처 한 장이면 영화 한 편을 볼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이점이죠. 특히 영화를 무척 좋아하기도 하고 가끔은 의무적으로 영화 리뷰도 써야 하는 내 입장에서는 지갑 속에 들어있는 영화 바우처가 마치 든든한 뒷배 같은 느낌마저 듭니다.

 

특히 한국에서 흔히 선물용으로 유통되는 문화상품권처럼 CGV 바우처는 영화관람 비용을 부담스러워 하는 현지인 지인들을 위한 선물로도 손색이 없습니다. 어디 무슨 좋은 영화가 있으니 가서 보라고 말하는 것 만으로는 좀 무책임한 느낌이 듭니다. 식구들 4-5명이 함께 영화를 볼 때 드는 비용은 내 주변의 현지인들, 특히 차차네 식구들에겐 꽤 부담이 됩니다. 영화 보라며 돈을 쥐어쥐는 것도 별로 좋은 모양이 아니고 언제 어느 영화관 가서 어떤 스튜디오에서 보느냐에 따라 가격은 천차만별인데 바우처를 건네 주면 깔끔하고 부담도 없죠.

 

지난 연초 1월 20일 CGV 임원 인터뷰를 갔다가 바우처 10장을 선물 받아 그렇게 두 집에 일곱 장을 나누어 주고 나머지 세 장을 오랫동안 지갑에 가지고 다니다가 5월 28일(토) 주말을 맞아 그랜드인도네시아 8층 CGV를 가서 <탑건: 매버릭>을 보려고 두 장을 썼습니다.

 

1월에 받은 바우처를 5월 말에 쓰게 된 것은 가까이에 CGV가 없어 인근 아르타가딩몰이나 끌라빠가딩몰의 Cinema XXI이나 모이 몰의 플릭스(Flix) 상영을 즐겨 쓰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바우처 유효기간이 2023년 1월 31일까지로 찍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바우처를 받던 1월 20일날, 1년 넘는 유효기간이 찍힌 것에 이례적이란 생각이 들었지만 CGV 본사에서 임원 인터뷰를 마친 후 받은 선물이어서 아마도 특별히 기간을 길게 잡아 준 것이라 생각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바우처 바코드를 여러 번 찍어보던 티켓 창구 직원이 잠시 기다리라며 10분쯤 자리를 비웠습니다. 뒤에서 줄 서 기다리던 현지인들이 짜증 섞인 탄식소리를 내며 옆줄로 이동하고 내가 보려 했던 영화는 이미 시작해 버렸는데 좀 있다가 돌아온 직원이 이렇게 얘기합니다.

 

“이 바우처는 지난 1월에 이미 사용한 것으로 되어 있어서 더 이상 사용할 수 없어요. 혹시 다른 바우처를 가져오신 게 있나요?”

 

CGV 그랜드인도네시아점은 매년 한-인도네시아 영회 페스티벌이 열리는 CGV의 인도네시아 플래그쉽 상영관이니 안쪽 어딘가에 제대로 된 사무실에 직원들이 잔뜩 있었을 텐데 거기서 확인했다면서 그렇게 말하는 직원에게 난 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짓지 않을 수 없었어요.

 

“음……, 이거 봐요. 바우처가 이미 사용되었다면 그 바우처가 왜 아직 내 손에 있겠어요? CGV에서 이미 회수한 상태여야죠. 그리고 거기 유효기간을 보세요. 2023년 1월 31일까지라고 써있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이미 사용된 바우처일 수가 있죠?” (위의 사진 참조)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너무나 예상했던 대로였습니다.

 

“매니저가 그렇게 확인해 주었어요. 이미 사용된 상태이니 사용할 수 없다고요.”

 

돈을 내거나 돌아가란 겁니다. 그런 이야기 듣고 거기서 ‘알았습니다, 죄송합니다’ 하고 돌아 나올 한국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더욱이 난 주변 사람들 앞에서 위조 바우처를 내밀고 영화를 보겠다는 미친 놈이 되어 있었습니다. 결국 CGV 창구 직원은 지난 1월 CGV 본사측에서 나에게 사용할 수도 없는 바우처를 선물로 줬다는 얘기를 하는 건데 그걸 서면으로 확인서를 받거나 매니저의 목소리로 녹음을 해서 최소한 내가 영화를 공짜로 보려고 사기를 치려 하는 인간이 아니라는 증거를 만들어야 할 거라 생각했습니다. 마침 내 지갑엔 마지막 바우처 한 장이 남아 있으니 유효기간과 바코드가 포함된 앞뒤 사진과 매니저 녹음과 함께 인터뷰 당시 명함을 받았던 직원에게 이메일로 보내 왜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인지 설명을 듣거나 최소한 내가 바우처로 장난친 게 아니었다는 확인을 받아야한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물론 나중엔 다 부질없는 짓이라 생각했지만요.)

 

“이걸 사용할 수 없다는 거 이제 알겠어요. 하지만 나도 입장이 있으니 여기 녹음할 수 있도록 아가씨 이름과 직위를 말하고 바우처 일련번호를 읽은 다음 이걸 왜 사용할 수 없는지 다시 얘기해 줘요. 나도 내가 왜 이런 상황을 당해야 하는지 책임 있는 사람들에게 설명을 들어야 하니까요.”

 

핸드폰에 녹음기능을 켜고 이렇게 얘기하니 티켓 창구 직원이 말을 못하고 머뭇거립니다. 그러자 2분쯤 지나 사무실 담당자라는 다른 여직원이 나왔습니다. 내가 다시 녹음을 요구했더니 자기가 재량권을 발휘해 티켓을 끊어주겠다고 태세전환을 했습니다. 난 살짝 기가 막혔어요. 바우처는 쓸 수 없는데 영화는 보여주겠다? 더 기분이 상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아내와 함께 영화를 보러 왔다는 것입니다. 영화는 이미 시작해버렸는데 언제까지나 창구에서 싸우고만 있을 수는 없었던 거죠. 매니저가 끊어주는 티켓을 들고 상영 스튜디오 안으로 들어가는데 내가 블랙 컨슈머가 된 듯, 빌런이 된 듯 더러운 기분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가만이 생각해 보면 난 어차피 공짜 티켓을 얻었던 거였고 세상엔 공짜란 없는 법인데 이날 영화를 공짜로 볼 수 없다고 해서 크게 잘못된 건 아닐 터였습니다.

 

더욱이 잘 생각해 보면 바우처에 1년도 넘는 유효기간이 찍혀 있었다는 것부터 이상한 일이었어요. 어쩌면 2022년 1월 20일 CGV 측에선 2022년 1월 31일까지 유효기간인 바우처를 주려 했던 건데 급히 서두르다 보니 날짜 도장을 잘못 조정해 2023년 1월 31일이라고 찍어서 줬고 그걸 준 사람도 자기가 그렇게 도장을 잘못 찍었다는 걸 전혀 자각하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게 다 이해가 됩니다. 당연히 내 바우처는 2022년 1월에 이미 유효기간이 만료된 것입니다.

 

집에 돌아가는 내내 CGV 창구직원과 매니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더 큰 문제가 있었습니다. 난 그 유효기간이 당연히 도장 찍힌 대로 2023년 1월 말이라 생각하고 두 가정에게 일곱 장을 나누어 준 것이 이미 1월말이 훌쩍 지난 2월 언젠가였기 때문입니다. 그간에도 그들에겐 영화 보러 갔었냐? 바우처 썼냐? 물어보았지만 양쪽 다 아직 쓰지 않았다는 대답이었어요. 그랜드인도네시아에서 집으로 돌아와 그 두 사람에게 와츠앱으로 다시 물었습니다.

 

“바우처 썼니? 언제 어떤 영화 봤어? 혹시 바우처 쓸 때 문제없었어?”

 

하지만 이번에도 둘 다 아직 바우처를 쓰지 않았다고 대답해 왔습니다. 그제서야 감이 왔습니다. 두 사람은 이미 영화관에 가서 바우처를 썼는데 나와 똑 같은 상황을 당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생돈을 내고서 보려 했던 영화를 보았거나, 보지 못하고 영화관에서 돌아 나왔겠죠. 하지만 나한텐 차마 내가 쓰지도 못하는 바우처를 자기들에게 줬다는 얘기를 할 수 없었던 겁니다. 그러니 2월에 준 바우처를 5월말이 되도록 아직 쓰지 않았다고 대답하고 있는 것이죠.

 

난 잠시 고민하다가 계산기를 두드렸습니다. 토요일 그랜드인도네시아 CGV의 2D 영화 관람료는 일인당 8만5,000 루피아였습니다. 그 두 명에게 네 명 분, 세 명 분 영화 티켓 가격을 각각 송금해 준 후 다시 와츠앱 문자를 넣었습니다.

 

“그 바우처 쓰지 마. 오늘 내가 써보니 좀 문제가 있더라. 대신 영화티켓 값 보내니 이걸로 주말에 영화 봐. <탑건>도 재미있고 <무용수 마을의 대학생봉사활동>도 괜찮더라. 꼭 보러 가.”

 

생각해 보면 CGV 상영관 창구직원이나 거기 서 있던 다른 관객들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 두 친구와 그 집 아이들이 날 어떻게 생각했을까 생각하니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영화 바우처를 선물받는 건 매우 기분 좋은 일이어야 하는데 이번만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2022. 5.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