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으로 살아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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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역과 부탁
막 뛰다가 잠시 멈춰 심호흡하는 시간.
내가 지금 뛰어야 하는 이유는 30대 중반 이후 수많은 장애물과 함정에 걸려 넘어지며 제대로 뛰지 못했기 때문이지만 지금은 당장 뛰지 않으면 나중에 더 이상 뛸 수 없는 환경에 처할지도 모른다는 현실적 우려가 점점 더 커기지 때문이다.
최근 시도 때도 없이 어지럼증을 일으키는 왼쪽 귀 세반고리관, 가끔 쥐어짜는 듯한 왼쪽 가슴의 통증(폐나 심장이 이런 통증을 만들 리 없으니 십중팔구 위나 식도의 문제)은 언젠가 정말 심각한 문제가 되어 다가올 지도 모른다. 뭐, 인생이 다 그런 거긴 하다. 그 부분에 대해선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나를 밀어붙이는 것은 분명 강박관념이지만 그 배경엔 내가 기본적으로 마감에 쫓기는 작가라는 점, 그리고 비상근 재택근무가 가능한 지난 2년간의 코로나 팬데믹 기간 동안 일량을 거의 맥시멈으로 늘렸기 때문이다. 결국 소위 일에 치이면서 물리적 부담이 생겨 신체적 정신적 파열음이 나기 시작하는 거다.
오래동안 해왔던 영화진흥위원회나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의 보고서 작업은 평소 자료들을 모아 틈틈이 번역해 나중에 마감이 임박했을 때 부담을 크게 줄일 수 있었다. 설령 마감 전 하루이틀 밤을 세더라도 정신적 부담이 적어 타격이라 할 만한 후유증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한국언론재단에 두 달에 한번 보내는 인니언론현황에 대한 원고도 매일 현지 기사들을 스크린해 번역작업을 하고 있으니 주제를 정하는 작업이 좀 시간 걸리지만 일단 결정하고 나면 그 다음 A4 6-7장을 쓰는 것은 반나절 정도 작업량이다. 어렵지 않다. 데일리인도네시아에 격주로 보내는 <무속과 괴담 사이> 원고들도 두 달치 정도의 원고초안이 미리 준비된 상태다.
문제는 갑자기 닥치는 일들인데 거건 용역과 부탁이다.
용역은 대개 현지 노동복지시스템, 코로나 방역 연대기, 시장조사나 설문조사 같은 것들로 조사해야 할 대상이 방대하고 심도깊지만 어차피 돈받고 하는 일이니 자본주의 매커니즘이 가동되면서 일은 반드시 진행되고 성과를 내기 마련이다. 예외는 없다. 돈되는 일은 원래 힘겨운 법이다.
그러니 정말 슬럼프를 가져오거나 정신적 육체적 반발을 억누르기 힘든 마감은 당연히 '부탁'에 의해 일을 해야 하는 경우다. 대개는 정확히 뭘 어디까지 어떻게 해달라는 것인지도 분명치 않고 그 일을 마치고 나면 어떤 보상이 있는지 또는 순전히 손해로만 남을지 알 수 없는 경우 의욕이 책임감 밑으로 떨어지면 당위성이 감소하니 하기 싫어지는 게 당연하다. 그런데 그게 거절하기 어려운 사람의 부탁일 경우엔 강박이 커지며 육체적 정신적으로 금이 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돈도 안되면서 힘겨우니 말이다. 말하자면 보수가 없는 용역인 셈이다.
3월 15일 요청받은 한 교민 어르신의 회고록 발췌본 같은 것을 다시 쓰는 작업을 지난 4월 5일 마쳤다. 20일 걸렸다.
사실 제대로 된 전기나 평전 또는 회고록 대필이라면 좀 더 광범위하고도 장기간의 인터뷰를 하면서 자료를 모았어야 하지만 내가 부탁받은 일의 성격은 명목상 일차 매체에 제출했다가 반려된 원고를 '수정' 또는 '정리' 하는 일이었다. 내가 기획하고 시간계획을 잡아 필요한 인터뷰를 진행하고 자료를 보완하는 것과는 차원이 훨씬 낮지만 그렇다고 일이 쉬운 것도 아니다. 전기, 또는 평전에 등장하는 인물의 인터뷰나 자료가 없으면 절대 쓸 수 없는 원고이기 때문이다.
매체가 당사자에게서 직접 받은 원고로 곧바로 편집에 들어가지 않고 오히려 반려한 것은 편집이 가능하지 않은 상태였다는 반증이다. 전면적인 재집필이 불가피한 상황. 그 상황에서 난 부른 것은 그걸 다시 쓸 ‘작가’가 필요했기 때문이고, 기왕이면 돈을 덜 들이고 싶다는 뜻이기도 하다. 왜 나를 쓰면 돈을 들이지 않아도 생각하는 걸까?
그 재집필 작업이 정확한 반대급부가 정해지지 않은 상태로 내 앞에 놓이게 되었다는 건 내가 또 호구잡혔다는 뜻이다.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20일의 마지막 일주일은 밤잠을 설치고 실제로 마지막 이틀 밤을 완전히 세운 끝에 완성된 원고를 넘겨주자 어르신의 한 마디는 이랬다. "나중에 또 연락하자고." 시작할 때 보수를 정하지 않으면 그 과업의 끝은 전적인 손해로 마무리되기 십상이다.
그렇게 일을 마치고 긴 잠을 잔 후 깨어난 4월 5일 수요일.
어쨌든 그 일에서 해방되었다는 사실에 더없이 마음이 편해지는 아침이었다.
2022. 4.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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