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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뚜르 호수의 거인 꺼보 이와(Kebo Iwa)

beautician 2022. 3. 30. 12:11

거인들이 멸종한 이유: 바뚜르 호수(Danau Batur)의 전설

 

발리 낀따마니의 바뚜르 호수

 

 

옛날옛적 발리에 한 부부가 살았습니다. 두 사람은 함께 산 지 오래 되었지만 아이를 얻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희망을 놓지 않고 늘 기도하며 언젠가 아이를 갖게 해 달라고 기원했습니다. 그들의 기도를 들은 신 상향 위디와사(Sang Hyang Widi Wasa)가 마침내 그들이 원하는 바를 허락했고 부부는 남자아이를 낳았습니다.

 

아기는 폭풍성장을 했습니다. 그는 남다른 식욕을 가지고 있어 이상하게도 아직 아기인데 성인 열 명이 먹는 양을 혼자 먹어 치웠습니다. 아이가 소년이 되자 몸집도 식욕도 더욱 커졌습니다. 몸집도 크고 많이 먹는다고 해서 부모는 이름도 꺼보 이와(Kebo Iwa)[1]라고 지어 주었습니다. 대장 물소라는 뜻이었죠.

 

꺼보 이와의 몸집은 더욱 커졌고 몸이 커지니 식욕 역시 더 커졌습니다. 이젠 하루에 성인 백 명이 먹을 음식을 동내 버렸으므로 부모는 아이 먹을 것을 대느라 등골이 빠질 지경이 되었습니다.

 

더욱이 꺼보 이와는 화를 잘 냈습니다. 음식이 늦어도, 먹을 게 충분하지 않아도 꺼보 이와는 불같이 화를 내며 주변에 있는 것들을 모두 부수곤 했습니다. 처음엔 세간살이를 부수다가 나중에 몸집이 커지자 마을의 이웃집들을 부수고 심지어 마을 사람들이 예배를 보는 건물도 겁없이 부수어 버리곤 했습니다. 부모가 돌아가신 후 꺼보 이와는 이제 누구도 통제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에겐 성난 꺼보 이와를 마주하는 것만큼 무서운 일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기분이 좋을 때엔 마을 사람들을 도와 우물을 파거나 집을 옮기거나 언덕을 개간해 논으로 만들거나, 강에 둑을 쌓거나 큰 돌과 바위들을 옮기는 일을 거들곤 했습니다. 수십 명이 달라붙어야 할 수 있는 일들은 혼자서 척척 해냈으니 큰 도움이 된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일해준 대가로 많은 음식을 주어 꺼보 이와가 배불리 먹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그건 작황이 좋을 때의 이야기였습니다.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농부였으므로 수확이 충분히 많으면 꺼보 이와의 힘을 빌려 일을 하더라도 충분한 음식을 나누어 줄 수 없었으니까요. 음식을 제 때 공급해 주지 않으면 꺼보 이와는 온갖 행패를 부렸습니다. 그러다가 기근이 들어 더 이상 꺼보 이와가 먹을 음식을 대줄 수 없게 된 꺼보 이와의 행패는 더욱 심해졌습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이제 기근 속에서 자기 가족들을 어떻게 먹여살릴까 궁리해야 할 판에 꺼보 이와의 행패를 막기 위해 그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것이 더욱 급한 일이 되었습니다. 꺼보 이와는 마을 사람들이 겪고 있는 기근의 어려움에 동참할 그런 나긋나긋한 성격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충분히 먹으면 얌전해지지만 배가 고프면 온갖 패악질을 저질렀습니다. 그에게 세상 살이는 아주 단순한 일이었습니다.

 

결국 마을 사람들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그들은 모여서 어떻게 꺼보 이와를 없앨 수 있을지 논의했고 그렇게 짜낸 계획을 실행하기로 했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마을 사람들이 동원되어 음식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조금씩 모인 음식들은 마침내 꺼보 이와가 배불리 먹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또 한 무리의 마을 사람들은 석회암을 모아 음식과 함께 준비해 두었습니다. 그렇게 음식과 석회암이 모두 준비되자 이장은 사람들과 함께 꺼보 이와를 만나러 갔습니다.

 

꺼보 이와는 마침 마을 사람들이 기르던 가축들을 몇 마리 잡아먹고 배를 두드리며 빈둥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다가오는 것을 보더니 벌떡 일어나 앉았습니다. 사람들이 다가오는 것은 보통 음식이 준비되었다는 뜻이었으니까요.

“무슨 일이오? 내가 배불리 먹을 음식을 준비해 두었소? 난 아직 배가 고프다고!”

“그렇소. 당신이 배불리 먹을 음식을 준비했소. 당신이 우릴 도와준다면 준비한 음식을 모두 드리겠소!” 이장이 떨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음식을 충분히 준비했다는 말에 꺼보 이와는 냉큼 일어났습니다.

“음식을 준다는데 일을 돕지 못할 이유가 없지. 뭘 도와드리면 되겠소?”

이장은 그간 꺼보 이와가 난동을 부릴 때마다 부서지고 무너진 마을 사람들 집이 한 두 채가 아니라고 설명했습니다.

“그건 당신들이 음식을 제대로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이지. 그게 어떻게 내 잘못이오? 집이 부서진 건 당신들 잘못이오!” 꺼보 이와는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이장은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꺼보 이와, 당신도 아는 바와 같이 이 모든 건 올해 수확이 좋지 않기 때문이오. 수확에 실패한 건 물이 부족하기 때문이었고. 건기가 오래 지속되면서 물이 다 말라버린 거요. 하지만 사실 땅을 좀 파면 지하수가 얼마든지 나온다오. 얼마든지 농사를 지을 만한 양이오. 그래서 당신에게 도움을 청하는 거요. 우리가 농사에 댈 물을 끌어 쓸 수 있도록 큰 우물을 파주시오. 물이 충분하다면 농사가 잘 될 것이고 이번 기근을 충분히 극복할 수 있을 것이오. 그렇게 되면 당신이 먹을 음식도 충분히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이오.”

꺼보 이와는 이장의 말을 듣고 기뻐했습니다.

“좋소. 좋은 계획이오. 내 당장 당신들을 돕겠소.”

 

꺼보 이와는 곧바로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그는 이장의 요청에 따라 부서진 집들을 대신해 마을에 집을 몇 채 만들어 주고 이장이 가리키는 곳을 파 큰 구멍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꺼보 이와는 가공할 힘에 눈이 휘둥그레 해졌습니다. 꺼보 이와가 계속 구멍을 파고 들어가는 동안 마을 사람들은 준비해 놓은 석회암들을 꺼보 이와가 만든 구멍 가까이로 옮겨와 쌓았습니다.

 

그 모습을 본 꺼보 이와는 문득 의구심이 생겨 물었습니다.

“무얼 하려고 그렇게 많은 석회암들을 모아 온 거요?”

“우물을 다 파고 나면 당신이 살 쾌적하고 큰 집을 지어주려고 하는 거요.”

이장이 대답하자 꺼보 이와는 금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아 그렇군. 내가 살 큰 집을 지으려면 석회암이 어마어마하게 필요하겠지!”

 

꺼보 이와는 이장의 말에 기뻐하며 더욱 열심히 우물을 팠습니다. 하지만 이미 엄청난 크기와 깊이로 구멍이 파여지고서도 아직 지하수를 만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드디어 지하수가 터지면서 거대한 우물에 물이 차오르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이장은 꺼보 이와에서 좀 더 넓고 깊게 우물을 파달라며 계속 작업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우물이 크면 클수록 더 많은 논에 물을 댈 수 있게 되니까요. 꺼보 이와도 곧 많은 음식을 얻어먹게 될 것이란 생각과 큰 집을 얻게 될 것이란 기대에 더욱 열심히 땅을 팠습니다. 그래서 우물을 더욱 깊고 넓어졌고 지하수도 점점 더 높이 차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꺼보 이와도 끊임없이 일한 탓에 마침내 엄청난 피로와 공복이 몰려와습니다. 그는 좀 쉬겠다고 하면서 먹을 것을 찾았습니다.

“먹을 걸 달란 말이야!”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그는 화를 내며 음식을 달라고 꽥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은 미리 준비해 둔 음식을 꺼보 이와 앞에 날라와 산더미처럼 쌓았습니다. 그제서야 꺼보 이와는 마음이 푸근해져 허겁지겁 음식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그 엄청난 음식이 거의 동나기 시작하자 다행히 꺼보 이와도 포만감을 느끼며 만족했습니다. 힘겨운 일을 마치고 배가 부르자 졸음이 밀려왔습니다. 그는 꾸벅꾸벅 졸다가 자신이 판 우물 비탈에 몸을 눕혔는데 완전히 잠에 골아 떨어지면서 몇 바퀴 굴러 물이 차오르는 우물 수면에 몸을 걸치게 되었습니다. 우물은 계속 차올라 꺼보 이와의 몸을 덮기 시작했지만 그는 여전히 요란하게 코를 골았습니다. 그는 한번 잠이 들면 웬만해서는 중간에 일어나는 법이 없었습니다. 물은 엄청난 속도로 불면서 어느새 꺼보 이와의 몸이 완전히 잠겼습니다.

 

지금입니다!”

이장은 그 순간을 기다렸다가 마을 사람들을 시켜 준비해둔 석회암을 물 속으로 던지도록 했습니다. 엄청난 양의 석회암이 꺼보 이와 주변에 떨어지면 물과 섞여 풀어지며 꺼보 이와의 콧구멍과 귓구멍, 약간 벌린 입에 들어갔습니다. 이제 마을 사람들은 완전히 잠긴 꺼보 이와의 몸 위로 석회암을 바위 째로 굴로 떨어뜨렸습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꺼보 이와를 수장시키려 했던 것입니다.

 

바뚜르 호수 전설 아트 모음

 

꺼보 이와가 숨쉬기 어려워 눈을 떴을 때 그는 물 속에서 엄청난 양의 석회암에 짓눌려 있었고 녹은 석회가 코와 입을 막고 있었습니다. 그는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이미 때는 늦고 말았습니다. 그 와중에도 마을 사람들은 아직도 석회암 바위를 꺼보 이와의 몸 위로 굴러 떨어뜨리고 있었습니다. 결국 빠져나오지 못한 꺼보 이와는 자신이 판 우물 속에서 익사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상향 위디와사(Sang Hyang Widi Wasa)가 허락했던 아이 꺼보 이와를 죽인 것은 재앙을 부르는 일이었습니다. 그가 판 우물 아구까지 차오른 지하수는 넘쳐흐르기 시작해 꺼보 이와가 원래 살던 곳은 물론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살던 마을과 일근 마을까지 모두 잠기고 말았습니다. 그 일대가 거대한 호수가 되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꺼보 이와가 우물을 파면서 파낸 흙더미들은 바뚜르 산(Gunung Batur)이 되었고 산 속 거대한 호수에는 바뚜르 호수(Danau Batur)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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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 속 꺼보 이와와 마을 사람들의 갈등은 어쩌면 오래 전 지상에 살았던 거인들과 현생 인류와의 갈등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과거 신장 4미터 이상의 거인들이 살았다는 것은 고고학적으로 증명이 되고 있고 거인들에 대한 전설들이 세계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바뚜르 호수의 전설도 그런 거인 전설 중 하나로 치부할 수 있습니다.

 

서로 다른 종이 서로를 공격하는 경우, 아니 그보다 인류가 다른 종을 공격하고 멸종시키는 것은 대개 다음 세 가지 경우입니다.

 

1. 그 다른 종이 인류를 공격하고 위협할 경우: 예를 들어 인류가 전세계 맹수들 대부분을 멸종시킨 것. 아마 공룡이 남아 있었다 해도 인류가 위협을 느끼는 한 살려두지 않았을 것.

 

2. 그 다른 종과 인류가 같은 먹이를 놓고 쟁탈전을 벌이는 경우: 예를 들어 네안데르탈인 집단을 크로마뇽인들이 멸절시킨 것. 만약 소나 말이 풀을 뜯지 않고 사람이 먹는 것과 같은 음식을 먹었다면 일찌감치 멸종되었을 것이다. 비슷한 식성을 가진 돼지는 철저히 사육되어 식용으로 전락했고 개나 고양이들은 인간과 교감하면서 멸절의 위기를 넘겼다.

 

3. 그 다른 종을 섭취하는 게 인류 건강에 좋다고 소문나거나 그 가죽의 소장가치가 높을 경우: 개구리나 도룡뇽이 몸에 좋다고 소문나니 한국땅에서 개구리 도룡뇽들이 씨가 말랐던 것처럼, 호랑이, 사자 가죽으로 만든 양탄자와 상아로 만든 공예품들이 고가에 팔렸던 것처럼. 건강 측면에서는 물개 해구신이 대표적.

 

 

세상에 존재했던 거인들이 인간을 잡아먹었다는 전설들도 있지만 그것이 사실은 같은 음식을 인간보다 훨씬 많이 소비하는 거인들을 멸절시키기 위해 인간들이 만들어낸 도시괴담 같은 것이었겠죠. 거인들은 꺼보 이와처럼 인간보다 몸집이 큰 만큼 훨씬 더 많은 음식을 먹었을 것이므로 그들의 힘을 이용하는 것은 인류에게 도움이 되었겠지만 그들과 한정된 음식을 나누어 먹는 것은 아까운 것을 넘어 위협이 되었을 것인다.

 

이 민화를 보면서 뜬금없이 멸종해 버린 거인들 명복을 빌게 됩니다. (끝)

 

거인 유골 발굴 현장

 

참조:

https://dongengceritarakyat.com/cerita-anak-rakyat-bali-legenda-asal-mula-danau-batur/



[1] 14세기 발리의 쁘라부 스리 아스타 수라 랏나 부미 반텐 왕을 섬기던 대장군의 이름 역시 꺼보 이와였지만 이 전설과 상관없다. 꺼보 이와 대장군은 팽창주의 정책으로 발리 정벌을 꿈꾸던 마자빠힛 왕국 가자마다 재상의 눈엣가시여서 혼맥을 맺어 회유하려다가 결국 마자빠힛을 방문한 꺼보 이와를 살해하고 발리 정복에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