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서와 소설 사이, 그 어디쯤

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인니출장 본부장님

인니 출장가신 본부장님 (5)

beautician 2014. 6. 9. 01:00


 

기다리던 S뷰티대표의 사과메일 대신 며칠 후 한본부장의 또 다른 메일이 도착했습니다. 일견 앞서 5 31일자 메일의 논조를 대체로 유지하는 듯 했지만 어딘가 분위기가 사뭇 달랐습니다.

 

--------- 원본 메일 ---------

보낸사람: 한본부장 <*******@gmail.com>
받는사람 : beautician
날짜: 2013 6 03일 월요일, 11 47 17 +0900
제목: Re: 인도네시아 관련

 

(전략)

일이 이렇게 진행되어 전권을 맡았던 책임자로서 상당히 우울하고 어처구니도 없어 인도네시아에 계신 여러분께는 죄송할 따름입니다. , 대표님의 친구분의 투자개입은 제 관할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대표님의 친구분들이 실제로 투자를 하려 했던 의지는 사실입니다. 인도네시아에서 투자 받아 그 돈으로만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단지 에르나씨가 최종적으로 롯데에 대한 투자는 안한다는 말을 듣고 본인들도 투자를 중지했던 것인데 이 부분에서 오해가 생겼던 것 같습니다. 굳이 살롱이 하지 않더라도 인도네시아에서의 유통같은 다른 사업을 하고 싶어 전혀 상관없다고 느껴졌을 질문을 에르나씨에게 했던 것입니다. 물론 거기서 S뷰티는 완전히 빠져있는 상황이었어요. 그런데 적반하장 격으로 이 분들이 한국에 돌아와 대표님께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모르지만 대표님 역시 저를 오해하고 계시고....

  

완전 멘붕 상태라고 할까요? 정말 짜증나는 상황입니다.

실무자로서 인도네시아에서 맨땅에 헤딩하며 만난 좋은 분들을 기반으로 최선의 진행을 기획했던 것인데 왜 이 모든 것이 저의 잘못이 되고 심지어는 왜 회사 일을 뒤로 하고 개인적 실속을 차리려 했다는 오해를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또한 대표님 친구분들이 어떤 식으로 이야기 하였는지 몰라도 대표님도 저를 살짝 의심하는 것이 너무나 당황스럽고 화가 납니다.

 

왜냐하면 저는 22일 미팅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고 저는 그때 그들이 직접 만나진 않고 전화상으로 계약서 관련된 것만 미팅하였다고 들었습니다. 더욱이 그 중 한 분은 서울에 급한 미팅이 있다며 21일 아침 일찍 체크아웃하고 공항 간다며 나가셨던 분이고...

 

(중략) 저는 실무자로 할 일을 다한 후 토사구팽 당해 물먹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어서 회사나 대표님은 물론 그 동안 자기들이 거짓말을 하고서 이제 와서 모든 게 저 때문이라는 그 친구분들 조차도 보고 싶지 않은 심정 입니다.

 

이번 일에 대하여 에디사장에게는 본사에서 공문을 보낼 계획입니다.

저는 이번 일만 마무리하고 S뷰티를 퇴사 하려 합니다. 남들은 S뷰티 정도 브랜드의 안정적인 직장에서 본부장으로 일하면서 왜 그만 두느냐고 하겠지만, 저의 생각은 그렇지 않습니다. 더 이상 신뢰도 없고 언제가 뒤에서 또 저를 물먹일 것이라 생각을 하게 되니...

 

(중략) 퇴사 후 시간이 된다면 자카르타에서 사장님과 에디 사장님을 개인적으로 만나 제품유통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중략) 요 며칠 정말 심한 우울증 비슷한 것에 시달렸어요, 지난 6개월 동안의 모든 노력이 다 물거품이 되는 것 같아서... (후략

 

종합상사에서 신입사원들에게 업무용 메일이나 공문을 간결하고 드라이하게 쓰라고 가르치는 이유는 문장이 길어지고 내용이 복잡해질 수록 대개의 경우 초점이 흐려질 뿐 아니라 드러나지 않는 편이 나을 정보나 의도를 자칫 본의 아니게 읽히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죠. 한본부장은 분명 그런 교육을 받아 본 적이 없어 보였습니다.

 

이 메일에서도 한본부장은 여전히 자신이 피해자이고, 투사이자 순교자라는 것을 전제하고 있었어요. 하지만 그 내용은 앞서의 이메일과 미묘한 차이를 보였습니다.

 

1. 준 일당도 딱히 그리 나쁜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결국 인도네시아에서 벌어진 사건에선 그 누구도 나쁜 짓을 하지 않은 셈.

2. 그런데 자신은 준 일당으로부터 오히려 모함을 받아 S뷰티 사장도 의심하는 눈치.

3. 그래서 곧 S뷰티를 그만 둘 텐데 그 이후라도 제품유통 얘기는 나랑 계속 하자.

 

전혀 맥락도 없이 불쑥 튀어나오는 적반하장격으로…’ 라는 연결사나 자신을 전권을 맡았던 책임자라고 표현했다가 바로 그 뒤에선 투자부분에 대해 관할권도 없는 실무자라고 표현하는 등 한본부장은 여전히 갈팡질팡했고 이 메일을 어떤 방향으로 써야 할 것인가 고심하며 수없이 지우고 고쳐 쓴 흔적도 여기저기 엿보였습니다. 이미 써놓은 내용을 이리저리 첨삭하여 수정하다 보면 맥락에 맞지 않는 부분이 의도치 않게 남게 되곤 하는데 문제는 정작 글을 쓴 사람에게는 그런 오류들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22일 미팅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고 저는 그때 그들이 직접 만나진 않고 전화상으로 계약서 관련된 것만 미팅하였다고 들었습니다. 더욱이

 

이런 부분이 특히 그렇죠. 벤 일당이 에르나씨를 두 번째로 만났던 수요일 미팅에 대해 앞에선 자신이 전혀 몰랐다면서도 바로 이어 그런 비슷한 얘기를 들었다고 말하는 것 자체부터 다분히 이율배반적입니다. 여기서 한본부장은 자신이 철저히 기만 당했다는 얘기를 하려는 것이었는데 벤 일당이 에르나씨와 만나 계약서 얘기만 했다고 쓸까? 아니면 전화로만 얘기했다고 쓸까? 생각하다가 이리저리 수정한 끝에 전화상으로 미팅했다(?)는 이상한 표현을 써버리고서 이 말이 이상하다는 걸 스스로는 깨닫지 못하는 거죠.

 

에르나씨가 최종적으로 롯데에 대한 투자는 안한다는 말을 듣고 본인들도 투자를 안하기로 했던 것인데

 

이 부분에서도 한본부장은 초점을 흐리고 있었습니다. 기본적으로 이 문장이 있는 문단은 한본부장이 5 22일 수요일 자신을 빼고 에르나씨를 따로 만나 30만불 투자를 종용하던 벤 일당이 사실 사기 치려 했던 건 아니었다고 변호하는 부분입니다. 그런 미팅이 있었는지도 몰랐고 전화로 계약얘기만 했다고 들은 그 미팅에 대해서 말이죠. 게다가 당시 에르나씨가 계약서 서명을 거절한 이유는 이미 에르나씨도, 나도, 앞전의 이메일을 통해 몇 차례 지적했던 바와 같이 롯데도 S뷰티도 아닌, 벤 일당이 급조한 제3의 회사를 투자계약상대방으로 들이 밀었던 것이 컸는데 한본부장은 마치 에르나씨가 미용실의 롯데입점 자체가 갖는 수익성 문제 때문에 투자를 포기한 것으로 기정사실화 하려는 시도가 엿보였습니다.

 

그는 메일의 전반부에서 그렇게 준 일당을 변호하면서도 뒷부분에서는 그들이 S뷰티 대표에게 한본부장 자신에 대한 모함을 속삭여 결국 자신이 의심받는 처지에 이르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결국 그의 말대로라면 자카르타에서는 아무도 비난 받을 만한 일을 하지 않은 셈이고 단지 S뷰티 사장의 신임을 두고 자신과 준 일당이 줄다리기가 벌어지고 있는 S뷰티 사내의 내부문제를 언급하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 사이 한본부장의 머리 속에서, 아니면 S뷰티 전반에서는 자카르타에서 발생한 사건에 대한 자기 합리화 과정이 이미 상당히 진행되어 버린 것인데 그렇게 변질된 이해를 바탕으로 한 한본부장이나 S뷰티가 과연 어떤 진심 어린 사과공문을 쓸 수 있을까요?

 

실패에 대한 자괴감을 던다는 측면에서 자기 합리화는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심리적 과정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이런 상황에서 자기 합리화가 갖는 문제는 결국 자신은 아무런 잘못도 저지른 것이 없는데 일은 실패했고 목적한 바를 달성하지 못했으니 그 원인을 자신 외의 다른 곳에서 찾아내야만 하고 그래서 때에 따라서는 애당초 존재하지도 않던 사악한 적을 스스로 창조해 내기도 한다는 점이죠.

 

공을 많이 들인 해외시장에 출장을 나가 경비를 물쓰듯 하며 2주 넘게 체류하고서도 사업적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스스로의 실수로 인해 판을 깨버리는 지경까지 가버렸다면 그 출장자는 본사에 돌아가 뭐라고 보고하게 될까요? 곧이곧대로 보고하고 그냥 사장한테 쪼인트 한 대 까지고 말까요? 천만에요. 그럴 일은 거의 벌어지지 않습니다. 출장자가 오너가 아닌 한 그 직위가 전무든 말단사원이든 일단은 자기 말고는 아무도 모를 출장지에서의 사건들을 축소, 첨삭하고 미화해서 전혀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 보고하는 것은 비일비재하게 벌어지는 것이 현실입니다.

 

미용업계에서도 현지진출을 하겠다며 인도네시아로 날아온 것은 S뷰티가 처음은 아닙니다. 최근 수년간 매년 10월이면 JCC에서 23일로 열리는 코스모뷰티 미용박람회에 여러 한국업체들이 참석했다가 대부분 별다른 성과 없이 돌아갑니다. 전시준비는 철저히 해왔을지는 몰라도 현지시장에 대한 사전조사는 전혀 해놓은 것이 없어 뜨내기손님들만 상대할 뿐 정작 유력한 현지바이어들을 부츠로 초청하지 못했기 때문이죠. 그런 후 그들은 본사에 어떤 출장보고를 올릴까요?

 

인도네시아를 찾는 내로라하는 한국 미용업체들도 비슷한 경우를 겪습니다. 그 동안 저명한 두발미용제품업체들이 주력제품들을 들고 인도네시아를 찾았고 그 중엔 국내 최고로 손꼽히는 헤어드라어이업체도 있었는데 그 정도 명성과 품질, 그리고 그 정도의 진출의지를 가지고 있다면 절대 뚫리지 않을 리 없는 현지시장에서 그들 업체들이 백전백패하고 돌아가는 이유는 현지시장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빠사르바루(Pasar Baru)의 하르꼬시장을 중심으로 반경 200여 미터 안에 형성되어 있는 미용도매시장의 30여개 상점들 대부분이 실제로는 자카르타 시장을 독과점하고 있는 3개 패밀리의 동생이며 처남이며 이종사촌들이 각각 나누어 가지고 있다는 사실과 그들이 서로 경쟁적 공생관계에 있다는 것을 미처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죠.

 

그래서 그들은 다른 무한경쟁시장들에서 해왔던 것과 똑 같은 방법으로 시장에 접근합니다. 부지런한 한국 출장자들은 그 30개 업체들을 모조리 만나 상담을 하고 가격을 던지지만 그 화교주인들은 그날 밤이면 삼삼오오 서로 만나거나 전화로 컨퍼런스를 하며 그날 다녀간 한국업체의 정보와 가격을 서로 나누고 분석하여 담합한 결과를 들고 다음 날 모두가 한결같이 한국업체가 숨도 제대로 못쉴 빡빡한 조건을 들이미는 것이죠. 대부분의 출장자들은 인도네시아 시장이 이상하다고 툴툴거리고 그래서 싱가폴의 기존 거래선에게 인도네시아 판권을 대충 덤으로 던져놓고 돌아가는 게 보통입니다.

 

그럼 그렇게 아무 소득도 없이 돌아간 출장자들이 인도네시아에서의 실패를 곧이곧대로 출장보고서에 써서 회사에 올릴까요? 그와는 전혀 반대의 일이 벌어지는 게 보통입니다. 그들의 출장보고서는 대략 이런 식으로 시작할 게 뻔하죠. 인도네시아는 아직 미용재료시장이 제대로 형성되어 있지 않고 그 수준이 한국보다 약 20년 정도 뒤떨어져 개별업체나 시장의 전반적 반응은 매우 미약해 우리 제품 진출은 아직 시기상조인 것으로 보이며….. 물론 모든 관련업체들이 다 그렇다고 매도하려는 건 아닙니다. 단지 인지상정이란 얘기입니다.

 

2월 첫 출장 이후 줄곧 사장의 동행 없이 3월과 5월 각각 2주 이상씩 자카르타 출장을 왔던 한본부장은 나와 에디사장은 물론 뿌스피타 마르타와 살롱프로 등에게까지 줄곧 빈축을 살 행동을 하다가 급기야 S뷰티와는 관계도 없는 벤 일당을 끌고 와 에르나씨에게 사기를 시도하는 물의를 빚은 끝에 S뷰티라는 회사의 명예를 인도네시아에서 더 이상 떨어질 곳이 없을 곳까지 실추시켜 버리고 말았습니다. 상황을 그렇게 만들어 놓은 한본부장이 서울로 돌아가 S뷰티의 사장에게는 뭐라고 보고했을까요?

 

정말로 그가 퇴직을 불사하고 준 일당과 맞서 싸웠을까요? 준 일당은 정말로 S뷰티 대표에게 그를 모함했을까요? 그건 나로서는 당장 검증할 수 없는 한본부장 스스로의 주장일 뿐이었어요. 난 오히려 그가 S뷰티 본사에서는 완전히 다른 얘기를 했으리라 믿습니다. 큰 사고를 친 만큼 그 사고를 덮기 위해 그는 큰 거짓말을 했을 것이고 자신이 준 일당과 함께 회사의 이름에 먹칠을 해버린 원래의 스토리는 자신이 S뷰티의 인도네시아 진출이 좌절시킨 나쁜 놈들과 맞서 싸우며 회사의 명예와 이익을 희생적으로 지켜낸 영웅적 자서전이 되어 있을 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살짝 의심받고 있다고 애기했습니다. 투자부분은 자기 책임이 아니었다고 스스로도 얘기했거니와 누가 보아도 이 투자할 돈을 마련하지 못해 자카르타 롯데쇼핑의 프랜차이즈 입점이 무산된 상태에서 그는 무엇 때문에 어떤 부분에서 살짝 의심받고있다고 언급했을까요? 그것은 분명 그가 본사에 보고했던 자카르타 출장의 커버스토리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만약 모든 것이 까발려졌을 때 한본부장은 자카르타에서의 사건을 누구도 악의적으로 그리 한 것이 아니므로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고 반박하며 나설 것임은 이 메일에서 이미 분명해진 일입니다. 그런데 그때 함께 까발려져 그를 곤란하게 할만한 부분은 그가 상기 메일에서도 초지일관 바라보고 있는 제품유통을 통해 주머니를 따로 차려 했던 부분이었죠. 그 부분이 한본부장에겐 더욱 치명적일 수 있었을 것입니다. 난 그가 살짝 의심받고 있다고 한 것이 그 제품유통 부분 때문이라 추측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S뷰티 본사 사장에게 실제로는 뭐라고 복선을 깔아 두었을 지 당시 알 길이 없었어요.

 

며칠이 지난 6 8일 한본부장이 그 사과공문을 발송했다는 얘기를 꺼내면서 우리 사이엔 카톡으로 이런 멘션들이 오갔습니다,

 

사장님, 좋은 주말입니다. 어제 에디 사장에게 공문 발송했습니다. 앞으로 모든 일이 어떻게 진행될지 모르지만 좋은 결과 있기 바라는 마음입니다.

 

저희도 바쁜 한 주를 막 마쳤습니다. 그 공문은 저에게도 CC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 공문은 누가 보낸 걸로 하셨나요? (서명이나 CC 상태), 벤이나 준, 미스터 강 등과의 관계도 잘 해명되었나요? 벤이 아마도 대표님 등의 전화번호를 이미 에디 사장에게 준 것으로 알고 있는데 내주 초 에디 사장이 메일 내용과 관련해 얘기할 수 있을 만큼 대표님 부인이 본건을 숙지하고 계신가요?

 

S뷰티 사장은 전혀 영어를 못하지만 그 부인은 유학출신이라 유창한 영어를 구사한다는 얘기가 먼저 오간 바 있었습니다.

 

일단 공문은 제가 보냈지만 회사 공문양식을 이용해 대표님 명의로 보냈습니다. 내용은 전체를 대신해 대표님께서 사과하는 형식으로 했습니다아마 대표님과 사무님이 자카르타에 가실 것 같습니다. 제가 동행할지는 모르겠고요. 사모님께서 내용을 정확히 숙지하고 계신지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사장님과 제가 S뷰티를 배제하고 따로 둘이서만 유통하려 했다는 식으로 강과 벤이 대표님께 이야기한 것 같아요. 참 어이없는 내용이지만 그 부분에 대한 오해도 이젠 어느 정도 풀린 상태입니다.

 

바로 그 대목에서 난 한본부장이 S뷰티 본사에서 출장보고서에 어떤 커버스토리를 사용하고 있었는지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그의 출장보고서에서 그는 출장기간 내내 자기에게 S뷰티와는 관계없이 딴 주머니를 차고 몰래 제품유통을 하자고 졸라대는 자카르타의 악당과 싸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악당은 바로 나였어요.

 

거기서 난 좀 더 참았어야 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의 그 멘션은 내 감정을 단단히 덮고 있던 인내에 벽에 균열이 생기면서 그 동안 참고 참았던 분노가 은연 중 세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만약 내 이름이 그런 식으로 귀사에서 거론되었다면 나 역시 적절히 해명할 기회를 요구할 수 밖에 없습니다. 사장님 성함과 직통메일 주소를 주시면 그 유통부분에 대해선 제가 직접 메일로 설명하겠습니다. 이런 경우가 벌어지곤 하는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중간에서 날 귀 대표님께 소개했던 학군후배의 입장도 있으니 내가 귀사 뒤에서 장난치려 했다는 얘기를 그냥 넘길 수 없는 일입니다. 준 일당이야 그냥 여길 떠나면 끝날 사람들이지만 난 여기서 이 직종에 끝까지 종사할 사람이니 지켜야 할 명예와 입장이 있다면 꼭 지켜야만 합니다.

 

지난 2월에 함께 자카르타 출장 갔던 저희 직원 기억하시죠? 그 친구도 이야기를 거들었고요. 사장님 메일을 대표님께서 보시고 이미 이해하셨어요. 그리고 손oo 씨던가요? 자카르타 oo에 근무하시는? 그 분 역시 오해를 풀어주신 듯 합니다. 지금 사장님께서 대표님께 연락하시면 제가 중간에서 얘기를 흘리는 것으로 보일 것 같아요. 차라리 대표님께서 자카르타 출장가시면 그때 자연스럽게 자리를 하심이 좋을 듯 합니다. 사장님의 억울함은 제가 충분히 알고 있으니 그 부분 걱정 마시고 저를 믿어 주세요.

 

한본부장은 내 입을 막으려고 발을 동동 구르는 듯 했습니다. 장차장과 내 학군후배까지 언급되고 있는 이 상황이 사실이라면 왜 그 당시 한본부장은 곧장 내게 이런 얘기를 하지 않았을까요? 나중에 알아본 바 그 후배가 당시 한국을 방문하고 있었고 S뷰티의 대표를 만났던 것도 사실임을 확인했습니다. 하지만 만약 그 후배가 정말로 그런 상황에 대한 설명을 듣고 내 입장을 변호했다면, 그래서 성공적으로 오해를 풀었다면 왜 그는 자카르타로 귀임한 후에도 내겐 그 당시 상황을 단 한마디도 전하지 않았던 걸까요?

 

그건 곤란한 얘기에요. 내 입장을 다른 사람들이 변호하게 할 순 없습니다. 게다가 손oo씨는 그런 오해를 풀어줄 만한 입장에 있지도 않고 그럴 정보를 갖고 있지도 않아요. 무슨 오해를 어떻게 풀어줬단 말이에요?

 

그것도 그렇군요. 제가 월요일날 대표님께 보고할게요. 이 얘기들 대부분은 대표님이 저만 따로 불러 하신 얘기들이어서 다른 직원들은 잘 모르는 내용이에요. 그러니 사장님이 이 모든 내용을 이야기 하시면 대표님께서 정말로 저를 의심하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사장님께 솔직히 다 말씀 드린 것은 사장님께서 진실하신 분 같고 제 선배님 같고 저에게 조언해 주신 말씀들이 너무 마음에 와닿아서였습니다아무쪼록 이해해 주세요.

 

살짝 의심받고 있다는 그가, 퇴사까지 불사하겠다던 그가, 이제는 자기가 의심받을 거라며 내 입을 막으려 발버둥칩니다.

 

본부장님 입장은 그럴 수 있겠지만 나로서는 이런 게 처음 겪는 일이 아니네요. 마무리 정리를 꼭 해야 하니 그 시가와 방법은 내주 얘기하도록 하죠.

 

일단 그런 말도 안되는 오해는 아마 벤이 사장님 말씀을 잘못 이해하고 잘못 전달한 결과인 듯 합니다. 그리고 언제가 될 지 모르지만 S뷰티가 자카르타에 진출한다면 사장님과 에디 사장은

반드시 함께 할 동반자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부분은 좀 비관적이네요.

 

제가 성급했나요? 그럼 천천히 하겠습니다.

 

에디 사장이나 내 입장에선 지난 2월 이후 나름대로 성의를 다해왔는데 결과적으로 터무니없는 혐의를 뒤집어 쓰는 꼴이 되었을 뿐이고 귀사가 저질러 놓은 사건에 대한 해결 역시 우리가 직접

나서서 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 현실이에요. 그러니 그 해명공문에서 귀사가 최소한 뭐라고 해명하고 사과할 것인지가 그토록 중요했던 거에요. 그런데 그 공문에 뭐가 어떻게 씌였는지 난 알 길조차 없어요.

 

제가 따로 보내드리겠습니다.

 

나나 에디 사장의 입장을 다시 문의하지도 않고 S뷰티에서 무조건 우리랑 같이 하겠다고 말하면 우리가 무조건 고맙습니다하면서 따라갈 것 같아요?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하면 모든 게 쉽게 풀릴 텐데 S뷰티는 아직도 한국의 전형적인 갑을문화 프레임에 갇혀 있는 것 같아요.

 

그런 게 아니라 그만큼 두 분을 믿고 있다는 얘기를 했던 건데 제 표현력이 부족했나 보군요. 그리고 갑과 을의 상황으로 생각하는 게 아니에요. 그런 생각이었다면 사과공문도 보내지 않았을 겁니다. 사장님 오해를 풀려고 말씀 드린 건데 오히려 더욱 오해를 사게 되는 것 같아 죄송합니다.

 

오해가 아니라 유통부분을 내가 한본부장이랑 따로 해먹으려 했다는 보고가 있었다고 하니 내가 직접 해명하겠다는 것뿐이에요. 출장자가 현장에서 벌어진 상황을 자기에게 유리하게 보고하려고 보고서 상에서 현지 에이전트나 거래선을 비난하고 책임을 전가하는 경우는 실제로 비일비재하게 벌어집니다.

 

제가 보기엔 그분들이 유통에 관심이 많아서 자기들이 좀 해보려고 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제 생각에는 미용의 유통은 다른 유통과는 많이 틀리고 더욱 어렵고 까다롭다는 것을 그분들이 모르고 있었던 것 같아요.

 

한본부장은 이제 횡설수설하고 있었습니다. 난 고작 이 정도의 인간과 말을 섞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나 실망스러웠어요.

 

에디 사장과 내가 귀사 해명메일에 주목하는 이유도 벤, , 강 등이 그런 장난을 쳤다면 그 준의 친구라는 귀 대표님껜 어떤 식으로 보고되어 있으며 그 결과 귀 대표님의 입장은 어떤 것인지를 확인코자 한다는 측면이 강합니다에르나씨에게 그 정도로 사기를 치려 했다면 대표님께 분명 더욱 터무니없는 얘기로 현지상황을 호도하려 했을 테니까요. 그러니 이 해명은 오해였다는 진부한 설명으로는 전혀 해결되지 않아요. 오히려 대표님 입장에서 내가 인지한 사실은 이런 건데 정말 미안했고, 내가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이 있다면 바로 잡아 달라, 그리고 내가 한 번 방문할 테니 처음부터 다시 얘기를 시작해 보자는 정도의 내용이 되기를 에디 사장이 기대하고 있었던 거에요.

 

나 역시 귀 보고 상 그런 식으로 불명예스럽게 연루되어 있다면 스스로를 보호할 방법을 모색할 마땅한 권리가 있는 것이고 만약 S뷰티가 인도네시아에 들어오지 않겠다면 모르되 아직도 진출의사가 있다고 하시니 더더욱 내 입장과 상황을 분명히 정리해 놓을 필요가 있는 겁니다. 한본부장께선 한때 자기 자리까지 걸 마음을 먹었던 분이 이제 자기 입장이 곤란하니 제발 해명하지 말아달라는 부탁은 부당하지요. 일방의 입장만을 강조하니 자연히 요즘 사회문제가 된 한국의 갑을문화를 연상한 것이고요.

 

이 사건이 진행되고 있던 당시 대한항공 기내에서 그 유명한 포스코 전무의 라면사건이 있었어요.

 

아무튼 내 입장은 이렇습니다. 이건 그간 이런 상황을 여러 번 겪으면서 그렇게 하기로 결정된 프로토콜 같은 것이니 한본부장께서도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이렇게 말한 것을 마지막으로 한본부장의 멘션은 침묵하기 시작했습니다.















 

 

애당초 나와 S뷰티의 사장이 만날 기회를 철저히 봉쇄해 왔던 그가 이제 와서 다시 사장과의 미팅을 주선할 리 없는 일이었고 그래서 난 S뷰티 사장의 명함도 받지 못했을 뿐더러 한본부장은 내가 요청한 사장의 개인 이메일 주소도 보내오지 않았습니다.

 

그대신 그가 에디사장에게 보낸 공문사본을 메일로 보내 준 것은 그로부터 이틀 후의 일이었습니다. 에디에게 보냈던 메일을 한번 클릭으로 포워딩 하면 될 것이 이틀씩이나 걸린 이유를 난 알 수 없습니다. 어쩌면 그는 내가 화가 나 있음을 비로소 감지하고서 내게 말 붙이기를 꺼려 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는 동안 나도 넋 놓고 그의 연락만을 기다리고 있을 리는 만무했죠. 나는 에디 사장에게 한본부장이 보냈다는 공문첨부메일을 내게 공유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겠다고 대답하는 에디 사장의 말투에 언뜻 냉소가 비치고 있었으므로 난 섬뜩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보내온 S뷰티의 사과공문이라는 것을 받아보고 난 입이 딱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우선은 영어가 이상했습니다. 상당부분에서 영문법을 초월하고 있는 이 서류는 영어를 제대로 배운 사람이 썼다고는 보기 어려웠습니다.  아마도 구글번역기를 돌려 만든 것으로 보이는 이 문서를 다시 한글로 번역한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긴 하지만 최대한의 인내력과 상상력을 동원해서 풀어보자면 대충 이런 얘기들이었습니다.

 

1. 일반적인 안부.

 

2. 자카르타에서 벌어진 사건에 대해 S뷰티의 CEO로서 S뷰티를 대신해 사과한다.

우린 자카르타에서 내 지인들 및 에르나씨에게 의견을 구한 결과 롯데쇼핑몰에 입점치 않기로 결정했다. 내 지인들과 우리 이사(본부장) 사이의 교신상 오해로 인해 실패가 발생하고 에디씨와 에르나씨에게 부담을 주게 되어 그 불쾌함에 대해서도 사과한다.

 

3. 그런데 우리 본부장이 들고 갔던 파마약들은 우리 미용실 체인에서 사용하려 하는 약재들이 맞다는 것을 이 기회를 빌어 재확인한다.

 

4. 이렇게 글로만 설명할게 아니라 근일 중 자카르타 출장기회가 생기면 에디 사장과 직접 만나 얘기했으면 좋겠다.

 

아무쪼록 최근 발생한 사건들이 우리 양사 사이의 신뢰관계를 깨뜨리지 않았기를 바란다.

 

S뷰티 CEO 어사장.

 

영문법을 떠나 에르나씨에게 의견을 귀했다고 뭉뚱그린 부분이나 자카르타에서의 사고를 교신상의 오해때문이라고 언급하는 부분을 차치하고라도 3번 항만 아니었더라면 어사장의 서명이나 직인도 찍히지 않은 이 문서를 어쨌든 정식공문이라고 받아들여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고개는 자동적으로 가로저어졌어요. 에디사장이 코웃음을 치는 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이건 한본부장이 S뷰티 사장을 사칭해 제멋대로 만든 위조문서라는 게 너무 뻔하잖아요?”

 

난 에디 사장의 지적을 반박할 수 없었습니다.



2014. 6.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