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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속과 괴담 사이 (12)] 자바의 굴러다니는 머리통 귀신

beautician 2021. 5. 29. 12:21

 

12. 자바의 굴러다니는 머리통 귀신

 

 

 

한국 웹툰 <0.0MHz>에 등장하는 머리통 귀신, 주릭 굴루뚝 승이르도 대략 이런 모습.  

 

목 밑으로 내장들을 매달고 밤하늘을 날아다니며 산모와 태아를 노리는 머리통 귀신들은 지역에 따라 빨라식, 꾸양, 뽀뽀, 레약 등 각각 다른 이름으로 불리지만 특이한 외관에 긴 혀를 채찍이나 빨판처럼 사용한다는 인상착의가 일관되고 낮에는 인간사회에서 평범한 사람처럼 섞여 지내다가 해가 지고 나면 머리통이 몸에서 분리되어 날아오른다는 행동방식까지 동일해 모두 같은 종류일 것이라 여겨집니다. 전편에서 기술한 것처럼 이들은 비단 수마트라, 깔리만탄, 술라웨시, 발리 등 인도네시아 도서들뿐 아니라 캄보디아, 베트남, 말레이시아, 태국 등에도 각각 압, 말라이, 뻐낭갈, 크라슈 등의 이름으로 불리며 깃들어 있습니다.

 

필리핀의 마나낭갈은 목이 아니라 허리 부분이 끊어지면서 상체만 날아오르고 애당초 인간과 달리 박쥐와 흡사한 날개가 달려 있어 같은 사실상 빨라식 류와는 전혀 다른 종이라 봐야 합니다. 그래서 만약 이들 머리통 귀신들의 분포를 문화적으로 해석하자면 필리핀과 동남아 다른 지역 간의 교류가 인적교류가 상대적으로 적었거나 같은 원류를 가졌더라도 어떤 시점에서 해당 문화의 발전방향에 중대한 분기점이 발생한 적이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인도네시아는 물론 동남아에 태아와 산모를 노리는 것으로 알려진 귀신들이 적지 않고 그 괴담의 연조가 매우 깊은 것은 고대로부터 임신 또는 출산 중 태아나 산모가 사망하는 사고가 그만큼 많았음을 반증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비극적인 상황을 비위생적인 출산환경이나 산모의 열악한 건강상태, 산파의 미숙한 지식이나 경험 등을 탓하기보다 귀신과 마물의 악의에 피해를 입었다고 치부하는 것이 개인의 죄책감을 줄이고 산모 안전을 위한 지역사회의 경각심을 고취하는 순기능을 발휘했을 것입니다.

 

사실 산모와 태아, 갓난아기를 노리는 가장 대표적인 귀신은 누가 뭐래도 꾼띨아낙입니다. 그래서 귀신 이름 자체에도 아기를 뜻하는 ‘아낙(anak)’이라는 단어가 포함되어 있는 거죠. 옛날엔 임신이나 출산 중 불상사가 어디서나 있었으므로 꾼띨아낙은 인도네시아 전역, 아니 사실상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면 예외없이 관련 괴담과 무속이 전승되어 내려옵니다. 아기를 낳다가 죽은 여인의 원혼인 꾼띨아낙이 생전 자신의 아기를 가져보지 못한 원한을 풀기 위해 갓난아기나 태아를 뺏아간다는 것이 기본 플롯입니다.

 

MD 엔터테인먼트의 꾼띨아낙 영화 <아시(Asih)>. 아기를 탐하는 꾼띨아낙의 전형  

 

인도네시아 전역에서 ‘꾼띨아낙’이란 명칭이 압도적으로 사용되는 것은 자바인들이 사실상 인도네시아의 정치, 경제를 오랫동안 지배하면서 자바의 무속문화가 전국적으로 우세하게 전파된 탓이 크지만 말레이시아에서 같은 귀신을 ‘뽄띠아낙(Pontianak)’, 마두라 북방 바웨안 섬에서는 ‘마띠아낙(Matianak)’, 발리의 ‘그레겍뚱겍(Gregek Tunggek)’, 뻐말랑(Pemalang) 지역의 ‘꾼띠위위(Kunti Wiwi)’라 부르는 것처럼 지방마다 각각 부르는 이름이 따로 있습니다. 그 대표 격인 ‘꾼띨아낙’은 이들 모두를 통칭하는 이름이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날아다니는 머리통 귀신들은 빨라식이나 꾸양으로 통칭하지 않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자바섬에 압도적 인지도를 가질 법한 같은 부류의 귀신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바라고 해서 옛날 열악한 출산환경이 딱히 더 나을 것도 없었을 텐데 왜 빨라식 류의 자생적 괴담이 전해 내려오지 않을까요?

 

귀신들이 물(바다)을 건널 수 없다는 것은 한국뿐 아니라 인도네시아에서도 정설로 받아들여집니다. 그래서 만약 누군가에게 산뗏저주 공격을 받아 귀신이 들러붙으면 최선의 방어방법은 비행기나 배를 타고 다른 섬으로 이동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귀신이나 주술의 효과가 대개 바다를 건너지 못해 떨어진다는 겁니다. 빨라식도 단순히 바다를 건너오지 못한 걸까요? 그렇다면 다른 섬, 다른 나라에는 어떻게 전파된 것일까요? 사실은 자바섬에도 빨라식들이 있었지만 어떤 계기로 박멸되거나 섬 밖으로 밀려난 것은 아닐까요?

 

이 부분을 문화역사나 주술무속을 기반해 연구해 보면 납득할 만한 이유를 유추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자바섬에 머리통 귀신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자바의 머리통 귀신들은 내장을 주렁주렁 매달고 몸에서 분리되는 부류도 아니고 날아다니지도 못합니다.

 

 

주릭 굴루뚝 승이르(Jurig Gulutuk Sengir)  

 

순다(Sunda) 지역에 출몰하는 ‘주릭 글루뚝 승이르’(jurik gulutuk sengir)는 머리통만 돌아다니는 놈입니다. 주릭은 귀신, 굴루뚝(gulutuk)은 ‘굴러다니다’, 승이르(sengir)는 ‘비웃음’이란 의미이므로 말하자면 ‘굴러다니며 비웃는 귀신’ 정도의 의미입니다. 순다 전역에 관련 괴담들이 있지만 수머당(Sumedang)과 마잘렝카 (Majalengka) 지역에서 특히 유명합니다.

 

과거 식민지 시대에 네덜란드 총독부에 잡힌 독립운동가들이 심문받다가 목이 잘리는 일이 빈번했는데 주로 정글 속에서 이루어진 참수형의 결과 잘린 머리통이 제대로 수습되지 않고 숲 속에 버려지곤 했습니다. 굴루뚝 승이르는 그 한 맺힌 잘린 머리에서 발생한 귀신이라고 합니다. 주로 출몰하는 곳은 깊은 열대우림 깊숙한 곳보다는 정글 초입의 음산한 대나무숲 근처인 경우가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부지불식 간에 산모 등 뒤에 나타나는 꾼띨아낙이나 묘지 근처에서 묘비 뒤나 나무 위에서 부유하는 뽀쫑과 달리 주릭 굴루뚝 승이르는 종일 박소(Bakso)나 온좀(oncom) 등 서민들 먹거리를 팔다가 고된 하루 일과를 마치고 숲속 지름길을 통해 귀가하는 장사꾼들 앞을 지나가며 순간적으로 모습을 보이곤 합니다. 사람들 앞을 데굴데굴 굴러 오솔길을 가로지르는 굴루뚝 승이르는 길고 엉망으로 엉킨 머리칼 때문에 일견 커다란 실뭉치처럼 보이기 쉽죠. 그래도 건너편 대나무 숲속으로 굴러가 모습을 감추면 그게 귀신인지도 알 수 없겠지만 문제는 오솔길 한 가운데에 잠시 멈춰 사람을 돌아보며 눈을 맞추고 비웃음을 날려준 후 다시 굴러 사라진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굴루뚝 승이르가 ‘굴러다니며 비웃는 귀신’이란 이름을 갖게 된 이유입니다.

 

수머당의 부아두아(Buah Dua) 지역에은 아직 인구가 적고 대나무숲이나 살락나무 숲이 많아 밤길에 끄머냔 향을 태우면서 걸어가면 이 귀신과 만날 확률이 높습니다.

 

군둘 쁘링이스 (Gundung Pringis)  

 

아마도 같은 부류라 사료되는 군둘 쁘링이스도 땅바닥을 구르며 입가에 웃음기를 띄고 있어 인상착의가 일단 유사합니다. 쁘링이스(pringis)란 말은 ‘이를 드러내고 웃다’라는 뜻이거든요. 하지만 그 앞에 붙은 군둘(gundul)이란 단어는 대머리란 뜻입니다. 그래서 즉 실뭉치보다는 야자열매가 굴러가는 것처럼 보이기 쉽습니다.

 

군둘 쁘링이스는 항상 웃는 게 아니라 때로는 화난 표정을 짓는 등 보다 다양한 감정표현이 가능한 것 같습니다. 주로 촌이나 도시 외곽 한적한 곳, 공터, 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선 플랜테이션이나 수목원 등에서 주로 출몰하는데 한번 씩 웃어주고 대나무숲으로 들어가버리는 주릭 굴루뚝 승이르와 달리 군둘쁘링이스는 깔깔거리며 죽어라 쫓아와 사람들이 도망치다가 급기야 사고를 당하기도 합니다. 해질녘엔 닭장으로 돌아가는 닭들 사이에 섞여 움직이다가 사람에게 들키면 이상한 소리를 지르며 사람을 뒤쫓는다고 합니다. 군둘 쁘링이스는 독립투사들의 잘린 머리라고 보기엔 품격이 너무 떨어지는 게 사실인데 그런 측면에서 오히려 건드루어나 웨웨곰벨처럼 고대로부터 숲속에 깃들어 살던 마물의 한 종류가 아닌가 하는 심증이 생깁니다.

 

그런 심증의 하나로 군둘 쁘링이스가 나타나기 직전 물리적인 전조가 느껴지는데 마치 헐리우드영화에서 귀신이 근처에 있으면 기온이 떨어져 입김이 뿜어져 나오는 것처럼 군둘 쁘링이스가 출현하려 하면 사람의 체온이 올라가고 귓속에서 누군가의 속삭임이나 사이렌 소리같은 이명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때 야자나무 밑에서 큰 소리가 들려 떨어진 야자열매를 집어 들면 야자열매가 별안간 눈을 부릅뜨고 긴 혀를 날름거려 사람을 놀래키거나 어두운 오솔길 저 멀리서부터 하늘이 떠나갈 듯 깔깔거리며 사람을 향해 맹렬히 달려들기도 합니다.

 

싱크대에서 접시를 닦을 때 발목 근처에서 숨결이 느껴지거나 뭔가 닿아 스치는 느낌이 있다면 그게 키우는 고양이가 아니라 군둘 쁘링이스일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하루 일과에 지쳐 자기 방에서 막 몸을 누이는데 천장 한쪽 구석에 민대머리 머리통이 달라붙어 미소 짓고 있다가 사람이 놀라 비명을 지르면 삽시간에 벽과 바닥을 타고 침대 밑으로 숨어버리기도 합니다. 손발도 없는데 매우 민첩하게 움직입니다. 두꾼들은 군둘 쁘링이스의 송곳니를 보고 나이를 가늠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친구가 그렇게 깔깔거리며 쫓아오며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하긴 해도 다른 괴담들의 전개과의 달리 사람을 잡아먹거나 그를 만난 이들이 열이 펄펄 나며 앓아 눕는다는 식의 이야기는 전해지지 않습니다. 심장건강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지만 최소한 재앙과 해악을 몰고 오는 존재는 아니라는 뜻이죠.’

 

중부 자바 뻐말랑의 인적이 드문 산길에도 군둘 쁘링이스과 똑같은 인상착의를 한 머리통 귀신이 돌아다니는데 한뚜 나스 응글룬뚱 (Hantu Ndhas Nggluntung)이라 부릅니다.

 

자바에 진출하지 못한 빨라식

자바섬의 굴러다니는 머리통 귀신들은 기본적으로 흑마술을 익힌 주술사가 밤마다 머리와 몸이 분리되면서 내장을 주렁주렁 매단 흡혈귀가 되어 날아다니는 빨라식 류와는 달리 낮이나 밤이나 초지일관 머리통 상태로 존재합니다. 빨라식은 흑마술사가 변신한 악의 가득한 마물이고 주릭 굴루뚝 승이르나 군둘 쁘링이스는 순수한, 대체로 가치중립적인 귀신인 거죠.

 

자바섬에 빨라식 류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는 것은 어쩌면 미스터리입니다.

역동성이나 비주얼, 스토리텔링 등 어떤 부분에서도 뒤지지 않는, 그래서 인도네시아 대부분 지역과 동남아 거의 전역에 분포한 빨라식 류를 주릭 굴루뚝 승이르과 군둘 쁘링이스가 분연히 굴러다니면서 놀라운 전투력을 발휘해 진출을 저지한 것일까요? 아니면 자바의 무속문화 속 태아와 산모를 위협하는 귀신이 다양한 토착 꾼띨아낙과 순델볼롱 만으로 이미 충분했으므로 빨라식 류가 애당초 끼어들 여지가 없었던 걸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빨라식 류의 귀신들을 다룬 영화들은 예전부터 일찌감치 제작되어 왔고 이젠 속속 리메이크까지 되고 있으므로 자바의 머리통 귀신들이 좀 더 분발해야 할 상황임은 분명합니다.

 

왼쪽부터 <빨라식>(2015), <꾸양>(2021), <레약>(2019)

 

 

2021. 5.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