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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속과 괴담 사이 (11)] 머리통 귀신들의 미스터리

beautician 2021. 5. 18. 12:23

머리통 귀신들의 미스터리

 

 

미낭까바우 지역  

 

빠당(Padang), 뿌낏띵기(Bukittinggi) 등 서부 수마트라를 아우르는 미낭까바우(Minangkabau) 지역은 전통과 관례를 의미하는 아닷(adat)이 가장 강한 곳입니다. 이 지역의 가장 특이한 전통은 모계사회라는 것이지만 여성이 부족장이 되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혈통을 따라 재산이 상속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부모에게 상속받은 재산을 내 누이 쪽 가족들이 관리하게 되고 누이가 없으면 외삼촌들에게 뺏기기 쉽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여성을 부인으로 들이느냐가 중요하다 보니 신랑이 거액의 지참금을 들고 가 힘있는 가문의 여인을 아내로 맞아 오기도 하고, 미낭까바우 남자가 다른 부족, 예를 들어 버타위(Betawi-자카르타 지방) 여인과 결혼해 아들을 낳으면 그 아이는 ‘아닉 삐상(anak pisang)’이라 하여 미낭까바우에서 아무런 재산권도 행사할 수 없는 외지인 취급을 받게 됩니다.

 

미낭까바우의 독보적인 전통만큼 독특한 괴담과 귀신들도 넘쳐나는데 가위 눌리듯 자는 사람을 덮쳐 목을 조르는 마물, 시암빠(Si Ampa), 집안의 어른이 호랑이로 변신한 가문의 수호신 이니약(Inyiak), 자신이 깃든 나무 밑을 지나는 사람을 붙잡아 죽을 때까지 간지럼 태우는 귀신 시준다이(Sijundai), 개의 머리 모양을 하고 쇠사슬을 끌고 다니는 사냥꾼 유령 한뚜 뻠부루(Hantu Pemburu) 등 자바의 귀신들과는 색다른 프로필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미낭까바우를 대표하는 귀신을 하나만 대라면 단연 빨라식(Palasik)입니다. 빨라식 꾸두앙(Palasik Kuduang)이라고도 하는데 꾸두앙은 ‘싹둑 잘림’이란 의미의 현지 방언이에요. 영어식으로는 플레싯(Plesit)이라고 표기합니다.

 

 

빨라식은 특별한 흑마술을 익힌 사람이 본체입니다. 평소엔 사람들 사이에 섞여 평범한 인간처럼 지내고 있어 아무도 그가 빨라식 주술사라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다가 해가 지고 마그립이 찾아오면 주술사의 머리가 그 밑으로 내장을 주렁주렁 매달고서 몸에서 떨어져 나와 공중으로 떠오릅니다. 그리고는 밤하늘을 날며 먹이를 찾아 다니는데 가축들의 피를 빨아먹는다는 얘기도 있지만 빨라식의 주식은 갓난아기입니다. 그래서 빨라식은 아기가 갓 태어난 집 주변을 맴돌며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때로는 산모의 태 속에서 태아를 뽑아 먹기도 하고 사망한 유아의 무덤을 파고들어 포식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산모를 덮치는 빨라식 이미지  

 

그러니 지역사회에서 빨라식 주술사로 지목되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습니다. 그것이 그들이 낮에는 보통사람처럼 지내면서 철저한 비밀을 지키는 이유입니다. 그 주술은 자녀들에게도 물려지므로 그들은 다른 빨라식 가문의 자녀와 혼인하여 가문의 비밀을 지킵니다. 이 흑마술은 7대에 걸쳐 전승되다가 8대째에 끊긴다고 합니다. 즉, 조상이 악마와 맺은 계약에 의한 저주가 마침내 끝나는 것이죠.

 

빨라식은 괴력과 마법을 갖게 되지만 한계도 분명히 있습니다. 이 흑마술을 배웠다고 해서 처음부터 머리통을 하늘로 날려보낼 수 있는 건 아닌 모양이어서 어느 정도의 수양과 성취를 이루어야만 사냥할 정도의 능력을 갖추게 됩니다. 그리고 장기간 아기의 피를 빨아먹지 못하면 죽게 됩니다. 그래서 맹렬하게 아기와 태아를 쫓아다니는 것이고 미낭까바우의 부모들은 빨라식이 산모와 아기에게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해 외쪽마늘, 가위나 바늘같이 날카로운 물체를 아기 가까이에 두거나 정향, 심황, 검은 후추콩, 아레카너트, 마늘, 육두구 등을 함께 넣은 천주머니를 목걸이로 만들어 산모가 부적처럼 지니고 다니거나 갓난아이 곁에 둡니다.

 

하지만 빨라식 역시 또 다른 수법이 있습니다. 아기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 피를 빨아먹을 수 있어 인간의 모습을 한 상태로 아기를 볼 수 있는 곳으로 매일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빨라식의 타겟이 된 아기는 삐쩍 마르고 골골 앓게 됩니다. 물론 그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는 빨라식이 어느날 밤 머리통 귀신이 되어 아기가 혼자 있는 방안으로 날아들게 되죠.

 

그럼 머리통과 분리된 빨라식의 몸은 어떻게 되어 있을까요? 머리 없는 몸통이 좀비처럼 따로 돌아다닌다는 민화도 있지만 대개 머리 잘린 시체처럼 무방비상태로 널브러져 있게 된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그래서 빨라식은 두고 온 몸에 위험이 닥치지 않도록 여러가지 조치를 미리 해 놓습니다. 분리된 머리가 먹이를 찾아 날아간 사이 사람들이 빨라식의 몸을 찾아 목 부분에 대못을 박아 놓으면 나중에 머리가 돌아와 합체하지 못하고 죽게 되기 때문이에요.

 

인간 상태의 빨라식은 코와 윗입술 사이의 인중 홈이 없거나 매우 희미하다고 합니다. 사실 인도네시아에서는 마물이나 귀신들의 변신을 알아보는 방법으로 인중의 홈에 주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빨라식 중엔 쩨쩨하게 집집마다 날아다니며 른당(미낭식 소고기 조림)요리를 얻어먹는 놈도 있어 빠낭가(Panangga)라 부른다는데 긍지 높은 빨라식 세계의 수치입니다.

 

 

빨라식 아트 모음  

 

그런데 내장을 매달고 날아다니는 머리통 귀신이 미낭카바우의 빨라식만은 아닙니다. 깔리만탄 대표 귀신 중 하나인 꾸양(Kuyang)은 빨라식과 거의 모든 묘사가 들어맞습니다. 같은 귀신인 거죠.

 

술라웨시의 뽀뽀(Popo 또는 Popok)귀신 역시 거의 같은 인상착의를 하고 있습니다. 일부 차이점은 밤에 ‘뽁…뽁….뽁’ 소리를 내며 날아다닌다는 겁니다. 그래서 뽀뽀귀신인 거죠. 때로는 어린아이 목소리로 ‘액….액…..액!”하는 소리를 내기도 합니다.

 

낮에 사람 모습을 하고 있을 때에도 항상 눈이 빨갛게 충혈되어 있고 자주 침을 뱉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리고 날아다닐 때 내장을 야자열매 껍질에 담아 문 뒤에 숨겨놓고 머리통만 외출한다고도 해요. 죽어가는 갓난아기를 잡아먹는 뽀뽀 살랑(Poppo Sallang) 외에는 대부분 과일, 생선, 어린 옥수수 같은 것들을 주식으로 하는 뽀뽀 만달라(Poppo Mandala)로 나뉩니다. 술라웨시의 뽀뽀는 머리통 귀신들 중 가장 순박하고 깔끔하고 자연친화적인 부류입니다.

 

 

발리 전통무용에 등장하는 레약  

 

발리에도 레약(Leak)이라는 같은 종류의 귀신이 있습니다. 악의 화신인 마녀 랑다(Rangda)의 부하로 등장하곤 하는 레약을 표현하기 위해 현지 전통공연에서는 사람들이 레약 탈을 뒤집어쓰고 춤을 추지만 사실 레약도 내장을 주렁주렁 매달고 날아다니는 머리통 귀신입니다.

 

하지만 아기나 태아를 노리는 다른 머리통 귀신들과 달리 식인 습성의 레약은 주로 시체를 파먹기 위해 무덤근처에 출몰하며 돼지 같은 동물, 파리 같은 곤충으로도 변신할 수 있습니다. 레약 흑마술사는 더욱 강력한 힘을 얻기 위해 사람의 내장을 즐겨 주술의 재료로 쓰며 마을과 도시에 질병과 죽음을 가져옵니다. 레약을 죽이는 방법은 주술사가 아직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을 때 끄리스 칼을 턱 밑 목에서부터 머리를 향해 올려 찌르면 머리가 몸에서 분리되면서 일정 시간이 지나면 죽게 된다고 합니다.

 

발리에 놀러갔다가 레약 탈을 사와 장식품으로 벽에 걸어놓는 사람들은 아마 그것이 사실은 머리통 귀신 레약을 구현한 것임을 모르는 것 같습니다. 모두 잠자는 밤 시간에 불현듯 눈을 뒤집어 뜨고 날아오를지도 모르는데요.

 

그런데 내장을 매달고 날아다니는 이런 머리통 귀신들은 비단 인도네시아에만 있는 게 아닙니다.

캄보디아의 압(AHP), 말레이시아의 뻐낭갈(Penanggal) 또는 뻐낭갈란(Penanggalan), 태국의 크라슈(Krasue), 베트남의 말라이(Ma Lai)도 인상착의가 비슷한 같은 귀신들입니다. 필리핀의 마나낭갈(Manananggal)도 본질적으로 비슷한 부류지만 머리통 귀신이라 부르긴 좀 곤란한 스팩이죠.

 

 

태국 귀신 크라슈를 다룬 영화 <Inhuman Kiss>(왼쪽)과 필리핀 귀신 마나낭갈의 개념도  

 

그래서 빨라식은 인도네시아에서 전국구 주류 귀신 중에서는 꾼띨아낙, 건드루어(Genderuwo), 뽀쫑(Pocong), 뚜율(Tuyul), 웨웨곰벨(wewe gombel)에 비해 그 악명이 좀 밀리는 편이지만 인도네시아는 물론 동남아에 폭넓은 아류들과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는 메이저 귀신임에 틀림없습니다. 어쩌면 동남아 문화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 갔는지 단서를 일정 정도 저들의 흔적을 따라가며 알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해서 머리통 귀신들의 인도네시아 분포도가 만들어지는데 이상한 점이 보입니다. 날아다니는 머리통 귀신들이 정작 자바섬에는 들어오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인도네시아 머리통 귀신 분포도  

 

빨라식 류의 날아다니는 머리통 귀신들의 진출을 막고 있는 순다의 쥬릭 굴루뚝 승이르(Jurig Gulutuk Sengir)와 자바의 군둘쁘링이스(Gundul Pringis) 등 자바섬의 굴러다니는 머리통 귀신들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계속합니다.

 

 

2021 5.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