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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속과 괴담 사이 (10)] 순델볼롱 본문
순델볼롱 (Sundel Bolong)
인도네시아의 독특한 귀신들을 소개해 주려 했는데 생각해 보니 우선 일반적인 귀신들부터 소개해 줘야 독특한 귀신들이 왜 독특한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자바족 인구가 압도적인 만큼 자바섬 출신 귀신들이 가장 잘 알려져 있는데 작가 미상의 아래 그림에 등장하는 친구들이 가장 대표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부터 시작해 봅니다.
이들 중 가장 일반적이면서 무시무시한 여성 원귀 꾼띨아낙은 이미 소개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꾼띨아낙의 한 부류이면서도 별도의 카테고리로 분류되는 순델볼롱이란 귀신이 있습니다.
자바 왕국의 한 아름다운 후궁이 왕의 후사를 임신하자 왕비의 시기심이 기름을 부은 듯 불타오릅니다. 왕비는 용한 두꾼을 불러 후궁에게 산뗏 저주를 걸었고 후궁이 출산하던 날 아기가 난산 끝에 산모의 등을 뚫고 나오며 사산합니다. 처참한 죽음을 맞은 후궁은 등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모습의 원귀가 되어 궁으로 돌아왔습니다. 원혼을 본 사람들은 그녀를 순델볼롱’이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국왕은 밤마다 찾아와 왕궁이 떠나가도록 간드러진 꾼띨아낙의 웃음소리를 웃어대는 그 귀신이 사랑하던 후궁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때마침 국왕을 찾아온 영험한 울라마는 그 원혼이 급기야 왕국에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가져오게 될 것이라 예언했지만, 간절히 도움을 구하는 국왕의 요청을 차마 뿌리치지 못했습니다. 그날 밤 순델볼롱과 마주친 울라마는 순델볼롱의 정수리에 커다란 나무못을 박아 넣습니다.
그건 훗날 빠꾸 꾼띨아낙(Paku Kuntilanak – 원혼의 대못)이라 불리게 되는 것인데 인도네시아인들은 그렇게 여자원귀의 정수리 어느 일정지점에 대못을 박아 넣으면 귀신이 더 이상 조화를 부릴 수 없도록 능력을 제한하고 원혼을 사람처럼 실체화하여 구속할 수 있게 됩니다. 머리에 못이 박힌 순델볼롱은 음산한 원혼의 기운이 가려지며 예전의 그토록 아름답던 후궁의 모습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가히 환생이었습니다. 비록 시전자의 능력에 묶여 사람들 말을 순순히 따랐지만, 그러나 그녀의 본성은 여전히 꾼띨아낙이었습니다. 그녀의 정수리에 박힌 대못이 그 본성을 짓누르고 있을 뿐이었어요.
그러나 국왕에겐 그것으로 충분했습니다. 사랑했던 후궁이 예전 모습 그대로 다시 돌아왔으니 말입니다. 국왕은 그녀를 다시 맞아들여 총애했고 왕궁과 왕국에는 다시 평화가 돌아왔습니다. 왕후만 빼고서 말입니다. 왕궁의 축제분위기 속에서도 자신을 바라보는 후궁의 섬뜩한 눈빛에 왕후는 오금이 저리도록 무서웠습니다. 그녀가 예의 두꾼을 호되게 질책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 두꾼 역시 한 번 죽였던 후궁을 또 다시 죽여 능력을 증명해 보여야만 했습니다. 그녀가 귀신 순델볼롱으로 되돌아간다면 국왕은 더 이상 그녀를 총애할 리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계략과 술법을 발휘한 끝에 두꾼은 마침내 왕궁의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후궁의 정수리에서 대못을 뽑아내고 맙니다. 그러나 그 이후의 일들은 두꾼이나 왕후의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원래의 무시무시한 순델볼롱의 모습으로 돌아간 후궁의 원혼이 이제 더 이상 아무런 주저도, 미련도 없이 그녀의 원한을 철저히 쏟아 부으며 파국으로 치달았고 예전 울라마가 예언했던 것처럼 왕국의 운명도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능력있는 두꾼들은 꾼띨아낙 머리에 대못을 박아 자기 수하로 부린다고도 합니다. <원혼의 대못(Paku Kuntilanak)>이란 영화도 있었습니다.
자바 전설에 등장하는 순델볼롱(Sundel Bolong)의 일반적인 스토리 전개는 임신중 겁탈당해 생매장당한 무덤 속에서 아기를 낳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꾼띨아낙과 결정적인 차별점은 긴 머리칼로 덮인 등에 등뼈와 내장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커다란 구멍이 나 있다는 점입니다. 순델(Sundel)이란 창녀를 뜻하는 자바어, 볼롱(Bolong)은 '구멍' 입니다. 즉 ‘몸에 큰 구멍이 난 창녀’라고 번역될 만한 단어의 조합입니다. 그런 이름이 붙은 것은 아마도 순델볼롱이 야간에 만나는 남성들을 유혹하기 때문일 듯합니다.
마주 볼 때엔 향기가 풍기지만 등을 돌리면 등에 난 구멍에서 썩은 비릿내가 진동하는 순델볼롱은 자존심 강한 귀신이어서 등의 구멍을 자신의 머리칼로 덮어 가리려 애를 씁니다. 그래야 남자를 유혹할 수 있으니까요. 순델볼롱은 야간에 사람들 붐비는 곳에 자주 출몰해 바람기 있는 남성들을 홀려 성관계를 맺으려 하는데 남자가 유혹을 거절하면 격분하여 고환을 떼어가 버린다고도 합니다
순델볼롱은 갓난아기를 노리는 꾼띨아낙의 습성을 그대로 공유합니다. 그래서 자바지역 부모들은 순델볼롱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갓난아기의 머리맡에 알꾸란을 놓아두곤 합니다.
순델볼롱 관련 영화들이 많이 나왔는데 그중 1981년 시스워로 가우타마뿌뜨라 감독(Sisworo Gautama Putra)의 <순델볼롱(Sundel Bolong)>과 2007년 하눙 브라만티요 감독(Hanung Bramntyo)에 의해 제작된 <순델볼롱의 전설(Legenda Sundel Bolong)>이 유명합니다. 특히 1981년작에서 주연한 수잔나는 당시 종교적, 또는 전통적 사고환경에서 다른 여배우들이 귀신역을 꺼리던 상황에서 수십편의 공포영화에서 주연을 맡으며 명실상부 인도네시아의 호러퀸으로서의 80년대를 풍미했던 독특한 분위기의 여배우였습니다.
모든 귀신들을 돈벌이에 사용하는 인도네시아 무속은 순델볼롱을 통해서도 재물주술(pesugihan)을 시전합니다. 우선 순델볼롱과 결혼하면 부자가 된다는 믿음이 있어요.
또한 순델볼롱은 그녀의 원한과 관련없는 일반 상인들에게는 비록 무서워 오금이 저리긴 해도 통 크고 마음 넉넉한 ‘좋은 친구’라는 시점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순델볼롱이 나뭇잎으로 만든 돈을 내고 다량의 음식을 먹고서 예의 간드러진 웃음소리만 남기고 사라져버리면 당장은 손해가 나지만 곧 그 손해를 몇 배로 보상하고도 남을 만큼 손님들이 북적거리게 됩니다.
하지만 이보다 좀 더 본격적인 재물주술의 기록이 있습니다. 두꾼을 통해 순델볼롱과 계약을 맺는 거죠. 이 주술을 사용하는 이들은 비록 아름다운 여인이라 할지라도 얼굴에 항상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 있고 죽고 나면 그들의 영혼은 영겁의 세월을 순델볼롱의 하수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들이 순델볼롱의 재물주술을 사용한 징후는 죽은 후 더욱 뚜렷이 나타나는데 우선 시신을 닦을 때 등에 커다란 원형의 멍 같은 검은 형태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시신을 매장한 후 사람들이 장사를 마치고 무덤으로부터 40걸음을 떼는 순간 그 검은 원은 커다란 구멍으로 변합니다. 몸에 구멍이 뚫리는 것이죠. 바로 그 순간부터 그 시신의 주인은 순델볼롱 귀신의 형상으로 변하여 자신이 계약을 맺었던 원래의 순델볼롱을 위해 복무하기 시작합니다. 그가 순델볼롱 재물주술로 모은 재산은 그 시전자가 죽으면 급속히 줄어들거나 장롱 안에 숨겨둔 패물들이 구더기 더미로 변하는 등 사라져 버린다고 합니다.
이처럼 부를 위해 순델볼롱과 같은 귀신이나 마물들과 맺은 계약은 언제나 피할 수 없는 파국을 가져오는 것이 보통입니다. 깊이 들어갈수록 점점 더 음습해지죠.
수라바야와 마두라를 잇는 5,400미터짜리 수라마두 해상교량에서도 2017년경에 한동안 순델볼롱을 보았다는 목격담이 줄을 이었습니다. 2000년대 중반 한국에서 유명했던 자유로 귀신처럼 차를 몰고 이 다리를 지나던 사람들이 귀신을 보고 놀라 사고를 내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물론 거기서 드는 의문은 목격자들이 왜 꾼띨아낙을 보았다고 하지 않고 등엔 난 구멍으로만 구분할 수 있는 순델볼롱을 특정했는지 하는 점입니다. 인도네시아인들에겐 우리가 잘 모르는 특별한 눈썰미가 있는 걸까요?
2021. 4.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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