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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칼럼

빠렌타스(Parentas) 습격작전

beautician 2020. 11. 3. 12:34

빠렌타스(Parentas) 습격작전

 

 

체포된 양칠성(왼쪽)과 아오키 상사(오른쪽)

 

타식말라야의 찌갈롱땅에 속하는 빠렌타스 촌의 그날 분위기는 사뭇 심상치 않았다. 주민들은 갑작스러운 총소리에 화들짝 놀랐는데 가룻-타식말라야 지역의 친 인도네시아 공화국 갈룽궁 게릴라 본부(MBGG)가 있는 도라 계곡 쪽에서 치열한 총성이 들려온 것이다.

 

네덜란드 국가기록원 문서번호 2.24.04.01의 자료에는 이 군사작전이 19481025일과 26일 양일간 도라산 기슭에서 벌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작전목표는 일본군 출신 테러범 수괴들을 나포하는 것이었고 네덜란드군 제14보병연대 제3대대가 이 작전에 동원되었다. 이 나포작전은 매우 성공적으로 진행되어 네덜란드군 공격-체포조가 세 명의 일본인을 사살하고 국재만, 마샤로 아오키, 양칠성, 하세가와 카츠오, 그리고 MBGG 부대장 주아나 사스미타를 체포했다.

 

수바르조는 사살당했다….” 주아나는 일기장에 그렇게 적었다. 수바르죠는 국재만의 인도네시아 이름이다. 국재만은 그날 낮, 탈주를 시도하다가 곧바로 사살당했다.

 

당시 게릴라 부대원이었던 오조 수빠르죠에 따르면 당시 도라산 게릴라 본부 습격이 네덜란드군 정보부대에 포섭된 게릴라 부대원이 정보를 빼돌려 가능했다고 전한다. “그렇게 지휘관들이 모두 나포된 지 사흘 후 우린 그 배신자를 잡아 목을 땄습니다.” 당시를 회상하던 오조씨는 인터뷰 몇 달 후 세상을 떠났다.

 

아이코 쿠라사와가 쓴 <대동아전쟁의 어두운 면>에서 도라산 작전이 있기 전부터 네덜란드군은 누구든 이들 일본인, 한국인들의 위치를 신고하는 자에게 1,000 굴덴의 현상금을 건 바 있다. (1굴덴은 1940년 대엔 고급 설탕 7kgs 상당) 아이코에 따르면 게릴라 측 한 부대원의 처가 신고했다고 한다.

 

그런데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에 가담한 한국인들에 대해 수십 년간 연구해온 김문환 작가는 2012년 현지 취재원 인터뷰를 통해 당시 배신자가 에하라는 이름의 가룻 처녀로 양칠성의 애인이었다는 증언을 들었다. “어찌된 일인지 몰라도 양칠성과 에하의 관계가 나빠졌어요. 그래서 앙심을 품은 에하가 도라산 MBGG의 위치를 누설한 거죠.”

 

한편 빠렌따스 촌 바로 아랫마을인 빠멍쁙 마을에 살았던 에멘(93)씨는 당시 MBGG를 습격한 네덜란드군과 함께 움직이던 한 현지인을 눈여겨 보았다. 네덜란드군은 작전을 마치고 도라계곡에서 철수하면서 MBGG에 연루되었다고 의심되는 집들을 불살랐는데 에멘씨는 당시 어느 집을 불지르고 어느 집은 놔둘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그 현지인을 똑똑히 보았다. “그는 빠녀르단(빠멍쁙 이웃마을) 사람이었어요. 그가 네덜란드군의 개일 줄은 상상도 못했어요,” 그는 그렇게 말하며 분개해 마지않았다.

 

생포된 MBGG 게릴라 네 명은 와나라자 지역의 찌하루스의 네덜란드군 진영에 끌려갔다가 이후 자카르타로 압송되었다. 주아나의 일기에 따르면 외국인들은 글로독 형무소로, 주아나는 찌삐낭 형무소로 흩어져 감금되었다.

 

19492월 가룻에서 열린 네덜란드군 특별 군사재판에서 재판장 W. 슈페이르트 중령은 외국인 세 명에게 사형을, 주아나에게는 무기징역을 각각 선고했다. 그들이 렌빌조약 체결 이후에도 조약을 어기고 임의로 서부자바 지역에 계속 주둔하면서 치안교란행위를 저질렀다는 것이 유죄의 이유였다. 더욱이 그들은 194911일 가룻과 타식말라야 지역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 내용은 1949222일 네덜란드 신문 드 로코모티프(De Locomotief)에서 발췌한 것이다.

 

일본군 출신 외국인 세 명은 이후 사형집행을 위해 글로독 형무소에서 가룻 감옥으로 이감되었다. 이 사건을 취재한 가룻 지역 저널리스트 요요 다스리오에 따르면 사형집행 이틀 전 이들 세 명의 마지막 소원 청원이 허락되었다. “그들의 사형집행에 잠석한 레베(Lebe-이슬람 지도자)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그들은 인도네시아 공화국 국기와 같은 이미지의 옷을 입고 사형장에 서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붉은 색 사룽을 두르고 그 밑에 흰색 바지를 입었습니다.” 요요의 이 증언은 2015년에 나온 것이다.

 

그들 세 사람은 1949521() 가룻의 네덜란드인 묘지 꺼르코프(Kerkof)에 끌려가 찌만둑 강가에서 인도네시아 공화국 국기인 적백기 모티브의 복장을 한 채 총살당했다. 그들의 사망일자가 그간 알려진 1949810일과 상당한 차이가 나지만 이는 1949524일자 헷 다그블라트(Het Dagblad) 신문과 그해 624일자 니우꿀란트(Nieuwe Courant)지의 기사를 근거한 것이다.

 

그들의 유해는 빠사르뽀고르 일반 묘지에 매장되었다가 1975년 현재의 뗀졸라야 영웅묘지로 이장되었다. 그로부터 다시 20년이 더 지난 후 인도네시아 한국교민들의 노력을 중심으로 양칠성의 묘비에 한국 본명을 새겨지게 되었다. 3지역군 실리왕이 부대 참모장 라흐맛 HS 모꼬긴타 준장의 지휘 아래 군대식으로 진행된 양칠성의 묘비 교체식에는 양칠성의 게릴라 동료들, 양칠성의 아들 에디 자완(Eddy Jawan) 그리고 한국에서 온 그의 가족들이 참석했다.

 

양칠성 묘비 교체식

 

글쓴이: Hendi Johari

번역: Beatici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