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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질서 정권의 유산 본문
역사 속에 여전히 어슬렁거리는 신질서 정권
1998년 5월 21일은 뜨리삭티 대학에서의 시위대 총격으로 시작된 민주화 운동과, 그 이면에서 도시빈민들이 일으킨 자카르타 폭동이 도시를 초토와시킨 상황에서 수하르토 당시 대통령이 하야를 선언했던 날이다. 그리하여 하비비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인계받았고 다음날 수하르토의 사위이자 직전까지 특전사령관을 하다가 1965년 수하르토가 쿠데타를 분쇄하고 대권을 향해 부상하게 했던 육군전략예비사령관이 된지 얼마 안된 쁘라보워 수비안토가 특전사 부대를 움직여 대통령궁을 조여왔다.
쁘라보워 수비안토. 지난 2014년, 2019년 그린드라당의 대선후보로 조코위 대통령과 맞붙었던 그 쁘라보워 맞다. 현재 조코위 2기 정권의 국방장관. 1998년 그렇게 막을 내린 신질서 정권(Orde Baru)의 핵심 실세가 2020년 현재 아직도 살아남아 맹위를 떨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당시 수하르토가 신질서정권의 중심이었다 해도 이미 '신질서 정권'은 시스템이 되어, 그 대표에 불과했던 수하르토가 사라진 후에도 아직까지 우리 곁에 어슬렁거리며 당시의 영향력을 대체로 건재히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증명하듯이 당시 신질서 정권의 또 다른 실세가 조코위 정부의 중심에 서 있다. 1998년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위란토의 하누라 당은 2019년 총선에서 국회의석을 하나도 얻지 못해 원외정당으로 밀려났지만 지난 조코위 1기 정권에서 국방안보사법 조정장관으로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권력을 누렸다. 그가 현재 쁘라보워와 연정을 이룬 조코위 정권에 서 있는 것은 당시 그들의 악연을 생각하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가까운 군 선후배였던 그들은 1998년 쁘라보워가 쿠데타 기미를 보이자 곧 그의 계급장을 뜯어내고 퇴출시켰는데 그 형식은 1998년 시민운동가들을 비밀리에 납치 살해한 사건의 책임을 묻는 것이었다. 초급장교 시절부터 동티모르와 파푸아에서 특전사 장교로 잔뼈가 굵은 쁘라보워는 누가 뭐래도 명실공히 신질서 정권의 얼굴이었다.
하지만 위란토 역시 그 못지 않는 전력을 가지고 있다. 그는 동티모르에서 벌어진 유혈사태, 특히 하비비 대통령 시절 친 인도네시아 민병대가 독립성향 민병대들과 벌인 유혈극 배후로 지목받고 있을 뿐 아니라 신질서 정권 당시 13명의 시민운동가 실종사건, 아트마자야 대학교와 뜨리삭티 대학교에서의 발포사건 등에 대해 책임져야 할 위치에 있었으나 아직까지 단 한번도 단죄를 받거나 법정에 선 적이 없다.
AM 헨드로쁘리요도 역시 수하르토 정권에서 국내이주 장관을 비롯한 요직을 맡다가 메가와티 정권에서 국가정보원(BIN) 원장을 맡아 국가적 기밀정보를 다루었다.
이외에도 신질서 정권이 드리운 그림자는 조코위 정권 곳곳에 남아있다. 현 정권 실세 중의 실세인 루훗 빤자이탄 해양경제조정장관이나 파크룰 라지 종교부 장관도 수하르토 정권에서 승승장구하다가 4성 장군으로 군복을 벗은 사람들이다.
가장 진보적이고 서민적이라고 평가받는 조코위 정권에 수하르토의 수하들, 그 당시의 인물들이 대거 요직에 포진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32년간의 신질서정권 독재가 만들어놓은 시스템이 아직도 여전히 물밑에서 구동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1998년 5월 21일 수하르토는 그렇게 하야해 역사의 뒤안길로 접어들었지만 그가 구축한 신질서 정권은 이제 망령이 되어서도 인도네시아 정계를 여전히 떠돌며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당사자들은 전혀 그렇지 않은 듯한 표정들을 짓고 있지만.
2020. 5.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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