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깔리바타 영웅묘지 (Makam Pahlawan Kalibata)

beautician 2019. 4. 26. 10:00


어느날 점심시간을 이용해 깔리바타 영웅묘지를 다시 한번 방문했습니다.

이번엔 꼭 찾고 싶은 사람들의 무덤이 있었습니다.



입구 광장은 웅장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저 안에 위령탑이 보입니다.

묘역은 연도별로 구분되어 있지만 묘역의 순서가 연도순이 아니어서 누가 소개해 주지 않으면 찾아가기 힘듭니다.


입구 가까이의 벽에는 연도별 사망자 명단이 새겨져 있습니다.


위령탑




"그의 이름은 알 수 없지만

오늘 우린 그의 노력을 기린다.

국가와 민족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렸으므로." 


2002년 사망자 묘역

대체로 기둥식 묘비는 이슬람 신도, 십자가 묘비는 기독교 신도의 묘지로 구분됩니다. 



바닥이 달리 되어 있는 묘지는 1965년 9,30 사태로 목숨을 잃은 장성들 묘역입니다. 당시 사망한 기독교인 장성들은 기독교인 묘역에 따로 묻혀 있습니다.


야니 중장과 수쁘랍토 소장 (사후 일계급 승진해 대장과 중장이 됨)

MT 하리요노 소장과 S 빠르만 소장 (사후 일계급 승진하여 각각 중장이 됨)

오른쪽이 수또요 준장 (사후 소장으로 일계급 승진)

RE 마르타디나타 해군참모총장. 9.30 쿠데타 당시 현직에 있었습니다.


Warga란 '주민'이란 뜻이죠. 전투에 참여해 전몰한 이름 모를 주민이란 뜻이라 이해됩니다.


Pahlawan Tak Dikenal은 이름모를 영웅이란 뜻입니다. 무명 전몰용사


모두 1945년 묘역에 있습니다.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이 발발한 해죠.

사망자 명단도 1945년부터 시작됩니다.


저토록 많은 무명용사들이 뭍혀 있습니다.


오른쪽 위로 야니 장군으로부터 시작되는 9.30 쿠데타 희생 장성들 명단도 있습니다.




내가 찾으려 했던 사람들은 이들입니다. 하룬 토히르와 우스만 자나틴. 

청소용인의 안내로 그들의 묘역을 찾았습니다. 1965년 싱가폴에 침투해 샹하이은행을 폭파한 해병대원들. 그들은 결국 1968년 싱가폴에서 교수형을 당한 공비였으나 인도네시아는 그들을 국가영웅으로 대우했습니다.

우스만 병장


하룬 상병. 그의 고향인 바웨안 섬(Pulau Bawean)에는 그의 이름을 딴 하룬 토히르 공항이 있습니다.



그들은 사병으로서 국가영웅이 된 몇 안되는 진귀한 케이스들입니다.

그들이 싱가포르 맥도널드 하우스의 샹하이은행을 폭파한 것은 말레이사아 대결정책이 한창이던 1965년의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해병대원으로서 당시 말레이시아 영토였던 싱가포르에 침투한 인도네시아 특수부대원 일원이었고 대부분 해안에서 영연방군에게 막히거나 사살당한 상태에서 하룬과 우스만은 시내까지 진입해 과업을 수행한 것입니다. 그들은 명령받은 바를 수행한 군인이었으나 말레이시아/싱가포르 입장에서는 공비이자 테러범이었죠.

교수형을 앞둔 두 청년. 그리고 자카르타에 도착하여 운구되는 모습

그들의 유해가 인도네시아에 도착했을 때 많은 군관계자들의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깔리바타 영웅묘지에 그들이 안장될 때 우스만의 어머니는 자지러질 듯 통곡했다고 합니다.

지금도 해병대원들은 시시때때로 이들이 무덤을 찾아 헌화합니다.

인도네시아 해군의 경순양함 KRI 우스만-하룬은 그들의 이름을 딴 군함이고요.

인도네시아군 사병들 중 이들만큼 사후 대접받은 이들은 흔치 않습니다. 이것은 말레이시아와의 전쟁이 끝나고 우호관계를 수립한 후에도 결국 구해내지 못한 채 현지에서 처형당한 자국 군인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자 염치였다고 생각합니다. 최소한 국가를 위해, 또는 국가의 명령에 따라 목숨을 바친 자국 영웅들에 대한 인도네시아의 국가적 태도는 본받아 마땅한 일입니다.



2019. 4.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