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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칠성을 위한 변명 본문
양칠성을 위한 변명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이 막판을 향해 가던 1949년 빠빡 왕자의 부대 (pasukan pangeran Papak) 일원으로 인도네시아 정부군 편에서 싸우다가 렌빌조약으로 갑작스럽게 만들어진 국경 너머 적진 깊숙한 고립무원의 전장에서 고군분투한 끝에 아오키, 하세가와 등 일본군 동료들과 함께 네덜란드군에게 나포되어 가룻(Garut)의 시장터에서 기미가요를 부르고 천황폐하 만세를 외친 후 총살당한 것으로 알려진 양칠성의 마음을 헤아려 봅니다.
왼쪽 사진의 왼편이 양칠성, 오른쪽은 아오키 상사
그는 일본군 군속으로 당시 네덜란드령 동인도였던 인도네시아에 도착한 조선인 포로감시원 중 한 명이었고 일본패전 후 상관이었던 일본군 아오키 상사의 권유와 설득으로 부대를 이탈해 인도네시아 독립군에 합류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연합군 포로들을 학대한 전력때문에 전범으로 몰려 처형당할 상황을 모면할 목적이 있었으리란 정황도 엿보입니다. 그 과정에서 그에겐 야나가와 시치세이라는 일본이름과 꼬마루딘이라는 인도네시아 이름이 따라붙었고 태어날 때 붙여졌던 한국이름은 1975년 한 일본인 학자가 그의 역사를 발굴해 내기까지 수십 년간 잊혀져 있었습니다.
인도네시아에 사는 교민이라면 그 이름을 한번쯤은 들어보았을 것 같습니다. 양칠성은 1942년 2월 일본군이 네덜란드령 동인도에서 네덜란드군이 주축이 된 연합군을 해상과 육상에서 철저히 격파한 후 8만여 명에 달하는 현지 연합군 포로들을 감시하고 사역시킬 목적으로 일본군이 그해 4월-5월 사이에 근무기간 2년 조건으로 강제 징용하다시피 모집한 조선인 군무원들 중 8월에 수송선에 태워져 인도네시아를 향한 1,400여 명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 군무원 대부분은 약정한 근무기간을 마친 후에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고 그 와중에 일본의 패망으로 세계대전이 끝나 버립니다. 조선인 군무원들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을 뿐 아니라 끝내 돌아가지 못한 이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양칠성이 아오키로부터 직접 부대이탈 권유를 받았다는 것은 어쩌면 그가 일본군에게 입안의 혀처럼 굴었다는 반증일지도 모릅니다. 그런 그가 함께 일본군을 이탈한 조선인, 일본인 동료들과 함께 뜬금없이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에 뛰어듭니다. 물론 개인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빵에란 빠빡 부대의 내로라하는 폭파전문가였다고 하는데 군인도 아닌 군무원으로 왔던 사람이 어떻게 폭약을 능숙하게 다루었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어쩌면 영리한 그가 인도네시아군에 합류한 후 배워 익힌 기술일지도 모릅니다. 포로감시원으로 3년을 보냈던 그가 부대를 이탈한 후 네덜란드군에 맞서 싸우다 사로잡히게 되는 1948년 11월까지 또 한번 3년의 시간을 인도네시아 독립군부대에서 보냈으니 말입니다.
그로부터 한달 후 1948년 12월 휴전을 깨고 인도네시아 공화국 임시수도 족자를 치고 들어가 수카르노 대통령을 포함한 인도네시아 정부 전체를 나포한 네덜란드는 사실상 전쟁을 승리로 끝낸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돌이키기 힘든 전황 속에서 썩어 들어가는 폐를 안고서 고군분투하며 자바 전역의 정부군 게릴라를 이끈 수디르만 장군이나 부낏띵기의 샤리푸딘 쁘라위라느가라가 이끌던 인도네시아 비상정부의 분전이 없었다면, 그래서 인도네시아라는 존재가 그때 완전히 소멸했다면 양칠성의 운명은 어떻게 변했을까요?
그와 일본인 동료들이 가룻 장터의 처형장으로 끌려나온 1949년 8월은 종전을 향한 낙관이 인도네시아인들 마음 속에 번지던 시절입니다. 헤이그 원탁회의를 열어 인도네시아 독립조건을 협의하기로 한 로엠-판로옌 조약(Roem-van Roijen Agreement)이 그해 5월 7일 서명되고 방카섬에 유배되어 있던 수카르노와 인도네시아 정부가 7월 6일 족자로 복원되었죠. 그리고 8월 11일에는 자바에서, 8월 15일에는 수마트라에서도 인도네시아군와 네덜란드군 사이에 휴전이 발효되었습니다. 기나긴 전쟁이 마침내 끝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네덜란드군은 양칠성들의 처형일을 8월 10일로 정했습니다. 자바의 휴전발효 바로 하루 전으로 말입니다. 네덜란드군은 빵에란 빠빡 부대의 외국인들을 절대 살려 두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가룻 시장 처형장에 끌려나온 양칠성과 그의 동료들은 지난 9개월간 가혹한 포로생활을 통해 예전의 용기와 기백은 완전히 꺾였고 몸과 마음도 피폐할 대로 피폐했습니다. 침통해 있던 그들은, 그러나 처형장 기둥에 모두 묶인 후 아오키 상사의 선창으로 일본국가인 기미가요를 부릅니다. 어딘가 처량한 그 가락에 네덜란드인들도, 시장에 모여든 인도네시아인들도 어리둥절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뒤이어 총성이 울리기 직전 그들은 천황폐하 만세를 목청껏 외칩니다. 눈이 가려진 양칠성도 그들과 함께 천황폐하 만세를 불렀습니다.
“그 대목이 안된다는 겁니다. 양칠성에 대해서 호불호가 갈리는 거 아시죠? 양칠성은 항일독립운동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아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자카르타에서 관련 세미나를 조직할 때 발표내용에 포함되었던 양칠성에 대한 주최측의 반응은 냉담했습니다. 물론 나 역시 그가 일본에 저항했던 독립투사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양칠성이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의 영웅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가 연합군 포로를 학대한 포로감시원이었기 때문에, 해방 후에도 일본군 출신들과 한 솥 밥을 먹었기 때문에, 그가 죽기 전 일본국가를 부르고 천황폐하 만세를 불렀다는 소문이 있어 그의 인생과 죽음을 폄하하는 시각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난 이렇게 쏘아붙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이를 인도네시아인들에게 소개하는 것은 좋지만 사실 3.1운동 자체는 인도네시아와의 접점은 없고, 그 접점이란 점에선 양칠성 만한 소재가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설령 양칠성이 처형 전 일본인 동료들과 기미가요와 천황폐하 만세를 부르고 죽었다 한들 그를 친일의 아이콘처럼 보는 건 밴댕이 소갈머리입니다. 목숨을 걸고 적전선 후방에서 함께 싸운 일본인들과 같은 날 한 자리에서 처형당하는 마당에 '천황폐하가 무슨 개소리냐, 난 독립만세하고 죽을란다" 이러겠습니까? 함께 싸우다 함께 죽는 동료들이 정겹고 고마워서 나라도 기꺼이 함께 기미가요 부르고 천황폐하 만세 할 것 같습니다. 양칠성이 먼저 대한민국 만세를 불렀다면 아오키나 하세가와도 분명 뜨거운 마음으로 함께 대한민국만세 외쳤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기미가요와 천황폐하 만세를 외쳤다는 것 자체가 아오키와 하세가와의 애국심을 강조하기 위해 누군가가(아마도 일본 측이나 양칠성들의 이야기를 파는 헤이호 출신 현지 원로일 것으로 추정) 만들어낸 이야기라는 주장이 더욱 개연성 있습니다. 인도네시아 역사연구단체인 히스토리카 인도네시아(Historika Indonesia)의 저널리스트 헨디 조 (기자)에 따르면 그가 가룻 지역을 탐방하며 빵에란 빠빡 부대원들과 그 후손들을 만나 인터뷰한 바 당시 처형장에서 그들의 마지막 외침은 이랬다고 합니다.
"머르데카!!"
Merdeka란 '독립'이란 의미죠. 그 장면이 영화 <브레이브하트>의 스코틀랜드 영웅 월리스가 'Freedom!'을 외치던 장면과 겹쳐 보여, 처음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너무 작의적이라 생각하며 믿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처형장의 당시 상황과 양칠성들의 처형 전 마지막 소원이 인도네시아 국기를 뜻하는 적색과 흰색으로 이루어진 옷을 지어입고 죽겠다고 했다는 헨디 조 기자의 취재결과를 듣고 믿음이 갔습니다. 인도네시아 독립군 민병대에서 3년간 싸운 끝에 사로잡혀 이제 적백기 복장을 차려입고 처형장에 선 이들이 뜬금없이 천황폐하 만세를 불렀다면 너무나 부자연스러운 장면이 되는 것이죠. 그들은 취재된 것처럼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외치며 눈을 감았으리라 생각됩니다. 기미가요를 불렀다는 것도 당시 맥락에 전혀 맞지도 않고 그런 증언도 없었습니다.
세상 모든 것이 그렇듯 내가 어떤 입장에 있느냐, 사안을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양상을 띕니다. 가혹한 수탈을 저지른 일본과 그 수탈을 견뎌낸 한국인이 그 불행한 역사가 끝난 지 불과 4년 후 머나먼 인도네시아 땅에서 네덜란드라는 공동의 적에 대항해 함께 싸웠고 함께 죽었다, 한국과 일본은 사실 이렇게 가까워질 수도 있는 사이였다…..이런 식의 접근은 절대 불가능한 겁니까?
네. 불가능합니다. 어떤 이들에게 이런 식의 사고전환은 절대 불가능한 주문입니다.
양칠성이 항일활동을 하지 않지 않았다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3.1항일운동의 배경을 생각해 봅시다. 1919년 2월 1일 만주 지린에서 신채호 선생을 비롯한 독립운동가 39인이 무오독립선언을 발표하며 조선의 독립을 주장했고 일본의 동경 한복판에서도 조선 재일유학생들의 2.8 독립선언서가 낭독됩니다. 그것은 한반도 전역에서 들불처럼 번지는 3.1항일운동의 도화선이 되죠. 그 모든 것의 기저에는 그 해 1월 18일 파리강화조약에서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이 발표한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있습니다. 각 민족의 운명을 그 민족 스스로가 결정하게 하자는 것이죠. 양칠성과 그의 동료들은 결과적으로 그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위해 싸웠습니다. 인도네시아 민족이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하도록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양칠성의 활동은 오히려 3.1운동 정신과 너무나 일맥상통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 맥락에서, 3.1절을 맞아 적지 않은 수가 변절해버린 3.1 독립선언서의 33인을 기억하는 것보다 양칠성이 인도네시아에 남긴 유산을 기리는 것이 못지 않게 의미있는 일 아닐까요?
인도네시아는 네덜란드와 독립전쟁을 치렀고 베트남은 프랑스와, 그 후 미국과 전쟁을 치러 스스로의 독립과 통일을 이루었기 때문에 예전 식민지 종주국들에게 당당하고 자랑스럽고, 때로는 스스럼없을 수 있습니다. 역사의 한 장이 결착이 지어진 후 넘겨졌으니까요. 하지만 한국은 일본과 결착을 내지 못했습니다. 기나긴 일제강점기가 끝난 후 3.8선 이남에 진주한 미군이 친일파를 중용하면서 오늘날의 한국은 절대로 상극이어야 할 보수와 친일이 일정 부분 서로 맞닿아 화답하는 이상한 사회가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일본에 대한 한국의 독립전쟁은 위안부 문제에서, 징용자와 원폭 피해자 보상에서, 독도 문제에서, 초계기 사태에서, 아직도 현재진행 중인 상태입니다. 그래서 날로 줄어드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생존자 숫자는 일본에게 발 뻗고 잘 날이 다가오는 바로미터가 아니라 일본을 한국이 용서할 여지가 전혀 없어지는 순간을 향해 가는 카운트다운입니다. 이런 민족감정에서 한국인들은 당연히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일본이 ‘묻은’ 양칠성이 인도네시아의 영웅일지언정 우리들의 영웅으로 용납하고 포용할 수 없는 것은 일본과 결착짓지 못한 역사를 가진 우리들의 콤플렉스이기도 합니다. 그에 대한 판단은 온전히 개인들 각각의 몫입니다.
3.1항일운동이 있었던 1919년에 문제의 양칠성이 태어났다는 것이 무척 공교로워 보입니다. (끝)
가룻 영웅묘지에 있는 양칠성 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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