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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으로 살아가기

강연·세미나

[강연자료]차원의 문-업그레이드

beautician 2018. 11. 20. 01:02

11월 20일 후속 강연을 위해 슬라이드를 추가하고 내용을 보완했습니다




1986년부터 1988년 사이에 제3땅굴에 안보견학을 온 사람은 이미 나를 한번 만난 적이 있습니다.


1999년에 딴지일보를 즐겨보신 분은 이미 내 글을 읽어보신 적이 있습니다


최근 6-7년 사이 인도웹을 서핑하신 분들도 내 글을 한번쯤은 읽어 보셨겠죠.


하지만 이건 아직 못읽어 보셨겠죠. 2018년 9월 17일부터 시판된 첫 인도네시아 현대사 책은 현재도 한인뉴스에 2년째 연재되고 있습니다. 



고 최계훨 회장님은 인도네시아 초대 한인회장이기도 했습니다.


깔리만탄에서 목재사업으로 대성공을 거둔 코데코는 마두라유전에 발목을 잡혔습니다. 마두라유전은 코데코를 나락을 빠뜨렸지만 오늘날의 코데코 에너지가 근근히 살아남게 된 배경이 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2017년 11월 27일 그가 타계했을 때 조선일보의 오보를 보십시오. 사실 수카르노는 연합군이 최고 전범으로 인식할 만큼 일본에 부역했으므로 일본군에게 잡혀 감옥에 갇힌 일은 전혀 없었고 최계월 회장 역시 1962년 이전엔 인도네시아에 온 적이 없으니 위의 기사는 완전히 허구입니다. 하지만 조선일보는 정정보도를 하지도 않았고 사과도 하지 않았으므로 위의 기사는 아직도 인터넷을 통해 검색할 수 있습니다.


같은 부고 기사에 실린 사진도 그렇습니다. 왼쪽 사진의 최계월 회장과 연합뉴스가 제공한 저 기사의 사진은 같은 사람의 모습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1998년 당시 최계월 회장의 수상장면은 이 슬라이드에서 보는 바와 같습니다. 연합뉴스는 전혀 틀린 자료사진을 잘못 제공했고 조선일보를 비롯한 당시 상당수의 매체들이 잘못된 사진을 부고기사에 실었습니다. 지금 찾아보면 맞는 사진으로 교체한 매체들이 많이 보입니다. 하지만 조선일보는 여전히 저 위의 틀린 사진을 게재해 놓은 상태입니다.


그게 꼭 조선일보라서 그렇게 한 것은 아닙니다. 그들에겐 인도네시아가 그저 우스웠을 뿐이죠. 그러니 초대 한인회장의 부고기사조차 저렇게 날림으로 날조해 실었던 것입니다. 남들은 몰라도 우리 인도네시아의 한국교민들만은 이를 그러려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입니다.


현대사 공부를 하게된 또 다른 계기는 우리가 매일 지나는 길 이름의 의미가 궁금해졌기 때문입니다. 모르고 다니는 건 하루 이틀, 길어야 1-2년이면 족합니다. 20년 동안 다니고도 그 길의 이름도, 의미도 모른다는 건 너무 성의없게 인생을 사는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모나스 광장 북서쪽의 윗쪽으로 마자빠힛 거리가 있고 이 도로는 한 도로와 이어지는데 특이하게도 북쪽으로 올라가는 방향은 가자마다 도로, 남쪽으로 내려오는 방향의 도로는 하얌우룩 도로입니다. 한 도로가 두 개의 도로명을 가지고 있는 셈입니다. 왜 그럴까요?


마자빠힛 왕국은 자바섬의 마지막 힌두불교국가로 1293년부터(일각에서는 1299년부터라고도 함) 1500년까지 200년 남짓 존속했습니다. 이 당시 현재의 인도네시아 영토 대부분을 그 영향력 아래 두고 있었습니다.


그 마자빠힛 왕국은 하얌우룩 왕과 가자마다 재상이 다스리던 시절 그 절정기를 맞습니다. 하지만 가자마다 재상의 25년 재직기간과 하얌우룩 왕의 39년 재위기간 중 이 두 인물이 겹치는 기간은 불과 9년뿐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두 사람의 이름이 한 거리의 두 방향 도로에 각각 붙여진 것은 바로 그 겹치는 9년간이 마자빠힛 왕국의 최고 황금기였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반둥에도 흥미로운 길이름이 있습니다. 저 반둥불바다 기념비가 있는 공원 밑에 잘란 뻬따와 잘란 BKR를 주목하세요. 그리고 공원 우측을 접해 남북으로 연결된 모 또하라는 긴 도로, 그리고 조금 우측으로 BKR 도로 위쪽에서 우측 사선을 그리는 모 람단 거리도 주목하세요, 이들 도로에 대해 이야기하려 합니다. 저 공원 위에 있는 이부 잉깃 가르나시라는 도로 역시 여기서 다룰 예정입니다. 우선 잘란 뻬따를 먼저 볼까요?


여기서 Peta란 지도를 뜻하는 말이 아닙니다. PETA는 일본군 강점기에 연합군의 상륙을 대비해 지역방위대 성격으로 일본군이 조직한 의용군으로 Pembela Tanah Air 즉 조국수호대 정도의 의미를 띄고 있습니다. 일본군이 무장시킨 PETA는 복식은 물론 훈력방식에서 왜색이 뚜렸습니다. 이들의 속성을 일본군을 위한 총알받이였지만 인도네시아 전역에 훈련소와 주둔지를 가진 PETA는 훗날 인도네시아군의 근간을 이루게 됩니다. 


일본이 항복한 후 1945년 8월 22일 자바섬의 일본군도 순순히 항복을 인정하고 PETA 와 또다른 군사보조조직인 Heiho를 해산한다고 발표하죠. 그러자 바로 다음 날인 8월 23일 수카르노는 라디오 연설을 통해 전날 해산된 PETA와 Heiho 조직을 BKR 즉 국민치안단이라는 이름의 준군사조직으로 재규합한다고 발표합니다. 아직 단체에 불과했던 BKR이 TKR 즉 국민치안군이란 이름으로 정식 군대의 형태를 띄는 것은 그해 10월 5일의 일입니다. 그래서 10월 5일은 인도네시아 국군의 날, 즉 인도네시아군의 생일이 됩니다. 


그 TKR은 TRI, TNI, APRIS, APRI, ABRI를 거쳐 1999년부터 다시 TNI로 바뀌어 오늘날에 이릅니다.


하지만 한국의 국군의 날은 조금 다릅니다. 그날은 국군 창설일이 아니라 국군 3사단 23연대가 동부전전 양양지구에서 처음 38선을 돌파한 1950년 10월 1일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참고로 광복군이 중국 충칭(중경)에서 조직된 것은 1940년 9월 17일의 일입니다. 어쩌면 이날이 국군의 날로 더욱 적합한 날이 아닐까 감히 생각해 봅니다.


인도네시아 군에겐 또 하나의 중요한 날이 있습니다. 물론 일반인에게도 중요한 이날은 우리의 현충일에 해당하는 영웅의 날 11월 10일입니다. 이 날은 1945년 10월 27일부터 3주 남짓 계속되었던 영국군과 인도네시아군 사이의 수라바야 전투 중 그 전사상자가 가장 많이 발생했던 1945년 11월 10일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 11월 10일에 수라바야에선 많은 일이 벌어졌지만 그중 가장 특기할 만한 사항은 영국군으로 참전한 인디아사단의 무슬림 인도인 600명, 1개 대대 병력이 통째로 인도네시아 군에 전향한 것입니다. 그들은 알아후 악바르를 외치며 목숨을 던지는 인도네시아의 무슬림 전사들을 적으로 대할 수 없었던 것이죠. 그들 600명 중 대부분이 이 수라바야 전투에서 목숨을 잃었고 독립전쟁이 끝난 후 고향으로 돌아간 이들은 75명에 불과했습니다. 인도네시아의 영웅의 날은 그들까지를 포함한 인도네시아의 영웅들을 기리는 날입니다.


한편 한국의 현충일은 사뭇 추상적인 유교적 관념을 기반으로 6월 6일로 공표되었습니다.


자, 그래서 잘란 뻬따는 잘란 BKR로 이어지는 겁니다. 이건 충분한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한 것이죠.


한편 반둥 불바다 사건이 1946년 3월에 벌어지는 이는 다유꼴롯 마을에 있던 연합군 무기고를 폭파하면서 반둥의 남쪽 절반이 대화재에 휩쓸렸던 사건입니다.


당시 사진은 이 슬라이드에 나와 있는 저것 하나만 찾을 수 있었습니다. 공원에 세워진 기념탑도 불꽃모양을 재현한 것이고요.


무기고 폭파의 주역이었던 모하마드 또하와 모하마드 람단은 무기고 폭파의 유폭으로 흔적도 없이 날아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사진조차 남기지 못했습니다. 인터넷을 뒤지다 보면 저런 석고상과 초상화가 각각 모하마드 또하의 모습이라 주장하는데 이들이 전혀 다른 인상을 한 것은 둘 다 모하마드 또하가 이렇게 생기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력에 기반한 것임을 말해줍니다. 그나마 모하마드 람단은 상상력을 기반한 초상화조차도 없습니다.


그리하여 반둥의 모또하 거리와 모람단 거리가 이제야 의미를 가지고 다가오게 됩니다.


반둥불바다기념비 공원 북쪽의 이부 잉깃가르나시 도로는 한 여인을 기리는 도로입니다.


잉깃 가르나시는 수카르노 대통령의 두번째 부입니다.

그는 1888년생으로 1901년 생인 수카르노보다 13살이나 많았고 반둥공대 학생과 그 하숙집 주인으로 만나 결혼에 이르던 1923년, 수카르노는 22살, 잉깃은 35살이었습니다. 그녀는 수카르노와 결혼하기 위해 남편과 이혼을 불사했고 수카르노 역시 민족주의 지도자 쪼끄로아미노토의 딸이자 자신의 첫 아내였던 시티 우따리와 이혼을 불사했습니다. 민족영웅의 딸을 버리고 하숙집 여주인과 결혼하다니...


그렇게 두 사람이 결혼을 올리던 그해 수마트라의 벙꿀루에서 한 여인이 태어납니다. 그녀의 이름은 파트마와띠.

수카르노가 독립운동을 하다 네덜란드 총독부 경찰에게 체포되어 유배지를 전전하던 중 1937년 벙꿀루까지 가게 되었을 때 당시 15살이던 파트마와티와 만나 그들 사이의 로맨스가 불타오릅니다. 잉깃이 그 유배지까지 따라가 남편을 뒷바라지하고 있었는데요. 20년간 결혼생활을 이어왔던 잉깃은 새삼 아기를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수카르노에게 버람받았고 일본군이 진주한 후인 1943년 정식 이혼이 이루어집니다. 당시 이미 권세를 휘두르기 시작한 수카르노는 반둥의 한 집을 얻어 잉깃에게 주었고 잉깃은 1984년 죽을 때까지 그 집에서 살았습니다. 그녀의 집이 있던 그 길이 이제 그녀의 이름을 따 이부 잉깃 가르나시 거리가 되어 있습니다.


잠깐 수카르노의 여인들을 살펴볼까요?

수카르노는 평생 9번의 정식 결혼을 했는데 너무 많은 아내를 둔 관계로 그 가계를 살펴보는 과정엔 어쩔 수 없이 이런 도표가 등장합니다.

보는 바와 같이 9명중 4명이 자녀를 두었어요. 잉깃 가르나시는 양녀만을 둘 들였고요. 가장 훌륭한 영부인의 역할을 하며 수카르노의 임종까지 지켰던 여인은 네 번째 부인인 하르띠니였습니다. 


이 도표는 각 부인들의 결혼 기간을 보여줍니다. 가장 긴 결혼생활을 한 사람은 잉깃이었고 가장 아름다웠던 사람은 랏나 사리 데위와 유리끄 상어르였습니다. 1965년 9월 30일 쿠데타 이후 점차 몰락해 가던 중인 1966년에도 수카르노는 헬디 자파르라는 아홉 번째 부인을 들였습니다. 수카르노는 모든 여인들을 떠나고 말았지만 헬디 자파르는 그전에 먼저 수카르노를 떠난 유일한 여인이었어요.



 세계 언론에 가장 화려한 스캔들을 뿌렸던 여인은 다섯 번째 일본인 부인 네모토 나오꼬, 요즘 데위 수카르노, 또는 데위여사라 불리는 랏나 데위 사리 수카르노였습니다. 그녀는 일본을 국빈방문중이던 수카르노와 술집에서 만난 대학생 호스티스였는데 일본 정부가 수카르노의 취향을 알고 일부러 그렇게 맺어지도록 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녀는 넷째부인 하르띠니와 함께 1970년 수카르노의 임종시까지 부인의 지위를 유지했던 유일한 여인이었고 그 후에도, 그리고 지금까지 수많은 화제를 뿌리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트마와티가 수카르노의 부인으로서 가장 유명한 것은 그녀의 활동이 왕성했던 점도 있으나 자녀들의 덕이 컸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장녀 메가와띠는 인도네시아 제5대 대통령을 역임했고 지금도 인도네시아 민주투쟁당의 당수입니다. 그외에 숙마와띠 라크마와띠, 군뚜르 , 구루 등은 모두 정계와 예술계 등에서 나름대로 이름을 떨쳤습니다.


잉깃은 1888년에 태어사 1984년 9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납니다. 이상하게도 저 위의 표에서와 마찬가지로 가장 이상하게 나온 사진이 쓰이곤 합니다 하지만 그녀는 수카르노보다 연상이어서 빨리 노화되었을 뿐이지 젊은 시절의 그녀는 꽃처럼 아름다웠을 것이고 그래서 20대 초반의 수카르노가 30대 중반의 그녀에게 빠졌던 것이죠. 수카르노가 파란만장한 독립투쟁을 벌이며 유배지를 전전하던 시절 끝내 그의 곁에서 내조를 아끼지 않았던 잉깃 가르나시는 수카르노의 다른 어떤 부인들보다도 추앙받고 기념되어야 할 여인입니다.


그래서 인도네시아의 도로명을 토대로 기본적 상식을 얻게 되면 저 위 조선일보 이동휘기자가 쓴 것 같은 쓰레기 기사에 속지 않을 수 있게 됩니다. 


이제 본론에 도달했습니다.

이곳은 위자야 사거리 또는 뗀데안 사거리라 불리는 곳인데 이쪽이 깝뗀 뗀데안 거리, 앞쪽은 젖과 꿀이 흐르는 월떠르 몽인시디 거리, 왼쪽은 소반, 연합교회 등이 있는 위자야 거리, 오른쪽으로는 수리요 거리를 거쳐 면의 전설 있는 4거리에서 스노빠티 거리가 이어집니다.


노란색 부분이죠.

그 가까이로 까르따느가라거리, 빠띠무라거리, 뜨루노죠요 거리, 이스깐다르샤 거리, 구나와르만 거리, 쁘라빤짜 거리 등이 보입니다.


라덴 위자야는 싱아사리 왕국의 국왕 꺼르따느가라의 양자였습니다. 

때는 바야흐로 몽골의 쿠빌라이 칸이 대규모 군사를 동원해 자바섬을 정벌해 오던 시기였습니다. 꺼르따느가라 왕은 결전의 의지를 다지고 속국과 동맹국들의 군사를 모아 대항하려 했는데 싱아사리 왕국의 속국 끄디리왕국의 국왕 자야캇왕에게 암살을 당하며 싱아사리 왕국은 멸망하고 자바는 몽골군 앞에서 적전 분열합니다. 이떄 라덴 위자야는 마두라도 피신해 이를 갈며 와신상담합니다.


그가 선택한 것은 적의 앞잡이가 되어 몽골군을 이끌고 자바에 들어와 끄디리 왕국을 멸망시키며 복수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 뿐이었다면 그는 고구려가 멸망할 당시 당나라의 앞잡이가 되었던 연개소문의 아들 연남생과 다를 바 없었겠지만 승리를 거둔 후 전승축하 연회를 크게 열어 몽골군 장수들을 모두 초청한 후 그들을 모두 죽여버리고 맙니다. 몰래 준비해 놓은 군대를 동원해 방심하고 있던 몽골군 본진을 휩쓸자 큰 피해를 입은 몽골군은 타고 온 배로 피신해 먼바다로 나가 버렸고 결국 더 이상 자바섬을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민족의 영웅이 된 라덴 위자야는 마자빠힛 왕국을 세우고 그 시조가 됩니다. 저 위의 왕가의 족보에서처럼요.

저 족보 조금 아래쪽엔 아까 언급했던 하얌우룩 왕도 등장합니다. 마자빠힛 왕국은 이후 200년동안 번성하죠.


마자빠힛 왕국이 멸망한 후 들어선 빠장 왕국은 스노빠티라는 걸출한 인물에게 멸망합니다. 그의 본명은 수타위자야라고 하는데 그가 이긴 수많은 전투보다 남쪽 바다의 여왕 니롤로키둘과의 조우한 전설이 더욱 유명합니다. 거대한 영적능력을 가진 수타위자야가 명상에 잠길 때마다 영적 세계에는 엄청난 폭풍이 몰아쳤고 이를 견딜 수 없었던 마물들은 그들의 여왕인 니롤로키둘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수타위자야를 평정하기 위해 까랑 뜨리띠스 해안에 상륙한 그녀는 수타위자야를 보고 오히려 첫눈에 사랑에 빠져버립니다. 그래서 수타위자야가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하게 되죠. 수타위자야가 왕조를 세우는 것은 물론 그 후손들 모두를 도울 테니 더 이상 자바섬의 마물들을 괴롭히지 말아 달라고 말입니다. 이후 니롤로키둘은 수타위자야의 영적 아내가 되어 마타람 술탄왕국의 건설을 도왔고 마타람의 역대 왕들의 영적 아내라는 지위를 얻습니다. 


그래서 니롤로키둘을 보았다거나 만났다는 것은 그가 마타람 왕가의 후예이자 다음 왕위를 이을 적통이라는 의미를 담게 됩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니롤로키둘과 만났다고 주장을 하거나 넌지시 소문을 흘리게 되는 것이죠. 수카르노도 수하르토도 그들이 니롤로키둘을 만났다는 소문이 있었습니다. 그건 그들이 마타람의 왕통을 이어 자바를 다스릴 명분과 대의가 있다는 한 표현이기도 했습니다. 그녀를 만났다고 전해진 인물들 중에 디포네고로 왕자도 있습니다. 그는 네덜란드 총독부에 맞서 1825년부더 1830년까지 자바전쟁을 이끄는데 자바 민중이 술탄을 놔두고 디포네고로 왕자를 따랐던 많은 이유들 중엔 그녀가 니롤로키둘을 만난 마타람의 적통이라는 믿음도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디포네고로 전쟁에서 크게 밀린 네덜란드는 전비로 국고가 파탄지경에 이르고 동인도 전역에서 상대하던 반군들과 휴전을 맺고 그 군대를 자바로 들여와 디포네고로군과 싸워야 할 정도였습니다. 니롤로키둘은 자바의 역사, 마타람의 역사에서 매우 큰 의미를 갖습니다.


니롤로키둘은 바닷가에 나타난 멋진 남자들을 납치하고 자신이 즐겨입는 색인 녹색옷을 걸친 여인들을 물속에 끌어들여 익사시키는 질투의 화신으로 그려지지만 실제로는 자바섬 남쪽 바다에 거대한 마물들의 군대를 가진 강력한 제왕이기도 합니다. 그녀의 군대의 많은 장수들 중 총사령관에 해당하는 니블로롱은 여인의 모습을 한 거대한 이무기입니다. 보름이 다가올 수록 아름다운 미모가 빛을 발하지만 그믐이 다가오면 무시무시한 이무기의 모습으로 돌아가죠. 그녀는 병력모집책이기도 해서 민간에 나가 사람들을 현혹시켜 니롤로키둘의 군대로 끌어들입니다.물론 그 댓가가 주어지는데 그것이 인도네시아 주술에서 귀신들을 이용해 부를 얻는 뻐수기한의 주술 중 하나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다시 역사 이야기로 돌아갑시다.


로버트 월떠르 몽인시디는 미나하사 마나도 출신으로 1925년 생입니다. 그는 마카사르로 내려와 일제 강점기 당시에 일본어를 배워 일본어 교사로 일하던 중 독립전쟁에 참여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이 술라웨시는 네덜란드가 지배하는 곳이었으므로 그곳에서 무장독립운동을 하는 것은 일제강점기 당시 한반도에서 무장독립운동을 하는 것만큼 버거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1946년 한 차례 잡혔다가 8개월만에 탈출하지만 1949년에 또 다시 네덜란드에게 체포됩니다. 그는 모진 고문을 당하며 동료들을 밀고할 것과 이중간첩이 되어 독립운동조직을 통쨰로 넘길 것을 요구받았지만 그는 이를 기어이 거절하여 그해 9월 처형당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자바와 수마트라에서의 전쟁은 1949년 8월에 이미 휴전상태로 들어갔고 9월엔 헤이그 원탁회의에서 인도네시아의 독립조건을 협상하던 시기입니다. 그 결과 1949년 12월 27일 마침내 인도네시아의 주권이 이양되기에 이르죠. 하지만 술라웨시 마카사르에서 몽인시디는 주권이양 불과 2개월을 남기고 먼저 세상을 떠나고 만 것입니다.



그에 대한 자료는 매우 미미하고 어쩌면 그의 업적 역시 미미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적진 한 가운데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걸었던 몽인시디는 인도네시아의 영웅으로 추앙받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1939년 생인 삐에르 뗀데안의 어머니는 프랑스 혼혈입니다. 그래서 그는 훤칠한 서구적 마스크를 가진 미남으로 성장합니다. 

그는 1961년에 사관학교를 졸업해 소위로 임관한 후 1964년엔 말레이시아 대결국면에 전선에서 참전하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군사령관 나수티온 장군의 전속부관으로 일하게 되면서 1965년 9월 30일 공산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여섯 명의 다른 장성들과 함께 목숨을 잃게 되죠. 


9.30 쿠데타는 공산쿠데타로 규정되어 있지만 사실은 말레이시아와의 전쟁을 지지하는 소장파 군인들과 미국과 서방에 우호적인, 그래서 말레이시아와의 전쟁에 반대하거나 소극적이었던 반공 장성들 사이에서 벌어진 충돌입니다. 물론 이 두 세력은 제5의 군대 창설을 놓고도 날카롭게 대립했는데 이 제5의 군대는 농민들을 중심으로 한 노농적위대 성격의 것으로 중국이 '충' 브랜드의 소총 10만정을 공급하기로 되어 있었고 자신만의 사병을 가지고 싶었던 수카르노가 공산당 당수 아이딧을 통해 농민군 창설을 줄곧 주장했습니다. 군 수뇌부가 자기들이 통제할 수 없는 부대의 창설을 달가워할 리 없었죠. 그래서 이 쿠데타가 성공했다면 농민군이 구성되어 인도네시아 군부를 장악했을 테니 공산당이 가장 큰 수혜자가 될 터였습니다. 그래서 공산쿠데타라 불려도 전혀 틀린 말은 아닙니다. 


여기서 아흐맛 야니 중장, MT 하리요노 소장, 빤자이딴 준장 등은 체포과정에서 사살되고 수또요 준장, S 빠르만 소장, 수쁘랍토 소장 등은 연행되어 할림공항 가까이의 루방부아야라는 곳으로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한 끝에 살해당합니다.


육군사령관 아흐맛 야니 중장은 독립전쟁의 영웅이었고 수마트라 미낭까바우 지역의 PRRI 군사반란 진압작전을 이끈 사령관이기도 했습니다. 어딘가 신하균을 닮은 그는 1665년 10월 1일 새벽에 찾아온 대통령궁 경호부대 짜그라비라와 부대원들을 맞아 강제로 끌고 가려는 병사 한 명의 뺨을 갈기는 강단을 보입니다. 하지만 그는 이떄 아직도 쿠데타임을 인지하지 못하고 따라나서기 위해 옷을 갈아입으려 했죠. 하지만 그래서 문을 닫고 돌아선 그의 등 뒤에서 짜끄라비라와 부대원이 소총을 난사합니다. 그 흔적이 당시 그의 집을 개조해 만든 아흐맛 야니 박물관에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아흐맛 야니 장군은 등 뒤에 총탄을 맞고 그 자리에 쓰러져 숨을 거둡니다. 하지만 그의 시신은 짜끄라비라와 부대원들에 의해 루방부아야로 옮겨져 폐우물에 유기됩니다.


나수티온 장군은 당시 군의 최고사령관이었습니다. 그 역시 독립전쟁의 영웅이었고 독립전쟁이 끝날 무렵엔 자바섬 전체를 관장하는 자바 사령관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전군사령관이었던 TB 시마뚜빵 장군과 함께 일으킨 1952년 10월 17일 항명사건(포병을 동원해 국회의사당에 조준하는 등 무력시위를 함)으로 군복을 벗었다가 1955년 10월 27일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정치권의 선택에 의해 당시 사분오열하던 군을 봉합하기 위해 육군참모총장으로 다시 복귀하는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죠. 그의 집에도 1965년 10월 1일 새벽 짜끄라비라와 부대원들이 들이닥쳐 총격을 가했습니다.


나수티온은 급히 담을 넘어 옆집인 이라크 대사관 관저로 넘어가다가 발목이 부러지는 부상을 입습니다. 하지만 칠흙같은 나수티온의 저택에서는 계속적인 수색작업이 벌어지고 그 과정에서 나수티온의 막내딸 이르마의 척추가 반란군 병사의 총격에 의해 부서집니다. 나중에 병원에 옮겨진 이르마는 결국 며칠 후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밖에서 벌어진 소동에 놀라 권총을 들고 달려나온 뗀데안 중위는 바로 반란군들에게 사로잡힙니다. 어둠 속에서 그를 나수티온 장군으로 착각한 반란군은 그를 체포해 루방부아야로 철수합니다. 그것은 나수티온에겐 행운이었고 뗀데안에겐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는 루방부아야에 끌려가 다른 장성들과 함께 모진 고문과 모욕을 온몸으로 감수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장성들에게 전향서에 서명할 것을 강요했죠. 하지만 뗀데안 중위를 비롯한 다른 장성 3명은 모두 살해당했고 먼저 체포과정에서 사망한 다른 3명의 장성들과 함꼐 그 시신이 폐우물에 폐기되었습니다.

그 쿠데타는 10월 1일 날이 밝으면서 이미 망가지기 시작했습니다. 전략예비사령부의 수하르토 소장이 상황을 장악하면서 방송국과 주요거점들을 당일 탈환했고 10월 2일 아침에 반란군 본거지인 할림비행장으로 진입하면서 쿠데타는 막을 내렸습니다. 그날 수카르노는 할림 비행장에서 오마르 다니 공군사령관, 아이딧 공산당 당수 등을 대동하고서 여러 군지휘관들을 불러들여 명령을 내렸는데 진압군 사령관으로 나선 수하르토는 이를 모두 거부하였고 그의 기세에 밀린 수카르노는 진압군이 할림에 진입하기 전에 보고르궁으로 몸을 피합니다. 이때 랏나 데위 사리도 그를 동행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의 몰락의 시작이었습니다. 반란군을 완전히 진압한 수하르토는 곧 루방부아야에 폐우물에서 장성들과 뗀데안 중위의 시신을 수습해 성대한 장례식을 치렀습니다.



그 장례식에서 수카르노는 눈물을 흘렸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가 이 쿠데타에 연루되었을 것이라 의심했고 이는 결과적으로 그의 몰락으로 이어집니다. 그는 결국 1967년 대통령 직에서 밀려났고 오랜 연금생활 끝에 1970년 초라한 죽음을 맞게 됩니다.


쿠데타의 주역이었던 대통령 경호실의 운뚱 중령과, 말레이시아의 전쟁에서 최전선에 나가 싸우며 전쟁을 사보타지하는 군 수뇌부와 날카로운 각을 세웠던 수빠르죠 준장 등 여러 사람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방밤 수뻐노 소장도 몇 년간의 옥살이를 했고요. 하지만 이 쿠테타의 배후에 공산당과 중국이 있다는 주장으로 인도네시아 전역에서 공산당 사냥이 벌어졌습니다. 민간 이슬람단체들을 중심으로 진행된 이 인간사냥을 군이 눈감아주거나 적극적으로 지원했고 그 과정에서 적게는 50만명, 많게는 300만명에 이르는 공산당원, 화교 들이 처참하게 목숨을 잃었습니다. 인도네시아에서 벌어진 가장 처참한 학살극이었죠.


왼쪽 사진 뒷편에서 나수티온 장군의 가방을 들고오는 이가 뗀데안 중위입니다. 


오른쪽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뗀데안은 어린 시절부터 남 다른 미모를 가지고 있었어요. 

그리고 그는 아름다운 루크미니와 사랑을 나누며 미래를 설계하고 있었습니다. 그럴 즈음에 9.30 쿠데타가 벌어진 것입니다. 

전도양양한 젊은 초급장교는 루방부아야에서 반란군에게 처참하게 살해당했고 그것은 루크미니의 미래도 산산조각 내버리고 말았습니다 뗀데안 중위는 이제 더이상 그녀의 품 속이 아니라 인도네시아인들의 마음 속에 묻혔습니다.


그의 시신은 깔리바타의 영웅묘지에 함께 살해당한 장성들과 나란히 안장되었습니다. 무슬림 장군들은 무슬림 묘역에 개신교와 천주교 장군들과 뗀데안 중위는 기독교 묘역에 묻혔습니다. 그들은 모두 일계급 특진되었고 뗀데안 중위 역시 대위로 추서되었습니다. 잘란 깝뗀 뗀데안은 뗀데안 대위를 기념하는 도로입니다.


그들이 살해당해 시신이 유기되었던 루방부아야는 이제 박물관으로 변모해 있습니다. 그들이 버려졌던 폐우물 앞에는 이런 동상들과 부조작품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오른쪽 맨 뒤의 인물이 덴데안 대위입니다. 부조물 우측에는 쿠데타 진압을 지휘하는 수하르토 소장의 모습도 보입니다.


그래서 이제 위자야 사거리/뗀데안 사거리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고 다가오게 됩니다.


저 차량행렬들이 모두 사라진 깊은 밤 700년의 시간이 충돌하는 저 사거리엔 저렇게 차원의 문이 열리며 라덴 위자야와 권능왕 스노빠티, 전사 몽인시디와 뗀데안 중위가 걸어나와 서로에게 미소지으며 서로의 노고를 치하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위자야 사거리 인근의 도로들을 자세히 다룰 시간은 없을 듯합니다.

그래도 간단히 설명하자면 

구나와르만은 불교를 인도네시아에 전파한 선교사이고 

빠띠무라는 암본에서 1811년대 영국군에 입대했다가 1816년 영국군이 물러나도 다시 네덜란드가 들어오자 전역시켜 주지 않는 네덜란드에 저항해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켰던 인물입니다. 그는 인도네시아 국가영웅으로 지정되죠.

음뿌 쁘라빤짜는 마자빠힛 왕국의 문인입니다.

그리고 뜨루노조요는 마두라의 왕자로 마타람 왕국의 후신인 까르타수라 왕국의 술탄 아망꾸랏 1세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켜 수도인 쁠레렛을 함락시켰고 아망꾸랏 1세는 피난중에 죽게 되죠. 그의 절친이었던 아디빠티 아놈, 즉 까스타수라의 태자는 마침내 뜨루노죠요에게 칼을 겨눕니다. 결국 네덜란드군에게 사로잡히고 만 뜨루노죠요는 아망꾸랏 2세가 되어 왕좌에 앉은 친구 앞에 끌려나왔다가 끄리스 단검에 몸을 꿰뚤려 죽게 되죠.


언젠가 이들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다룰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지도에 보이는 곳은 멘뗑지역입니다. 오른쪽 위로 아리아주타 호텔이 보이죠. 오른쪽으로 쭉 진행하면 뀌땅 도로를 지나 스넨 시장 사거리를 지나게 됩니다. 

가운데 뚜구 따니라고 표시된 곳 위엔 아리프 라흐만 하킴 도로가 지나고 그 밑에는 쁘라주릿 KKO 우스만 단 하룬 도로가 지납니다. 


1943년 생이었던 아리프 라흐맛 하킴은 1966년 2월 24일 년 수카르노 퇴진 시위에 앞장섰다가 경찰군의 발포로 목숨을 잃은 학생입니다. 당시 나이 23살이었습니다. 그는 곧 순교의 아이콘이 되어 수카르노를 하야시키는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됩니다.


하룬 또히르와 우스만 자나틴은 해병대의 전신인 KKO 소속 병사로 말레이시아와의 전쟁이 한창이던 시절 싱가폴에 침투에 1965년 3월 오늘날 맥도날드하우스라 알려진 홍콩 샹하이 뱅크를 폭파한 이들입니다. 공비이자 테러범인 셈이죠. 하지만 인도네시아 입장에서는 적국에 침투해 목숨을 걸고 임무를 완수한 영웅들입니다. 쁘라주릿 KKO 우스만 단 하룬은 이 두 해병대 병사를 기념하는 도로입니다. 그들은 말레이시아 대결정책이 종식되고 그들을 침투시킨 수카르노도 하야하고 난 1968년 10월 싱가폴에서 교수형으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당시 맥도널드 하우스의 폭탄 테러로 6명이 사망하고 33명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하룬과 우스만은 해상으로 탈출하려 했으나 그들의 탈출정이 고장내 싱가폴 군에게 체포되었다가 19


이 두 도로에 둘러쌓인 공원에는 뚜구따니라는 동상이 서있습니다. 막 독립전쟁에 출정하려고 칼날같은 결의를 보이는 농민군 청년과 그에게 음식을 먹여 보내려는 어머니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아들은 돌아오지 못하기 쉬운 길을 떠나면서 차마 어머니의 얼굴을 마주 보지 못하고 외면하지만 어머니가 내민 접시의 삶은 감자 한 개를 못이기는 척 집어들고 있습니다. 이 동상은 농민상, 또는 영웅동상이라 불리며 독립전쟁에 참전하려 떠나는 농민군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동안 몇 번씩이나 폐기될 위험을 겪기도 했습니다.


이 동상은 당시 소련 예술아카데미 부원장이던 마트베이 겐리코비치 마니저가 제작해 1963년 소련과 인도네시아의 우애의 상징으로 전달된 것입니다. 당연하게도 동상은 소비에트의 예술기법을 따랐고 공산주의 정서가 가득합니다. 그래서 9.30 사태가 터지고 그 배후에 공산당과 중국공산당이 있다고 알려지자 역시 공산주의자가 만든 이 동상은 그 사상적 배경때문에 여러 번 끌어내려질 위기를 겪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 영웅상은 인도네시아인들의 독립정식을 극명하게 나타내는 조형물 중 하나인 것이 분명했으므로 오늘날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그 동상의 받침대엔 수카르노가 이런 문구를 붙였습니다. 

자기 영웅들을 존중하는 민족만이 위대한 민족이 될 것이다. 

이것은 지금까지 설명한 인도네시아의 영웅들을 인도네시아인들과 정부가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를 가장 극명하게 나타내는 문구입니다.

인도네시아는 극진한 태도로 자신들의 영웅들을 기억하고 기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분명 우리가 본받아야 할 부분입니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인도네시아는 우리가 아는 만큼만 우리에게 문을 열어줄 것입니다.


긴 시간 강의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2018. 11.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