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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질의 세계

beautician 2018. 3. 23. 12:47

 

 

어린 시절 TV로 즐겨보던 디즈니랜드에서는 프로그램 초입에 오늘은 어떤 테마의 이야기인지를 보여주었습니다. 

거기엔 동물의 세계, 모험의 세계, 과학의 세계 등등 여러 장르가 있었고 그 각각의 테마들이 흥미롭고 재미있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나이들고 나서 들어가게 된 것은 모험의 세계도 과학의 세계도 아닌 '갑질의 세계'였습니다.

어느 사회에나 권력이 발생하고 그로 인해 지배자(갑)과 피지배자(을)이 생기기 마련인 것이죠. 그래서 학생(을)들은 선생(갑)들에게 구타당하거나 모욕당하기 일쑤였고 병사(을)들은 장교(갑)들에게 쪼인트 맞고 ROTC 1년차들(을)은 ROTC 2년차(갑)들에게 걷어차이고 직원(을)들은 차장 부장 이사 등 상사들(갑)에게 설설 기어야 했던 것입니다. 최근 한국사회에 불어닥친 미투 열풍이 조명하는 직장, 업계, 가정 내의의 성추행, 성폭력들도 사실은 그런 갑질의 세계의 한 모퉁이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이었습니다.

 

인도네시아에 왔을 때 한국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갑질의 세계가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을도 뭔가 자기 얘기를 할 수 있는 곳이 한국의 갑질의 세계였다면 인도네시아는 좀 더 갑들이 을의 입 위에 엉덩이를 철퍼덕 깔고 앉아 있는 좀 더 심각한 형국이었습니다. 물론 그건 주로 공권력이 민원인들에게 보이던 모습이었는데 장기간 현지사회에 침전되어 켜켜히 쌓인 갑질의 문화는 민간 사회에서도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선사에서 B/L 선하증권 먼저 받으려면 돈을 찔러 넣어야 하던 시절도 있었고 회사에서 사장의 총애를 받는 경리과 직원이 과장 차장 부장으로 이어지는 조직서열을 다 무시하고 부사장처럼 콧대를 세우며 이것저것 지시하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습니다. 결국 큰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크게 갑질하는 건 그럴 수 있다 치더라도(물론 그래도 된다는 건 아닙니다만) 쥐꼬리만한 작은 권력이라도 가진 사람은 그 권력조차도 100%, 1,000% 휘두른다는 것을 자카르타에서 수없이 보았습니다. 물론 자카르타만 그럴 리는 없습니다.

 

최근 주거지 증명서를 떼면서도 그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첫 KITAS를 내는 사람은 여러 구비서류들 중 내야하는 거주지 증명서를 Domisili Gedung 이라 부르는, 아파트 관리사무실에서 발급해 주는 서류만 내면 됩니다. 물론 연장하는 사람들은 그 Domisili Gedung을 기준하여 RT, RW 등 통,반장의 단계를 밟아 서명을 받은 후 최종적으로 Lurah라 부르는 동/면사무소장의 도장이 찍힌 Domisili Kelurahan까지 발급받아야 합니다. 

물론 거주지 증명은 꼭 KITAS를 내기 위한 것만은 아닙니다. 많은 용도로 쓰이는 이 서류는 한국의 인감증명서처럼 어떤 용도에 쓸 것인지 미리 적어 신청해야 하죠.

 

하지만 기본적으로 아파트 관리사무실이 떼어주는 거주지 증명서는 내가 그곳에 산다는 증명이니 구비서류로서 내 여권 사본, 임대계약서 사본(만약 내 집이면 소유증이나 최종 재산세 PBB 납부증명 같은 것)을 내면 됩니다. 그러면 관리사무실에 서류를 발급해 주는데 그것도 권력이라 

1. 관리비나 전기세 밀린 게 있다면 그걸 우선 다 결재해야 하고

2. 매니저가 와서 서명해 주면 몇 분, 최대 반나절이면 끝날 일이지만 3~7일 정도 후에 찾으러 오라 합니다.

뭐, 이 정도는 애교로 봐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거주지 증명서를 내주는 데에도 정말 갑질이 시작되면 이렇게 됩니다.
1. 우선 집주인 동의서를 받아오라 합니다. 임대계약을 하는 시점에서 집주인의 동의는 이미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집주인의 서면동의가 없으면 절대 거주지 증명을 내주지 않는 곳이 있습니다. 집주인의 KTP 사본도 달라 합니다. 뭐, 좋게 생각하려면 서류 위조를 방지하려는 거라고 이해해 줄 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동의서를 받으라는 시점에서 갑질은 시작되는 겁니다.
2. 용도상 KITAS 연장용 또는 IMTA 연장용이라 하면 KITAS와 IMTA 사본을 첨부하라 합니다. 그걸 건물 관리사무실이 확인해야 할 필요가 뭐 있을까요? 어차피 용도에 그렇게 써놓으면 그 거주지 증명서를 다른 용도로 사용하지 못하는데 말입니다.
3. 거기다가 그렇게 근로허가를 받은 사람이 신청하는 게 분명해 지면 재직증명서를 떼어 오라 합니다. 그러니 회사에 근무하지 않는 사람은 거주지 증명서를 떼지 못하는 상황까지 벌어집니다. 직장이 없으면 아파트에 살아서는 안된다는 논리가 되는 겁니다.
이것 외에도 매번 별도의 신청서를 써야 하고 매번 거주민 카드라는 것에 사진을 붙여 첨부해야 합니다.관공서에서 뭐 하나 서류 떼거나 허가 받으려면 온갖 서류들을 요청하는 것은 그들이 천상 공무원들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일반 아파트에서 관리사무실이 거주지 증명서 한 장 떼어 주겠다며 저런 서류들을 요구하는 건 정말 가관이라 하겠습니다.
자카르타 남부의 멋진 아파트에 사는 분들은 저게 어느 나라 얘기냐 할지 모릅니다.하지만 이렇게 해서 서류를 제출한 후 일주일이나 열흘 쯤 후에나 거주지 증명서를 내주는 아파트들이 자카르타엔 수두룩 합니다.
특히 끌라빠가딩 모이에 한 번 살아보시면 이런 갑질의 세계를 온 몸으로 경험하실 수 있습니다.

2018. 3.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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