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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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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자카르타에서 사는 법

beautician 2017. 7. 21. 11:54

[단편] 자카르타에서 사는 법

 


파산 후 2.

망가져버린 사업의 재건을 위해 쏟아 부었던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남아 있던 불씨들마저 모조리 꺼져 가고 있었다. 인도네시아로 이주한 이후 처음 마주하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파산으로 바닥을 쳤다고 생각했으나 끝도 보이지 않는 시커먼 절망이 그 후에도 그렇게 다시 찾아왔다. 난 이 세상을 자존심만으로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비로서 깨닫고 말았다. 사업을 통해 출구를 찾을 수 없다면 이젠 허리를 한껏 굽혀 어딘가에서 월급쟁이가 되어야 했다.



그러나 외국에서 현지취업이란 그 선택의 폭이 너무나도 좁았다. 더욱이 막 40을 넘긴 내 나이는 대부분 회사들의 채용요건을 벗어나 있었다. 그러다가 꼬린타마라는 반둥의 한 봉제공장을 만난 것은 교민사이트의 구인광고를 통해서였다. 자카르타에도 꽤 이름이 알려진 큰 의류공장이었다. 이력서를 보냈는데 면접 보러 오라는 회신이 온 것이다.

 

, 우리랑 일하면 밥 굶을 일은 없을 거요.”

윤사장은 몇 년 전 반둥 한인회장까지 역임한 바 있는 한인사회의 거물이었다. 그는 사장실에서 김부장이란 험악한 인상의 남자를 보디가드처럼 뒤에 세워놓고 나를 면접했는데 그가 나를 파악하는 동안 나 역시 그의 생각을 읽고 말았다. 내게 뭔가 특별한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의 생각이 말투에 고스란히 묻어 나왔기 때문이었다. 네가 오죽하면 반둥까지 밀려와 내 밑에서 일하려 하겠니?

나는 정곡을 찔린 듯 움찔 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처음 대기업 현지법인장 내정자로 부임하면서 어떤 조건을 누렸는지, 과거 원목바닥재 사업으로 파산하기 전까지 얼마나 승승장구했는지는 이제 아무 의미도 없는 가련한 이력일 뿐이었다.

월급은 1,700불이요. 그 이상은 어림도 없소. 영어라도 좀 하니 그 만큼 주는 것이요. 요즘 같이 시기에 그렇게 주는 공장도 우리 밖에 없을 거요.”

내가 오래 전 인도네시아에서 받은 첫 월급에도 미치지 못하는 금액이었다. 이제 그 월급에 목을 매고 아이들 학비와 생활비를 감당하면서 빚도 갚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했다. 자카르타의 아파트 임대기간은 거의 끝나가는 중이었고 학비를 내지 못한 아이들은 중간고사도 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니 자존심에 대못을 박는 그 1,700불이라는 월급은 그나마 늪 속으로 더 이상 빠져들지 않기 위해 반드시 잡아야 하는 마지막 지푸라기 같은 것이었고 그마저 놔버리면 이제 바닥도 없는 늪 속으로 끝없이 빨려 드는 일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윤사장의 입가에 미소가 떠오른 것은 나의 그런 절박함을 꿰뚫어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넌 절대 거절 못해.

 그리고 직함은…, 우리 장과장 밑이니 대리부터 시작하시오.”

치욕적이지만 그 역시 거절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한번의 면접으로 내 자존심은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내 인생의 추락이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슬펐고 그런 나로 인해 앞으로 오랫동안 고생하게 될 아내와 아이들 생각에 가슴이 미어졌다. 그러나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난 모든 것을 팔아 빚을 갚던 중이었고 막판엔 아이들 통학용 차량까지 팔아야 했다. 형제처럼 가까웠던 친구들, 선후배들이 이제는 내가 테러범이라도 되는 듯 멀찍이 안전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난 어떤 악조건이라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막장 앞에 서 있었다.

 

세부적인 조율을 위해 몇 번 더 반둥에 갔을 때에도 윤사장은 한 치도 물러서 주지 않았다.

가족들 다 데리고 와요. 반둥도 살만 해요.”

처음 면접을 갔을 때 자신의 호화로운 주택을 보여 주며 환상적인 근무조건을 설명하던 그는 정작 내 채용을 결정한 후엔 내가 살 집에 대해 모호한 태도를 보였다. 그가 장과장을 시켜 보여준 집들은 현지인들도 고개를 설레설레 저을 형편없는 것들뿐이었다. 그런데 그때 장과장은 왜 그렇게 기쁜 듯 들떠 있었을까?

아이들의 학교문제는 좀 더 복잡했다. 당시 아이들은 북부자카르타 끄마요란에 소재한 인디아계 간디스쿨을 다녔는데 북한을 포함한 제3세계국가 외교관 자녀들이 다니는 정규 국제학교인데도 학비는 현저히 저렴했다. 더욱이 난 학교에 몇 차례 청원서를 넣어 아이들이 졸업할 때까지의 등록금 상당액의 감면과 분할납부까지 승인 받은 상태였는데 반둥으로 이주해 학교를 옮긴다면 그 모든 혜택을 포기해야만 했다.

자녀학자금을 지원해 주지도 않는 윤사장이 내게 그런 손해와 열악한 조건들을 감수하고서라도 가족들을 데려오라는 이유는 뻔한 것이었다.

가족들을 안 데려온다는 건 마음이 안 따라온다는 얘긴데…, 그럼 제대로 일을 할 수가 없어요. 여러 소리 말고 가족들 다 데리고 이사 와요.”

그는 내 가족들을 담보로 잡아두고 싶어 했다.

 

반둥 이주를 사흘 앞두고 나는 수만 갈래로 흩어지는 마음의 가닥을 잡지 못해 방황하고 있었다. 채용조건을 알고 상심한 아내는 집에서도 입을 닫아버리고 말았다. 난 백방으로 자카르타의 다른 일자리를 찾으려 애썼지만 모두 허사였다. 이력서 상 화려한 마케팅 경력을 가진 나는 호황기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팔방미인이었지만 반대로 불황이 찾아왔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굳이 내가 아닌 누구라도 할 수 일이란 의미이기도 했다. 나는 엔지니어가 되지 못한 것, 경쟁력 있는 고급기술 하나 배우지 못한 채 인생을 허비하고 만 현실이 원통했다.

 

꼬린타마의 석연찮은 상황들도 마음 한편을 짓누르고 있었다.

거대한 공장의 일부만 돌아가고 있던 꼬린타마는 영광스러운, 그러나 마침내 몰락해가는 제국과 같은 인상을 주었다. 주력 바이어가 발주를 중단하면서 꼬린타마는 가동률이 급감하는 위기를 맞았고, 그래서 윤사장은 구인광고를 내고 단기간 내에 대체 바이어를 개발해낼 세 개의 해외영업팀을 구축하려 했다. 난 그 해외영업팀장들 중 한 명으로 채용된 것이다. 다른 두 명은 인디아인들이었다. 우린 이제 온-오프라인에서 전투적인 수주영업을 시작해 유럽과 미주 거래선들을 찾아 분주히 날아다녀야 할 판이었다. 그러나 그 요원들을 선발하면서 꼬린타마는 지나치게 인색을 떨고 있었다. 그들이 내게 마지막으로 보여준 집은 이사짐이 다 들어가지 못할, 채 열 평도 안되는 곳이었다.

? 이런 데서는 못살아요? 그 형편에 애가 둘이나 되니 그런 거잖아요.”

뭐가 그리 즐거운지 들떠 깐죽거리던 장과장은 분명 그 순간을 즐기고 있었다. 그런 곳에 내 가족들을 던져 놓는다는 생각에 가슴이 찢어졌다. 그것은 당시 윤사장의 이중적 마음가짐을 대변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는 위기의 효과적 타개보다는 비용절감에 무게를 두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보면 꼭 그런 것만도 아니었다. 윤사장의 생활은 여전히 호화의 극치를 달렸고 틈만 나면 김부장과 함께 엽총을 들고 사냥을 다녔다. 공장이 망하면 가장 큰 손해를 보게 될 사람인데도 윤사장에게선 왠지 공장을 살려내겠다는 진심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반둥행이 더욱 내키지 않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저 앞에 막다른 골목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그러나 유턴도 할 수 없는 좁디 좁은 일방통행도로로 나는 이제 가족들 손까지 잡아 끌며 막 들어서려 하고 있었다.

 

전에 우리 공장에 면접 왔었지? 내일 아침 일찍 좀 와 줄 수 있겠나?”

 

밤 아홉 시가 넘은 시각. 아파트단지 1층 계단에 앉아 하염없이 줄담배를 피우고 있을 때 빠룽 소재 봉제공장의 안이사라는 사람이 전화기 건너편에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지난 주 면접에서 퇴짜를 맞은 곳이었다. 내 머리 속 어딘가에서 오래 전 꺼져 버린 희망의 신호등이 다시 깜빡거리며 점멸하기 시작했다. 다음날 찾아간 그 공장은 갑자기 영업부장 결원이 생겼다고 했다.

내일부터라도 출근하세요. 살 집은 당장 오늘이라도 알아 볼 수 있을 거요.”

안이사가 배석한 자리에서 내 이력서를 다시 훑어보던 이사장이 그렇게 말했다. 비대한 체격과 대체로 시뻘건 낯빛이 사뭇 위압적이던 이사장은 얘기할 때면 끊임없이 눈동자를 굴리며 어딘가 불안한 느낌을 주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가 제시한 월급 3천불과 주택, 비자를 회사가 제공하는 조건에 난 감지덕지 했다. 굶주린 늑대들에게 둘러 쌓인 허허벌판에서 하늘로부터 내려온 동아줄이었다. 안이사는 그날로 자카르타 남부 르박불루스에 우리 가족들이 살 주택을 구해 주었다. 아이들이 아직 간디스쿨을 통학할 수 있는 거리이기도 했다. 모든 것이 순식간에 진행되면서 실로 오랜만에 아내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꼬린타마와의 인연은 거기까지였다. 그들은 내가 나타나지 않았음에도 달리 연락을 해오지 않았다. 그토록 회유했으면서도 사실은 내게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던 것인지 모른다. 그로부터 1년 후 꼬린타마는 엄청난 부도를 내고 인도네시아 경제지도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대체 바이어 개발에 실패해 결국 공장을 더 이상 돌릴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별다른 도전 없이 장기간 직장을 지배해 온 관리자 집단의 매너리즘은 이미 한계에 도달해 있었다. 윤사장은 한국으로 야반도주했지만 공장의 도산을 오래 전부터 계획하고 준비했을 그가 치명적 타격을 입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만일 그때 내가 합류했다면 나와 내 가족들은 다시는 일어설 수 없는 치명상을 입었을 것이다. 물론 그런 꼬린타마의 운명을 르박불루스로 달려가던 당시의 나로서는 전혀 예측조차 할 수 없었다.

 

이사장의 빠룽공장은 봉제의류 하청전문공장이었다. 업계에서의 위상은 물론 규모나 설비 면에서도 꼬린타마에 비할 바 되지 못됐고 평판도 그리 좋지 않았지만 나름대로 연조가 깊은 공장들 중 하나였다. 대미 쿼타제도가 폐지되고, 중국을 이탈한 바이어들이 인도네시아로 몰려들던 시절, 정작 현지 봉제공장들은 그간 경제위기로 인해 줄줄이 도산했으므로 살아남은 공장들은 그 희소성으로 인해 일감이 넘쳐나고 있었다. 당연히 이사장의 공장도 고공순항하고 있었다.

 

  “이차장 그 녀석은 술만 마시면 깽판 치는 게 문제였어. 그걸 도저히 고칠 수 없었나 봐. 술 마신 다음 날은 나타나지 않기 일쑤였거든. 그러더니 이번엔 영영 돌아오지 않고 만 거야” 

현장 건물 2층 쪽방을 사무실로 쓰던 생산담당 권상무가 내 전임자였다는 이차장에 대해 한 말이었다.

“회사에서 빌린 돈도 있고 업무인수인계도 해야 하니 언젠가 한번 나타나긴 하겠지. 첫날부터 무리하지 말고 천천히 업무파악부터 하라구. 

권상무는 찔릉시 지역의 자기 공장이 송사에 휘말려 문을 닫은 후 잠시 이사장에게 의탁할 생각이었지만 그 쪽방에서 와신상담하며 재기를 꿈꾼 것이 벌써 8년째라고 했다. 그는 이사장에게서 벗어날 타이밍을 이미 놓친 듯 했다

 

예상치도 못한 일은 드라마의 반전처럼 찾아왔다.

“새로 오셨군요. 안녕하세요?

첫 출근을 한 지 사흘 째 되던 날, 말로만 들었던 그 이차장이 공장에 나타났다. 평판과는 달리 훤칠한 키에 서글서글한 눈매를 가진 남자였다.

“석이 이 자식! 너 이리 와!!

“아이고, 사장님, 고정하세요. 혈압 조심하셔야죠. 혈압.

 눈을 부라리는 이사장에게 이차장은 넉살 좋게 매달리며 사장실로 따라 들어 갔다. 고함소리가 터져나올 것이란 예상과는 달리 사장실에선 웃음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잠시 후 유쾌한 표정으로 방을 나온 이사장은 내가 앉은 자리가 원래 이차장 것이라며 내게 다른 책상으로 옮기라고 했다. 이차장은 내게 빙긋 눈인사를 하더니 직원들을 불러 자재상황을 묻기 시작했다. 나는 혼란스러웠다. 저 친구가 그만둬서 내가 들어온 것인데 말이다.

 

“이사장, 그 인간이 원래 그래. 살살 아부하면 어쩔 줄 모르고 좋아하거든. 이차장도 그래. 저렇게 다시 기어들어온 게 벌써 몇 번 째야? 다음 주면 분명히 또 한 바탕 하고 나갈 테니 당신은 나만 믿고 있어. 

안이사가 그렇게 말했지만 난 가시방석에 앉은 심정이었다. 게다가 안이사는 불과 몇 개월 전 자카르타 시내에서 운영하던 보신탕집을 막 폐업하고 공장에 합류한 사람이었다. 이사장의 매제였기에 이사 타이틀을 달았지만 사실상 공장운영에 대한 아무 실권도 없는 그를 믿고 줄을 서기엔 전혀 미덥지 않았다. 더욱이 빠룽공장 영업부장의 일은 인건비 비싼 한국인 매니저 두 사람이 나누어 할만한 분량도 아니었다. 그래서 이차장이 돌아온 후 내 입지는 크게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달 말, 우려했던 일이 실제로 벌어지고 말았다. 월급날이었다

“당신은 1,500불만 받아.

“네…? 

약속한 월급이 3천불인데 이사장은 1,500불이 든 봉투를 아무렇게나 사장실 탁자 위에 던져 놓으며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럼 나머지는 언제쯤…? 

그러자 이사장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위아래를 훑어 보더니 부산스럽게 좌우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그가 억지를 쓸 때마다 하는 행동이었다.

“당신은 도 없어? 이차장이 나간다고 해서 당신 채용한 거야. 근데 쟤가 계속 일한다잖아? 다른 사람들 같으면 일찌감치 상황 눈치채고 처신했을 텐데 당신 계속 붙어있는 거 보니 눈치가 심하게 없든가 정말 살기 어려운 모양이지? 그러니 1,500불이라도 주는 거야. 일할 거면 그거라도 받고, 아니면 나가서 따로 살 길 찾으라구. 당신 나이에 꼭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먹어 봐야 알겠어? 

난 숨이 턱 막혀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이사장은 여전히 두리번거리면서 장황하게 말을 이어 갔지만 내 귀엔 더 이상 아무 말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내가 치를 떨던 꼬린타마의 조건보다도 훨씬 못한 돈을 흔들며 장사치처럼 내 몸값에 흥정을 걸고 있었다. 금전적으로 절박하다는 약점이 노출되는 순간, 사람들은 도움의 손길을 내밀긴커녕 오히려 그 약점을 더욱 짓쳐 들어온다는 사실을 파산 후 사무치도록 경험하고서도 난 그걸 잠시 잊었던 것이다. 반둥에서 빠룽으로 방향을 바꾼 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을 잡은 것이 아니라 늑대를 피해 범굴로 뛰어든 것이었다.  

“그러게 내가 얘기했잖아? 왜 다른 소리를 하고 그래? 

사장실 소파에 앉아있던 안이사는 마치 자기가 미리 설명했는데도 내가 억지를 쓰고 있는 것처럼 짐짓 나를 나무랐다. 이런 일이 실제로, 그것도 나에게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사장실을 나왔을 때 우연히 눈이 마주친 이차장이 빙긋 미소 짓는 모습을 보고 난 결국 속이 뒤집어지고 말았다. 화장실에서 그날 먹은 것을 모두 토해내고도 계속 치밀어 오르는 욕지기를 참을 수 없었다.

일말의 자존심을 지키려 했다면 난 그 1,500불을 이사장 얼굴에 흩뿌리며 공장을 박차고 나왔어야만 했다. 그러나 가족을 부양하려면 그 1,500불이나마 없어서는 안될 돈이었다. 반둥으로 돌아갈 문도 이미 굳게 닫혀 있었다. 이번에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반전은 또 다시 찾아 왔다. 이차장은 평소와 달리 그간 결근도 지각도 하지 않았다. 늘 빙글빙글 웃고 있었지만 나의 존재가 그에게도 경종을 울린 것이다. 그러나 그날 월급을 받은 후 그는 또다시 무단결근을 시작했다. 그리고 이번엔 정말 돌아오지 않았다. 그가 지난 달에 결근하던 동안 찌비농 인근 어딘가에 작은 티셔츠 공장을 차렸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그 후의 일이었다. 그는 다시 출근한 후 영업하러 외출한다면서 사실은 자기 공장에 가서 일을 봤던 것이다. 이사장이 나를 가지고 논 것처럼 이차장도 이사장을 그렇게 가지고 놀았다.

이사장은 이차장의 배신에 분을 참지 못해 허공에다 고래고래 욕을 해대더니 다음 날 나를 불러 월급을 2천불로 올려주겠다고 제의해 왔다. 지난 며칠간 내가 빨리 나가 주길 바라며 그토록 함부로 굴고서 말이다.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그의 얄팍한 속내는 이미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출근할 때마다 나는 똥물이 쏟아져 내릴 것이 뻔한 하수구에 아무 장비도 없이 기어들어가는 듯한 느낌에 휩싸이곤 했다. 이사장과 일하는 것은 돈을 더 준다고 한번 재고해 볼만한 일이 아니라 대안만 있다면 어떻게든 신속히 빠져나가야 할 덫이었다.

이사장은 그 후 매달 조금씩 월급을 올려 주었지만 애당초 약속했던 3천불에는 끝내 미치지 않았다. 월급날마다 그 월급봉투를 이사장 입에 구겨 처넣어 버리고 싶은 충동을 애써 참아야 했다. 내 공장생활은 그 후 당연히 지옥 같았다.

 

“저 새끼들, 사람 깔보고 함부로 하더니 그게 수습이 되냐, 절대 안되지. 

쪽방에 난 작은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며 권상무가 혀를 끌끌 차고 있었다. 그날 이후 안이사는 나와 마주치는 것을 극도로 피했고 이사장은 이런저런 호의를 베풀며 온갖 생색을 냈는데 권상무의 그 말은 묘하게 전개되어 버린 내 상황을 얘기하는 것인지, 일정한 월급도 없이 이사장이 던져주는 용돈으로 근근이 살아가던 자신을 빗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오랜 시름을 담은 권상무 눈가의 깊은 주름을 보면서 이곳에 오래 머물면 언젠가 나도 저런 주름을 달게 될 것이란 생각도 들었다.

 

원청업체가 모든 자재를 넣어주는 하청오더와 달리 원단부터 단추 한 개, 라벨 한 장까지 직접 수배해야 하는 직수출오더를 진행하면서 나는 또 다른 문제에 부딪혀야 했다.

 “뭐, 이사장네 공장? 나 그 놈이랑 거래 안 해. 잘 모르는 모양인데 그 놈한테 자재대금 제대로 받은 놈이 없어요. 거기서 일하던 한국 애들 왜 다 그만뒀는지 몰라? 이사장 그 놈, 자재 값 안주는 놈이야. 다시는 전화도 하지 마! 

자재업체들은 하나같이 대금을 떼일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아직 거래 중이던 몇몇 업체들은 공통적으로 적게는 수백 불, 많게는 수만 불씩 미결재액이 남아 있었다. 자재공급을 거절하면 밀린 대금을 떼일 판이었던 것이다.

“돈이 없긴 왜 없어? 주기 싫어서 안주는 거지. 요즘 봉제공장 해서 이사장만큼 돈 버는 놈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자재대금 결재문제로 고민하던 나에게 잦은 야근으로 눈이 새빨갛게 충혈된 권상무가 그렇게 얘기했다. 사실 이사장이 돈을 갈퀴로 긁고 있는 것은 나도 봐서 알고 있던 일이었다.

 

“권상무. 원청업체에 원단 소요량 부족하니 한 3천 야드 더 넣어달라고 해. 안감이나 라벨, 단추도 불량 많아서 일 못하겠다 하란 말이야. 장사 하루 이틀 해? 그래야 한 천 장 더 만들 거 아냐?

하청오더를 받을 때면 이사장은 늘 그렇게 닦달해서 자재비 한 푼도 들이지 않고 몰래 만든 유명브랜드의 제품재고들을 모델 별로 창고에 그득그득 쌓아놓고 재고매입업자들에게 팔아 적잖은 이익을 챙겼다.

 

 게다가 이사장은 제품하자로 클레임이 발생해도 절대 손해보지 않는 비장의 카드를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했다.

 “클레임? 그 가공비로 이 정도 만들어주면 감지덕지해야 할 거 아닌가? 어떻게 옷 수 만 장을 그림같이 만들 수 있어? 불량도 좀 들어가고 그러는 거지. 그거 인수 안하면 지금 창고에 와있는 자재들 싹! 다 불질러 버린다고 해. 클레임이고 뭐고 개소리하면 문도 열어 주지 말란 말이야. 지들은 바이어 납기 넘기면 무사할 것 같아? 돈 들고 오기 전엔 절대 물건 내 주지 마. 

그런 후 무작정 퇴근해 핸드폰도 꺼버리면 이제 발등에 불이 떨어져 원성을 높이는 원청업체와 싸우는 뒷일은 고스란히 권상무의 몫이었다. 하자가 발생한 제품을 현금 들고 와 찾아가도록 하는 것이 업계전문용어로 ‘박치기’. 이사장은 업계에서 박치기 대마왕으로 악명을 떨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형 오더들이 쏟아지는 성수기가 돌아와 하청공장 구하는 게 하늘의 별 따기가 되면 바이어들은 저렴한 가공비를 미끼로 흔드는 이사장에게 어쩔 수 없이 또 다시 오더를 던지곤 했다.

 

하지만 이사장의 가장 큰 수입원은 원단사업이었다. 관세를 내지 않는 수출용 원자재 명목으로 대량 수입한 원단을 세관 몰래 빼돌려 사전에 주문한 업체들에게 내다 팔면 컨테이너 당 수 만 불씩 이익이 떨어졌다. 그 과정에서 간혹 관세법 위반으로 적발되어 단위가 큰 벌금을 물기도 했지만 원단밀수판매는 그 정도 감수하고도 희희낙락할 만큼 큰 이익이 생기는 사업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가 자재대금을 치르지 않는 것은 버릇이라고 밖에 할 수 없었다. 난 처음엔 멋모르고 안면 있는 거래선들에게 내 신용을 담보로 자재를 끌어 왔지만 그 대금을 결재하려 할 때마다 이사장과 충돌해야 했다.

“물건 납품한지 얼마 됐다고 벌써부터 돈 달라고 난리야? 좀 미뤄 봐. 당신 그렇게 능력 없어? 당신 업체들은 왜 그리 참을성이 없어? 남들은 일년씩 미뤄도 불평 한마디 없어. 돈 받고 싶으면 잔소리 말고 기다리라고 하란 말이야!! 

이런 식이라면 박봉의 문제가 아니라 조만간 나 자신이 사기꾼으로 몰리고 말 것이라는 위기감마저 엄습해 왔다.


 

그러다가 유명 스페인 브랜드의 하청오더가 들어왔다. 누구도 맞출 수 없는 납기를 이사장이 장담하며 나섰던 것인데 공장을 24시간 풀가동시키고 재하청공장들을 여럿 잡아 돌려도 절대 시간을 댈 수 없는 일정이었다. 하지만 납기에 밀려 똥줄이 탄 원청업체가 일반 가공임의 두 배가 넘는 가격으로 계약하고 자재부터 밀어 넣자 급기야 생산이 시작되었고 우린 하루에도 몇 번씩 재하청공장들을 순회하며 생산을 독려해야 했다. 그러나 납기를 독촉하는 만큼 제품품질이 떨어지는 것은 권상무만 다그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불과 한 달도 안되는 사이 컨테이너 여러 개가 이미 나갔지만 아직 생산이 마무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최종납기가 내일로 바짝 다가오고 말았다. 모든 생산라인들이 초죽음이 되도록 풀가동 되었고 권상무와 나도 거의 매일 현장에서 밤을 지새웠다, 이젠 곧 내보낼 컨테이너엔 실밥도 제대로 뜯지 않은 제품들이 실리고 있었지만 저것 말고도 아직 두 컨테이너가 더 남아 있었다. 마지막 물량은 이제 막 재단만 되어 있을 뿐 봉제투입조차 되지 않은 상태였다. 24시간 안에 두 컨테이너 분량의 옷을 생산해 완제품상태로 출하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해 보였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이사장은 원청업체에게 여전히 호언장담하고 있었다.

“아, 글쎄. 걱정 말라니까. 마지막 컨테이너들도 내일 아침이면 다 들어온다고요. 물건 준비도 안됐는데 내가 컨테이너 부르겠어요? 그런 소리 집어치우고 가공료나 빨리 보내 줘요. 납기가 급하니 오늘 건 그냥 내보내지만 내일도 입금 안되면 나머지 물량 못 나갑니다. 돈 보내기 전엔 전화도 하지 마쇼! 

난 그의 배짱에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납기 마지막 날 아침, 전날 밤도 공장에서 지새운 나는 사무실에서 권상무와 라면으로 아침식사를 때웠다. 며칠 동안 잠을 못한 권상무는 파리한 안색에 새빨갛게 충혈되어 쑥 들어간 눈을 하고 있었는데 뱀파이어가 있다면 아마도 저런 모습이리라 나는 생각했다.

“나쁜 새끼…, 개새끼

권상무는 라면을 삼키면서도 연신 그렇게 중얼거렸지만 정작 자신은 자각하지 못하는 듯 했다. 그날 나머지 생산을 모두 끝내고 다음날 새벽까지는 컨테이너들을 딴중쁘리옥 항구로 보내야 하는데 권상무의 현장엔 단추가 모자랐고 내가 맡은 하청공장엔 재봉사 색상이 틀려 아침부터 전화가 빗발치고 있었다. 죽어라 미싱만 박아도 시간이 모자랄 판인데 언제 그런 문제들을 모두 해결할 지 갑갑할 뿐이었다.

그날 빠룽공장과 하청공장들을 무수히 오가며 부족한 자재들을 보충하면서 가장 근접한 색상의 재봉사들을 자재창고에서 찾아내고 수십 번 독촉한 끝에 부족한 단추들을 그날 오후에야 받아 냈지만 시간은 너무나 빨리 흐르고 있었다. 오후가 깊어 가도 완성품이 나오지 않아 이미 들어온 마지막 컨테이너들은 아직도 텅텅 비어 있었다.

이사장이 내가 맡은 하청공장에 나타난 건 그날 밤이 깊어가던 시각이었다.

“당신 장난 해? 겨우 이 따위 밖에 못해? 완성이 나와야 될 거 아냐?

“일단 미싱은 박아서 내보내야 할 거 아니에요?

“이 새끼야! 내가 이런 경우 수십 번 안 겪어 봤을 거 같아? 옷이 별거야? 팔 다리만 붙어있으면 되는 거야. 지금쯤 생산이 반 이상은 나와 있어야 한다고!!

“이 난리 치는 거 안보이세요? 다들 최선을 다하고 있잖아요. 

이사장의 표정이 험악해지는 걸 보면 이 대화의 어딘가에서 빈정을 상한 듯 했다. 어쩌면 피로가 누적되다 보니 내 말투에 날 것 그대로의 내 감정이 실렸는지도 모른다. 이사장이 잠깐 동작을 멈추고 날 잔뜩 노려보았는데 갑자기 귀싸대기가 날아왔다. 생각지도 않았던 일격에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이 새끼가 말대답을 해?”

그는 또 다시 손을 쳐들었다. 하지만 난 분명 때리면 때리는 대로 맞고 있을 힘없고 불쌍한 여공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감히 맞받아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난 뒤로 한걸음 물러서며 그의 두 번째 공격을 살짝 피했을 뿐인데 목표를 빗나간 풀스윙에 하체가 무너지면서 발이 꼬여, 그는 재단물이 잔뜩 쌓인 미싱라인 한가운데에 고꾸라지고 말았다. 마흔 넘은 직원의 뺨을 때리는 그의 몰상식함에 기가 막혔지만 한편으로는 재단물에 파묻혀 일어나려고 버둥거리는 그의 모습에 오히려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애써 참아야 했다.

벌떡 일어선 그는 눈을 희번덕거리며 또다시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가세요.

갑작스러운 존댓말에 오싹 소름이 끼쳤다.

“네..?

“나 당신하고 더 이상 일 못하니까 어서 가시라고요.

“해고.., 하시는 겁니까?

이사장은 대꾸도 안하고 돌아서더니 이번엔 하청공장 사장을 닦달하기 시작했다. 사실 그에게 굳이 재확인할 필요도 없이 난 거기서 그렇게 해고당한 것이다. 남의 공장에서 공개적으로 귀싸대기까지 맞으면서 말이다. 납기 맞춰 보겠다고 며칠 밤을 새워 최선을 다한 끝이었다. 그러나 기분이 아주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6개월 전 절체절명의 순간 그가 우리 가족을 구원해 준 것을 난 잊지 않았다. 그 덕에 우린 길가에 나앉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르박불루스의 집이 그 증표였다. 그래서 내가 먼저 사표를 내는 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그건 그때의 은혜를 배신하는 짓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수백 번 때려치우고 싶은 상황을 참고 참은 끝에 마침내 해고를 당하고 말았다. 오랫동안 기다려 왔던 순간이었다. 이제 비로소 홀가분하게 떠날 수 있는 모양새가 갖춰진 것이다.

 

  “뭐가 그렇게 좋아?

빠룽공장에 돌아오자 권상무가 더욱 흡혈귀처럼 변한 얼굴을 하고서 나타나 그렇게 물었다.

“해고 당했어요.

그는 충격 받은 듯 잠시 말이 없었지만 곧 내 두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축하한다.

권상무는 내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입가에 흐르던 체념한 듯한 미소는 그가 진심으로 나의 해고를 부러워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내가 집에 도착하자 아내가 깜짝 놀랐다. 빠룽공장에 출근한 후, 11시 이전엔 돌아온 적이 없던 내게 밤 9시는 너무 이른 귀가였던 것이다. 아내는 내가 사무실에서 들고 온 개인물품이 담긴 박스를 보고 이미 짚이는 바가 있었다.

“짐을 싸자. 여길 떠날 날이 드디어 온 거야.

내 목소리는 분명 비감했을 것이다. 당연한 귀결이기도 했다. 세간이 적지 않았지만 이미 대부분 박스로 포장되어 있었으므로 짐 싸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첫 월급 사태가 벌어진 후, 나는 매일 밤 조금씩 다시 이삿짐을 싸면서 언젠가 반드시 이곳을 떠나겠다는 의지를 다져왔던 것이다.  

부동산 브로커에게 전화해 예전에 살던 쯤빠까마스 아파트의 유닛 하나를 계약한 것은 밤늦은 시간이었다. 쥐꼬리만한 월급을 다시 쪼개고 밤새워 했던 영어번역 아르바이트비를 합쳐 임대료도 간신히 준비해 둔 상태였다. 굳이 미리 집을 보지 않은 것은 전에 살던 아파트이기도 했거니와 사실 르박불루스를 떠날 수만 있다면 어디로 가든 상관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우린 다음날 아침 일찍 트럭을 불러 몇 번에 걸쳐 짐을 옮겼다. 해고당한 지 스물 네 시간도 채 되지 않아 나는 이사를 모두 마칠 수 있었다. 르박불루스에 오던 때와 마찬가지로 떠나는 것 역시 전광석화와 같았다.

 

“이 시간에 어쩐 일이야? 오늘 공장에서도 안보이고?

 르박불루스 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찌네레의 주택단지에 살던 안이사를 찾아 간 것은 저녁 여덟 시쯤이었다. 안이사는 앞뜰에 앉아 맥주를 몇 잔 걸치고 기분 좋게 취해 있었다

“집에 계신 거 보니 컨테이너들 다 나간 모양이네요?

“물론이지. 오늘 아침에 잘 나갔지. 

절대 불가능해 보이던 일을 이사장은 기어코 해낸 것이다. 놀라운 일이었다. 하지만 하루 만에 대충 바느질해 채워 넣은 두 컨테이너 분의 제품들이 과연 어떤 상태일지 눈앞에 선하게 떠올랐다. 나는 한 달쯤 후 스페인에서 그 컨테이너를 열어 볼 바이어의 표정도 상상해 보았다

“그런데 이 시간에 연락도 없이 어쩐 일이야?

“이거 전달해 드리려고요. 

나는 르박불루스의 집 열쇠와 내게 배정되었던 디젤차량의 키를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 든 안이사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이건 왜?

“어제 밤에 이사장님이 절 해고했어요.

“얘기 못 들었는데…? 

어쩌면 이사장이 나를 공개적으로 해고한 것은 그가 내 목줄을 쥐고 있음을 하청공장에서 단지 과시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내 뺨을 갈긴 것도 생산을 독려하기 위한 실감나는 연기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건 이제 와서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었다. 다시 말려 들면 자칫 권상무처럼 다시는 헤어나오지 못할 것만 같았다

“사소한 일이라 아마 잊으신 모양이죠.

난 뚱한 표정을 짓고 있던 안이사에게 씩 웃으며 그렇게 말하고 돌아 나왔다.

 

이사장은 그 달의 내 월급을 정산해 줄 사람이 아니었으니 아무런 저축도 없었던 나로서는 어떻게든 또 살 길을 찾아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 놓이고 말았다. 그러나 마음가짐만은 예전과 큰 차이가 있었다. 그때 나는 상황에 떠밀려 나락의 밑바닥을 망령처럼 헤매고 다녔지만 이번엔 내 의지로 박차고 거리로 나선 것이었다. 이제부터 벌어질 모든 일들은 그 누구의 탓도 아닌, 전적으로 내 책임이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난 그렇게 다시 출발선 위에 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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