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으로 살아 가기
자카르타에서 사는 법 본문
1.
그 해의 봄은 암울하기만 했습니다. 많은 노력을 쏟아 부었던 뿔로마스의 택견전수관은 한국에서 경비송금을 중단하면서 개점휴업상태에 들어갔고 4개월간 월급 한 푼 받지 못한 택견선생님은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귀국해 버렸습니다. 인테리어에 공을 들였던 전수관 공간과 제반 시설들은 계약만료를 아직 8개월이나 남겨 놓고 무용지물이 되어 버렸고 나는 깊은 허탈감에 빠졌습니다. 목재사업으로 파산한 후 재기해 보려던 발버둥 중 또 하나가 수포로 돌아간 것입니다. 오랜 파트너였던 릴리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공멸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절감했습니다. 파산 당시 우린 거의 모든 것을 잃었는데 그 후 남아 있던 불씨들마저 남김없이 꺼져 가고 있었습니다.
“당분간이라도…., 다시 월급쟁이가 되는 수밖에 없어…”
그런 결론은 이미 오래 전에 나 있던 것입니다. 당시 급조된 몇몇 아이템들이 허겁지겁 돌아가고 있었지만 그 수입으로는 택시비도 감당하기 벅찼습니다. 난 이 세상이 자존심만으로 살아갈 수 없는 곳임을 마침내 깨달았고 내가 어딘가에 취직해 받는 월급으로 생활비와 남은 사업을 돌릴 경비 일부를 지원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일자리를 구하는 것 역시 쉽지 않았습니다. 막 40을 넘기고 있던 내 나이가 취직하기엔 너무 많다는 사실도 처음 실감했습니다. 수많은 회사에 원서를 내밀었지만 내 나이는 이미 채용요건을 벗어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만난 것이 ‘꼬린’이라는 반둥의 한 봉제공장이었습니다. 꼬린은 자카르타에서도 꽤 이름이 알려진 큰 의류공장이었습니다. 마침 교민사이트에 오른 구인광고를 보고 이력서를 보냈는데 면접 보러 오라는 회신을 받았습니다.
“그 나이면 일자리 구하기 쉽지 않을 텐데…, 아무튼 우리랑 일하면 밥 굶을 일 없을 거요.”
반둥 한인회장도 역임했고 교회의 장로이기도 한 윤사장은 나름대로 한인사회의 거물로서 자리매김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면접하는 동안 그가 나를 파악하려는 것처럼 나 역시 그의 생각을 읽었습니다.
네가 오죽하면 반둥까지 밀려와 내 밑에서 일하려 하겠니?
억울하지만 그것은 사실이었습니다. 내가 수년 전 대기업 현지공장의 법인장 후임으로서 자카르타에 첫 발을 디뎠다는 사실은 이젠 아무 상관도 없는 가련한 이력이었습니다.
“월급은 1,700불이요. 그 이상은 어림도 없어요. 영어를 잘 하니 그 정도라도 주는 것이요. 요즘 같이 직장 구하기 어려운 시기에 그 정도 줄 수 있는 공장도 우리 밖에 없을 거요.”
1,700불은 오래 전 내가 인도네시아에서 받은 첫 월급에도 미치지 못하는 금액이었습니다. 그 월급에 목을 매고 아이들 학비와 생활비를 벌충하고 빚도 갚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눈 앞이 캄캄했습니다. 윤사장은 그런 내 절박함을 꿰뚫어 보고 있었겠죠.
넌 절대 거절 못해.
아파트의 임대계약이 한 달 후면 끝나는데 이미 새 학기를 시작한 아이들은 학비를 내지 못해 중간고사도 보지 못할 판이었습니다. 거기에 채권자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독촉전화로 욕설을 퍼부었고 뿔로마스 택견전수관에서 난장을 죽이다 못해 집까지 찾아오고 있었습니다. 그 정도로 절박하니 자카르타에 사는 놈이 반둥까지 직장을 찾으려 온 것이라 생각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직함은…, 우리 장과장 밑이니…”
윤사장은 나에게 대리 직함을 달라고 합니다. 치욕적이지만 그것도 내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기차를 타고 자카르타로 돌아오는 동안 내 가슴 속엔 시린 칼바람이 사정없이 불었습니다. 그 한번의 면접으로 내 자존심은 완전히 무너져 내렸습니다. 내 인생이 밑바닥까지 와버렸다는 사실이 슬펐고 나로 인해 앞으로 오랫동안 고생하게 될 아내와 아이들 생각에 마음은 한없이 무거워졌습니다.
“미쳤어요!!? 그런 조건으로 어떻게 일해요? 가족들까지 데리고 가서 어쩌려고요?”
릴리는 길길이 날뛰며 반대하다가 급기야 엉엉 울어 버립니다. 여자들은 이럴 게 뻔한 일이라 아내에게는 구체적인 얘기를 아직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만류하면서도 사실은 릴리 역시 우리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우린 가진 모든 것을 팔아 빚을 갚고 있던 중이었어요. 사업이 주저앉자 사람들은 죽일 듯 빚독촉을 해왔고 난 막판엔 아이들의 통학용 차량까지 팔아야 했습니다. 카드도 모두 막히고 콜렉터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난장판을 치는 와중에 친구들과 선배들은 내가 테러범이라도 되는 듯 멀찍이 안전거리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우린 막장에 와 있었습니다. 1,700불이라는 월급은 그나마 늪 속으로 더 이상 빠져들지 않기 위해 꼭 잡아야 하는 마지막 지푸라기 같은 것이었고 그마저 놔버리면 이제 깊은 늪 속으로 끝없이 빨려 드는 일만 남아 있었습니다.
그 와중에도 아파트 계약만료일은 성큼성큼 다가 오고 있었습니다. 세부조건 협의를 위해 다시 반둥에 갔을 때에도 윤사장은 주택과 이사문제에서 한치도 물러서 주지 않았습니다.
“가족들 다 데리고 와요. 반둥도 살만 해.”
가족들을 자카르타에 남겨 놓고 나 혼자 반둥에 넘어오겠다는 의사를 윤사장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자카르타에서 좀 더 싼 집으로 옮기고 나는 공장 간이숙소에 묶는다면 이사나 전학 같은 많은 부분들이 좀 더 쉬워질 것이고 관련예산도 넘기지 않을 텐데 굳이 가족들을 데려오라고 강요하는 윤사장의 의도를 난 처음엔 잘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반둥 집값 싸요. 자카르타 반값이면 괜찮은 집에 살 수 있다구요.”
생산을 총괄하는 김부장은 면접 당시 나를 역에 데려다 주는 길에 자신의 호화로운 주택을 보여 주며 한국인직원들이 누리는 환상적인 근무조건을 설명해 주었지만 정작 내가 윤사장의 채용조건에 응하자 관리부 장과장이 보여주기 시작한 집들은 현지인들도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 곤란한 것들이었습니다. 가족들을 모두 데려오라면서도 장과장은 열 평도 되지 않는 썩어가는 집들만 보여주었는데 내가 자카르타에서 가져올 짐들은 반도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몇 번 더 반둥에 갔지만 여전히 마땅한 집은 나서지 않았고 내가 잠시 일이 있어 막판에 나 대신 반둥을 다녀온 아내는 돌아오자마자 서럽게 울기 시작했습니다. 장과장이 어떤 집을 보여주었는지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아, 현지인 새끼들, 일 하는 게 그래요. 좋은 집 구해주라니까 하는 짓들이…”
장과장은 혀를 끌끌 찼지만 바로 장과장 자신이 내 자카르타 아파트 임대료의 10분의 1 수준으로 임대료 상한선을 그었다는 것을 그의 부하직원에게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반둥이라도 그 돈으로는 한국인 4인 가족이 살 집을 절대로 구할 수 없었습니다.
학교 문제는 좀 더 복잡했습니다. 아이들은 북부자카르타 끄마요란 지역에 있는 인디아계 간디스쿨을 다니고 있었는데 둘도 없이 훌륭한 학교라 할 순 없지만 제3세계국가 대사자녀들이 많이 다니는 정규 국제학교였고 한 학기, 또는 1년 학비를 무조건 선납해야 하는 타 국제학교들에 비해 현저히 저렴한 학비를 할부납부까지 할 수 있었으므로 나처럼 직장의 학비보조를 받지 못하는 부모들에게는 많은 장점을 가진 학교였습니다. 더욱이 아이들 입학 당시 학교에 청원서를 넣어 입학금과 정규 등록금의 상당부분을 감면 받은 이후 줄곧 그 감면된 금액을 적용받고 있었는데 윤사장이 요구하는 것처럼 그런 조건들을 모두 버리고 반둥으로 전학하는 것은 심리적, 금전적으로 손해가 막심한 일이었습니다. 회사가 그 비용을 지원해 주는 것도 아닌데 윤사장은 강경 일변도였습니다.
“가족들을 안 데려온다는 건 마음이 안 따라온다는 얘긴데…, 그럼 제대로 일을 할 수가 없어요. 여기서 일하려면 가족들 다 데리고 이사 와요. 장과장이 집 구해 줬을 거 아닌가?”
근무조건이 열악했던 만큼 직원을 붙잡아 놓기 위해 인질이 필요했던 것일까요?
2.
반둥으로 떠나야 하는 날이 사흘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내가 살고 있던 쯤빠까마스 아파트의 임대계약도 그날 끝나고요. 수만 갈래로 흩어지는 마음의 가닥을 잡지 못해 밤늦게까지 아파트 단지를 배회하며 담배만 몇 갑씩 피워대는 밤이 속절없이 계속되었습니다. 아내는 이제 체념하는 눈치였고 그 모든 열악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반둥에 가는 것은 기정사실이 되어 있었습니다. 단지, 아이들 학교만은 마지막까지도 결정을 내리지 못해 전학수속을 시작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면접과정에서 느낀 석연치 않았던 부분들도 마음 한편을 눌렀습니다. 꼬린의 엄청난 생산설비를 돌려주던 주력 바이어가 최근 발주를 중단하면서 윤사장은 즉시 대체 바이어를 개발해야 하는, 발들에 불이 떨어진 상황이었고 난 그 일을 할 해외영업부의 팀장들 중 하나로 채용된 것입니다. 그 중엔 인디아인도 몇 명 있었습니다. 우린 이제 온-오프라인에서 본격적인 영업활동을 시작해야 하고 쌤플을 들고 유럽과 미주지역 거래선들을 찾아 날아다녀야 할 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요원들을 선발하면서 꼬린은 지나치게 인색을 떨고 있었습니다. 난 그것이 어쩌면 작금의 자금상황이나 경영자의 의도를 대변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실제로 난 꼬린 공장을 둘러보며 몰락해가는 제국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나 역시 봉제로 잔뼈가 굵었고 예전 회사에선 중국에서 해외임가공을 돌리며 나름대로의 공장평가기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꼬린의 미싱 돌아가는 소리는 그리 힘차지 않았습니다. 가동율은 현저히 낮았고 포장파트도 거의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수출되는 물건이 없다는 얘기였죠. 그런데도 윤사장과 김부장의 생활은 호화의 극을 달렸고 틈만 나면 낚시와 사냥을 하러 다녔습니다. 그래서인지 왠지 그들이 진심으로 공장을 살리려 노력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반둥행이 더욱 내키지 않았습니다.
내게 있어 불혹을 넘긴 후의 취직은 중대한 모험이었고 더 이상 실패를 겪을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가족들까지 볼모로 잡히면서꺼지 꼬린의 형편없는 조건들을 수용했다가 이 모든 시도가 마침내 실패해 버린다면 나와 우리 가족들은 돌이킬 수 없는 파국에 처하고 말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그러나 반둥에서의 면접 후 자카르타에서도 백방으로 다른 일자리를 찾았지만 모두 허사였습니다. 이력서 상의 나는 전형적인 영업직일 뿐이었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같은 조건이라면 한 살이라도 어린 사람을 뽑으려 하는 게 당연한 일이었죠. 내가 엔지니어가 되지 못한 것, 경쟁력 있는 고급기술 하나 배우지 못한 채 인생을 허비했다는 사실이 원통했습니다.
유턴도 할 수 없는 좁디 좁은 일방통행도로. 그러나 저 앞엔 막다른 골목이 예상되는…., 반둥으로 가는 길이 그런 것이었는데 나는 이제 가족들의 손목까지 잡아 끌며 그 길을 막 떠나려 하고 있었습니다.
“전에 우리 공장에 면접 왔었지? 내일 아침 일찍 좀 와 줄 수 있겠나?”
그 전화를 받은 것은 밤 아홉 시가 넘은 시간. 아파트단지 1층 계단턱에 앉아 멍하니 담배연기를 흘리고 있을 때였습니다. 지난 주 면접퇴짜를 맞았던 빠룽소재 봉제공장의 안이사라는 사람이 전화기 건너편에서 그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내 머리 속 어딘가에서 이미 오래 전 꺼져 버렸던 희망의 신호등이 미약하게나마 깜빡거리며 다시 점멸하기 시작했습니다.
다음 날 찾아간 그 공장은 영업부장 자리가 갑자기 비어 급히 충원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가능하면 내일부터라도 당장 출근하세요. 살 집은 오늘이라도 알아 볼 수 있을 거요.”
안이사가 배석한 자리에서 내 이력서를 다시 훑어보던 이사장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월급 3천불과 주택, 비자를 회사가 제공하는 조건이었습니다. 굶주린 늑대들에게 둘러 쌓인 허허벌판에서 갑자기 하늘로부터 내려온 동아줄이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모든 것이 순식간에 진행되었습니다.
빠룽은 행정구역상 자카르타 외곽과 접한 반뗀 지역의 외진 곳이었지만 그날로 자카르타 남부 르박불루스에 우리가 살 주택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간디스쿨과는 상당히 멀어졌지만 여전히 아이들이 통학할 수 있는 거리였습니다. 실로 오랜만에 아내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습니다.
“이제 당분간 따로 일하게 되지만 우린 여전히 한 배를 타고 있는 거야. 우리가 하던 일을 어떻게든 유지해줘. 언제가 다시 함께 일하게 될 날까지. 그리고 그 날이 오면 네가 날 잡아 당겨줘야 해”
릴리 역시 무척 기뻐하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아파트 임대계약이 끝나던 날, 반둥으로 가려고 예약했던 이삿짐 트럭은 대신 르박불루스를 향해 달렸습니다. 비록 철저한 실패 끝에 소나기를 피하는 것이었지만 어떤 식으로든 자카르타에 남게 된 내 마음은 깃털처럼 가벼웠고 친숙한 봉제 일을 다시 시작한다는 것에 설레는 기대감도 있었습니다.
꼬린과의 인연은 거기까지였습니다. 나중의 일이지만 그로부터 2년 후 꼬린은 부도를 내고 인도네시아의 경제지도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맙니다. 노쇠한 코린은 이미 문제에 기민하게 대응할 민첩성을 잃었고 별다른 도전도 없이 장기간 직장을 지배해 온 관리자 집단의 매너리즘은 한계에 도달해 있었던 것입니다. 회사가 도산하면서 윤사장은 한국으로 도주했고 김부장과 장과장의 소식도 더 이상 듣지 못했지만 그들 개개인에게 공장의 준비된 도산이 치명적 타격을 주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회생노력에 소극적이었던 그들은 아마도 회사의 운명을 이미 예측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먹고 살 돈도 당시 이미 충분히 챙겨놓았을 터였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때 내가 합류했다면 공장의 도산과 윤사장의 도주는 깊은 나락의 거대한 입이 되어 나와 가족들을 삼켜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코린의 운명을 르박불루스로 달려가던 당시의 나로서는 전혀 예측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3.
빠룽공장은 봉제의류 하청전문공장이었습니다. 업계에서의 위상은 꼬린과 비교할 수도 없었고 규모나 설비 면에서도 크게 낙후되어 있었지만 나름대로 그 지역에선 꽤 연조가 깊은 공장들 중 하나였습니다. 몇 년 전 경제위기를 겪으며 많은 봉제공장들이 도산해 하청공장들이 대폭 줄어든 상태에서 대미 쿼타가 해지되고 중국을 이탈한 의류오더들이 인도네시아로 밀려들어 일감이 넘쳐나던 때였으므로 공장의 미래는 당분간 안정적으로 보였습니다.
이사장은 기억하지 못했지만 난 몇 년 전에도 이 공장에 와 본 적이 있었습니다. 브랜드의류 재고를 인수하기 위해서였죠. 대개 여분의 자재로 초과생산되는 제품들은 일정 범위 내에서 원청회사가 인수하는 것이 보통인데 그런 의류재고를 하청공장이 모델별, 브랜드별로 수 백 장, 또는 수 천 장씩 재고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좀 이상했습니다. 그게 모두 최종검품을 통과하지 못한 물량이라면 공장은 이미 망했거나 크게 휘청거리고 있어야 하는데 이사장의 공장은 잘만 돌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이사장은 비대한 체격과 대체로 시뻘건 낯빛이 사뭇 위압적이기까지 했고 끊임없이 눈동자를 굴리는 모습이 어딘가 불안해 보이기도 했습니다. 다시 만난 이사장의 인상은 전혀 변하지 않았지만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다행스러웠습니다. 바이어로 왔던 사람이 몇 년 후 이력서를 들고 다시 찾아왔다는 것은 결코 자랑스러운 일이 아니었으니까요.
“이차장 그 녀석은 술만 마시면 깽판 치는 게 문제였어. 그걸 도저히 고칠 수 없었나 봐. 술 마신 다음 날은 나타나지 않기 일쑤였거든. 이사장이 그 녀석 패거리들을 너무 풀어 준 거야. 나중에 하나 둘 떠나더니 이젠 결국 이차장도 떠난 거지. 하긴 젊은 친구들이 이런 공장에 왜 붙어 있겠나?”
현장 건물 2층 쪽방을 사무실로 쓰던 생산담당 권상무가 하던 말이었습니다. 내 전임자였던 30대 초반의 이차장은 의류전문회사 출신 베테랑이었답니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세 명이던 영업직 한국인 관리자들이 한 명으로 줄어든 것을 보면 공장은 이제 막 그 전성기를 지난 것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이차장은 원래 주사가 있어 툭하면 사표를 낸다 떠버리며 결근과 지각을 밥 먹듯 했고 월급을 받으면 며칠씩 내리 무단결근을 하곤 했습니다. 내가 급히 채용된 것은 이차장이 마지막 무단결근에서 결국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회사에서 빌린 돈도 있고 인수인계도 해야 하니 언젠가 한번 나타나겠지. 첫날부터 무리하지 말고 천천히 업무파악부터 하라구.”
이사장과 오랜 지기인 권상무는 찔릉시 지역에서 잠시 자기 공장을 돌리기도 했지만 사업 파트너와의 송사에 휘말리면서 공장 문을 닫아야 했고 급기야 모든 것을 날린 후 이사장에게 의탁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빠룽공장 2층 쪽방사무실에서 와신상담하며 재기를 꿈꾸는 것이 분명했지만 임시방편이었던 이사장의 공장에서 그는 벌써 8년째 머물고 있었습니다.
오랜만에 다시 직장생활을 시작하는 내게 빠룽공장의 모든 것이 낯설었지만 난 반둥의 꼬린까지 갈 결심을 했던 사람입니다. 어찌 되었든 최악은 면한 상황인 셈이었으므로 난 마음을 다잡고 있었는데 전혀 예상치도 않았고 그래서 대비하지도 못한 일이 드라마의 반전처럼 찾아왔습니다.
“새로 오셨군요. 안녕하세요?”
첫 출근을 한 지 사흘 째 되던 날, 말로만 들었던 그 이차장이 공장에 나타났습니다. 평판과는 달리 훤칠한 키에 서글서글한 눈매를 한 남자였어요.
“석이 이 자식! 너 이리 와!!”
“아이고, 사장님, 고정하세요. 혈압 조심하셔야죠. 혈압.”
눈을 부라리는 이사장에게 이차장은 넉살 좋게 매달리며 사장실로 따라 들어 갔습니다. 고함소리가 터져나올 것이란 예상과는 달리 사장실에선 잠시 후 웃음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유쾌한 표정으로 방을 나온 이사장은 내게 자리를 옮기라고 합니다. 내가 앉은 자리가 원래 이차장 것이라는 겁니다. 그 자리에 앉은 이차장은 내게 빙긋 눈인사를 하더니 직원들을 불러 자재상황을 묻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혼란스러웠습니다. 저 친구가 그만둬서 내가 들어온 것인데 이차장은 전혀 퇴사한 사람 같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사장, 그 인간이 원래 그래. 살살 아부하면서 똥구멍 긁어 주면 어쩔 줄 모르고 좋아서 오냐 오냐 하거든. 그래서 애들 다 버려 놨지. 이차장 저 친구도 그래. 저렇게 다시 기어들어온 게 벌써 몇 번 째야? 어차피 오래 못 간다. 다음 주면 분명히 또 한 바탕 할 테니 당신은 나만 믿고 있어.”
안이사는 그렇게 말하지만 난 가시방석에 앉은 심정이 되어 있었습니다. 빠룽공장의 규모나 일의 양은 인건비 비싼 한국인 매니저 두 사람이 나누어 할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차장이 그렇게 슬그머니 돌아왔으니 내 입지가 흔들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굳이 따지자면 난 안이사가 데려온 사람이고 이차장은 이사장이 직접 다시 불러들인 사람입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안이사 역시 자카르타 시내에서 하던 식당이 망해 매제의 공장에 얹혀있던 중이었으므로 난 결정적으로 위태로운 상황에 몰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달 말, 빠룽공장에서의 첫 월급날에 내가 우려했던 일이 정말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당신은 1,500불만 받아.”
“네…?”
약속한 월급은 3천불인데 이사장은 1,500불이 든 봉투를 개에게 뼈다귀 던져 주듯 사장실 탁자 위에 던져 놓고 있었습니다.
“그럼 나머지는 언제쯤에…?”
그러자 이사장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내 위 아래로 훑어 보더니 예의 눈동자를 굴리며 이리 저리 두리번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뭔가 억지를 쓸 때마다 이사장은 그렇게 두리번거렸습니다.
“당신도 참 눈치 없네. 이차장이 나간다고 해서 당신 채용한 거야. 근데 쟤가 계속 일한다잖아? 다른 사람들 같으면 벌써 눈치 차리고 알아서 나갔을 텐데 당신 계속 붙어 있는 거 보니 눈치가 심하게 없던가 아니면 정말 살기 어려운 모양이지? 그러니 1,500불이라도 주는 거야. 그거 받고서라도 일하려면 일하고, 정 억울하면 따로 나가 살 길 찾으라구. 당신 나이에 꼭 똥인지 된장인지 말해줘야 알겠어?”
나는 죽창에 가슴을 뚫린 듯 숨이 턱턱 막혀 할 말을 찾지 못했습니다. 이사장은 내 눈길을 피해 여전히 두리번거리면서 장황하게 말을 이어 갔지만 내 귀엔 더 이상 아무 말도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월급1,500불은 정말 열악하다고 치를 떨던 꼬린의 조건보다도 못한 것인데 이사장은 그 돈을 내 코 앞에 흔들며 장사치처럼 흥정을 걸고 있는 것입니다. 금전적으로 절박하다는 약점이 알려지는 순간, 대개의 경우 사람들은 도움의 손길을 내밀긴커녕 오히려 그 약점을 더욱 짓쳐 들어와 짓밟으려 들곤 합니다. 난 반둥에서 빠룽으로 방향을 바꾼 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을 잡은 것이 아니라 늑대를 피해 범굴로 뛰어든 것이었음을 그날 절절히 깨닫고 말았습니다.
“그러게 내가 얘기했잖아? 며칠 좀 생각해 보자구.”
자기가 책임지겠다던 안이사는 이사장 옆 소파에서 불편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로 그렇게 얘기하고 있었습니다. 마치 자신이 미리 설명했는데도 내가 억지를 쓰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런 일이 내게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도무지 믿을 수 없었습니다. 황황히 사장실을 나오던 나와 눈이 마주친 이차장은 사무실 뒷편에서 빙긋이 미소짓고 있었고요.
일말의 자존심을 지키려 했다면 난 그 1,500불을 이사장 얼굴에 흩뿌리며 공장을 박차고 나왔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가족들의 생활비와 아이들 학비를 내려면 그 1,500불은 그나마 없어서는 안되는 돈이었습니다. 이미 반둥에도 갈 수 없게 된 상황에서 난 이번에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이토록 비굴해지고 말았다는 자괴감에 치를 떨었고 흙바닥을 뒹구는 내 자존심은 시뻘건 선혈을 뿌렸지만 난 그 월급봉투를 손바닥에 피가 나도록 주머니 안에 틀어쥐고만 있었습니다. 아내에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지인들에게 어렵사리 돈을 빌리고 밤새워 영어번역을 해 부족한 비용을 메우면서 나는 회사에서도 집에서도 점점 입을 닫아 버리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들이마시는 호흡이 매번 폐 속에서 수 천 개의 면도날이 되어 내장을 후벼 파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반전은 사흘 만에 또 다시 찾아 왔습니다. 예전엔 밥먹듯 결근했다는 이차장은 그동안 결근은 커녕 지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늘 빙글빙글 웃고 있었지만 어쩌면 나의 존재가 그에게도 경종을 울렸던 것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월급날 이후 그는 또다시 출근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번엔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가 찌비농 인근 어딘가에 작은 티셔츠 공장을 차렸다는 얘기를 들은 게 바로 그 직후의 일입니다. 지난 달 이사장이 나를 가지고 논 것처럼 이차장도 이사장을 가지고 놀았던 것입니다. 나는 허탈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내가 빨리 나가 주길 바라는 기색이 역력했던 이사장은 이차장이 티셔츠 공장을 냈다는 소식에 하루 종일 분을 참지 못해 허공에다 고래고래 욕을 해대더니 다음 날 나를 불러 월급을 2천불로 올려주겠다고 제의해 옵니다. 그러나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이사장의 얄팍한 속내를 알아 버린 이상 그런 제의는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공장에 출근하는 것은 똥물이 쏟아져 내릴 줄 뻔히 알면서도 아무런 장비도 없이 하수구에 기어들어가는 참담한 심정이었습니다. 그것은 돈을 더 준다면 한 번 재고해 볼만한 일이 아니라 어떻게든 빨리 종결 짓고 떠나야만 하는 일이었습니다.
“저 새끼들, 사람 깔보고 함부로 설치더니 그게 수습이 되냐, 절대 안되지.”
쪽방에 난 작은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며 권상무가 혀를 끌끌 찼습니다. 그날 이후 안이사는 나와 마주치는 것을 극도로 피했고 이사장은 자기 교회 아버지학교에 등록시켜 주겠다며 내게 갖은 생색을 내고 있었는데 권상무의 그 말은 묘하게 전개되어 버린 내 상황을 얘기하는 것인지, 약정된 월급이나 정해진 날짜도 없이 이사장 내키는 대로 던져 주던 용돈으로 근근이 살고 있는 자신을 빗댄 것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오랜 시름을 담은 권상무 눈가의 깊은 주름을 보면서 이곳에 오래 머물다 보면 나도 언젠가 저런 주름을 달게 될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사장은 매달 조금씩 월급을 올려 주었지만 당초 약속했던 3천불로는 결코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월급날마다 그 월급봉투를 이사장 입에 구겨 넣어 버리고 싶은 충동을 애써 참았습니다. 그렇게 첫 달을 보낸 후 공장생활은 당연히 지옥 같았습니다.
4.
직수출오더를 진행하면서 상황은 더욱 곤혹스러워졌습니다. 원청업체가 자재를 모두 넣어주는 하청오더와 달리 이번엔 원단부터 단추 한 개, 라벨 한 장까지 내가 직접 수배하고 발주해야 했는데 기계적으로 진행될 수도 있었던 그 일이 빠룽에선 그렇지 못했습니다.
“뭐, 빠룽이라고? 이사장네 공장? 나 그 새끼랑 거래 안해. 당신 새로 와서 잘 모르는 모양인데 그 새끼랑 거래해서 돈 제대로 받은 놈이 없어요. 거기 일하던 애들 왜 다 그만뒀는지 몰라? 이사장 그 놈 자재값 안주는 놈이야. 다시는 전화도 하지 마!”
강도만 다를 뿐, 자재업체들은 하나같이 대금을 떼일 거라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나마 별 군소리 없이 자재를 넣어주는 몇몇 업체들은 공통적으로 적게는 수백불, 많게는 수만불까지 작년 미결재액이 남아 있었습니다. 자재공급을 거절하면 밀린 대금을 떼일 판이었던 것입니다.
“돈이 없긴 왜 없어? 주기 싫어서 안주는 거지. 요즘 봉제공장 해서 이사장만큼 돈 버는 놈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라. 그 돈 벌어서 다 어디다 쓰는지 몰라.”
대금결재문제로 고민하던 나에게 며칠간 야근으로 눈이 새빨갛게 충혈된 권상무가 그렇게 얘기했습니다. 사실 이사장이 돈을 갈퀴로 긁고 있는 것은 그동안 내가 본 것 만으로도 충분히 느끼던 차였습니다.
“권상무. 원단 소요량 부족하다고 해. 한 3천 야드 더 넣어달라고 하라구. 안감도 마찬가지고. 라벨이랑 단추도 불량 많아서 일 못한다고 하란 말이야. 장사 하루 이틀 해? 뭐, 재봉사 같은 거야 시장에서 사오면 될 거고…, 그래야 한 천 장 더 만들 거 아냐?”
빠룽공장에 그토록 많은 유명브랜드의 제품재고가 모델별로 쌓여있던 이유를 그 때 알게 되었습니다. 반바지 오더 만장 받으면 이사장은 어떻게든 원청업체에서 2, 3천장 더 만들 자재를 쥐어짜내 그만큼 더 생산해서 따로 빼놓았던 것입니다. 생산현장의 인건비 외에는 자재비 원가가 한 푼도 들지 않는 노나는 장사였던 거죠. 게다가 제품하자가 발견돼 클레임이 생겨도 이사장은 절대 손해보지 않는 비장의 카드를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했습니다.
“클레임? 그 가공비 받고 이 정도 만들어주면 오히려 감지덕지해야 할 거 아닌가? 어떻게 옷 수 만 장을 그림같이 만들 수 있어? 불량도 좀 들어가고 그러는 거지. 그거 고치는 건 비용 안든데? 이거 인수 안하면 지금 창고에 와있는 걔네들 2차분 원단하고 자재들 싹! 다 불질러 버린다고 해. 클레임이고 뭐고 개소리하면 문도 열어 주지 말란 말이야. 지들도 바이어가 정해준 납기 넘기면 무사할 것 같아? 돈 들고 오기 전엔 절대 물건 내 주지 마.”
그런 후 무작정 퇴근해 핸드폰도 꺼버리면 이제 그 뒷일은 고스란히 권상무의 몫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제품에 하자가 났음에도 불구하고 찍소리 못하고 울며 겨자 먹기로 현금 들고와 찾아가는 것이 업계전문용어로 ‘박치기’. 이사장이 봉제업계에서 악명 높은 박치기 대마왕으로 군림하게 된 것은 이런 일이 이전에도 수없이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카르타의 하청공장 숫자는 턱없이 모자라 성수기의 바이어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고 이사장은 룰루랄라 콧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러나 정작 이사장이 큰 돈을 벌던 부분은 원단수입대행이었습니다. 당시 한국산 스판원단을 현지 내수시장에 풀면 떼돈을 벌던 시절이었고 이사장은 전문적으로 그 일을 하기에 누구보다도 유리한 입장이었습니다. 보세지역으로 허가 받은 공장에 수출용의류 원자재 명목으로 관세도 물지 않은 원단을 대량으로 들여와 나중에 실구매자에게 뒤로 빼주면서 컨테이너당 수 만 불씩 커미션을 받았습니다. 물론 그러기 위해 그는 관할세관과 경찰서에 매월 적잖은 금액을 상납했죠. 그래서 빠룽공장의 원단창고에는 그런 원단들이 그득그득 쌓여 있다가 매일 밤 자정 즈음 대형트럭들이 원단을 가득 싣고 실구매자의 창고를 향해 어둠을 가르며 달렸습니다. 그 모든 거래의 대금결재가 사전에 현금으로 이루어 진 것 역시 두 말할 나위 없습니다.
그러니 그가 자재대금을 치르지 않는 것은 버릇이라고 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난 결국 오더를 수행하기 위해 내가 알던 거래선들에게 그간의 안면과 내 신용으로 자재를 끌어 왔지만 그 대금결재를 품의할 때마다 이사장과 충돌해야 했습니다.
“물건 납품한지 얼마 됐다고 벌써부터 돈 달라고 난리야? 좀 미뤄 봐. 당신 그렇게 능력 없어? 남들은 일년씩 미뤄도 불평 한마디 없어. 당신 업체들은 왜 그리 참을성이 없어? 내가 돈 떼어 먹는데? 돈 받고 싶으면 잔소리 말고 기다리라고 하란 말이야!!”
이런 식이라면 박봉의 문제를 차치하고 나마저 조만간 사기꾼이 되고 말 것이라는 위기감이 엄습해 왔습니다.
5.
유명 스페인 브랜드의 하청이 빠룽공장에 떨어졌습니다. 누구도 맞출 수 없었던 납기를 이사장이 장담하고 나섰기 때문인데 나나 권이사가 보기에 빠룽공장을 24시간 3교대로 풀가동시키고 재하청공장들을 여럿 잡아 돌려도 모든 여건들이 그림같이 맞아 떨어지지 않는 한 절대 맞출 수 없는 일정이었습니다. 계약서에 명시된 재하청 금지조항 같은 것은 아무 의미도 없는 문구였습니다. 결국 생산이 시작되면서 우린 본공장과 재하청공장들을 하루에도 몇 번씩 순회하며 생산을 독려해야 했는데 생산속도를 높이면서 그에 비례해 품질이 현저히 떨어지는 문제는 권상무만 다그친다고 해결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행거컨테이너 여러 개가 이미 나갔고 이제 마지막 네 개가 남았는데 최종납기일은 바로 내일로 다가와 있었습니다. 공장은 초죽음이 되도록 풀가동되는 중이었고 권상무와 나도 매일 날밤을 까고 있었지만 시간 내에 생산과 출하를 모두 마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이젠 실밥도 제대로 뜯지 않은 제품들이 두 개의 행거컨테이너에 걸리고 있었지만 저것들이 나가도 아직 마지막 두 개가 더 남아 있는데 그 물량은 바로 그날 아침 막 원단만 재단해, 봉제투입도 되지 않은 상태였고 시간은 불과 24시간도 채 남지 않았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이사장은 납기를 독촉하는 원청업체에게 여전히 호언장담하고 있었습니다.
“아, 글쎄. 납기 걱정 말라니까. 내일 다 끝나서 나갈 거에요. 마지막 컨테이너 두 개도 내일 아침이면 다 들어온다고요. 무슨 소리에요? 물건 준비도 안됐는데 내가 컨테이너 부르겠어요? 그런 소리 집어치우고 가공료나 빨리 보내 줘요. 납기가 급하니 오늘 건 그냥 내보내지만 내일도 입금 안되면 나머지 컨테이너들 못 나갑니다. 돈 보내기 전엔 전화도 하지 마쇼!”
저런 배짱, 저런 확신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요?
다음 날 아침 이미 며칠 동안 잠 한 숨을 자지 못한 나와 권상무는 사무실에서 라면으로 아침식사를 때우고 있었습니다. 새벽부터 전화로 이사장에게 고래고래 욕을 먹은 권상무는 파리한 안색에 새빨갛게 충혈되어 쑥 들어간 눈, 까치집이 되어 버린 머리를 하고 있었는데 아마도 뱀파이어가 있다면 저런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 권상무의 얼굴에 비쳐 드는 아침햇살이 그래서 매우 생경해 보였어요. 하지만 내 모습도 아마 그와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쁜 새끼…, 개새끼…”
금방이라도 지쳐 쓰러질 것 같은 권상무는 라면을 삼키면서도 연신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는데 정작 자신은 자각하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아침식사가 끝나자마자 우린 또 각자의 임무처로 달려 나갔습니다. 오늘 생산과 선적까지 모두 끝내야 하는데 권상무의 현장에서는 단추가 모자랐고 내가 맡은 하청공장에서는 재봉사 색상이 틀리다며 아침부터 길길이 뛰고 있었습니다. 죽어라 미싱을 박아도 안될 판에 그런 문제들까지 어떻게 오늘 안에 다 해결하고 물건을 실어 내보낼 수 있을까요?
그날 하루 빠룽공장과 하청공장들을 대여섯 번 오가며 부족한 자재들을 보충하고 가장 근접한 색상의 재봉사들을 자재창고에서 찾아내고 수십 번 독촉한 끝에 부족한 단추들을 그날 오후에야 받았지만 시간은 너무나 빨리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컨테이너들은 그날 새벽에 들어와 기다리고 있었지만 해가 저물어 가는데 어느 현장에서도 아직 완성품이 나오지 않고 있었습니다. 한껏 상기된 표정의 이사장이 내가 맡은 하청공장에 나타난 건 그날 해가 진 후였습니다.
“당신 장난 쳐? 오늘 물건 나가야 되는데 겨우 이 따위 밖에 못하는 거야? 완성이 나와야 될 거 아냐? 봐주는 것도 한도가 있어!”
“한번 더 납기연장 신청하시죠? 일단 미싱은 박아서 내보내야 할 거 아니에요?”
“너 봉제 몇 년 했어? 난 30년이야, 이 새끼야! 내가 이런 경우 수십 번 안 겪어 봤을 거 같아? 하청관리하라고 보냈더니 여기서 노닥거리기만 한 거야? 지금쯤 생산이 반 이상은 나와 있어야 할 거 아닌가?”
“내가 노닥거리려고 사흘 밤을 꼴딱 새웠단 말입니까? 이사장님 돈 벌어 주겠다고 이 난리 치는 거 안보이세요?”
그의 말이 심했을까요? 아니면 내가 지나쳤던 걸까요? 빠룽에 온 후 한번도 내 감정을 드러낸 적이 없었는데 이 날 처음 그를 들이박았습니다. 어쩌면 누적된 피로로 모든 게 귀찮았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 한 마디에 이사장은 날 잔뜩 노려보더니 갑자기 자기 핸드폰을 내게 집어 던졌습니다. 그리고는 옆 미싱에 쌓여 있는 옷들도 마구 던져대기 시작했습니다. 기가 막혔습니다. 난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이사장을 빤히 쳐다 보았습니다. 그는 내가 무릎이라도 꿇고 빌길 바랬던 걸까요? 그는 던지던 것을 멈추더니 또 두리번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이번엔 갑자기 존댓말까지 쓰기 시작했습니다.
“당신 나 돈 벌어줄 필요 없으니 가시오.”
“네..…?”
“나 당신하고 더 이상 일 못하니까 가서 준비하라고요.”
“해고…하시는 겁니까?”
이사장은 더 이상 대꾸도 안하고 돌아서더니 이번엔 하청공장 사장을 닦달하기 시작합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서 있던 나이 많은 한국인 여자관리자가 날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현장라인의 직원들도 힐끔힐끔 쳐다보고요. 난 그렇게 남의 공장 사람들 앞에서 참담하게 해고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 기분은…, 실로 하늘을 날아갈 것만 같았습니다.
난 그간 이사장에게 환멸을 느끼면서도 그가 6개월 전 절체절명의 순간에 처했던 나와 우리 가족을 구원해 준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살게 된 르박불르스의 집이 그 증표였어요. 그래서 길가에 나앉지 않을 수 있었는데 내가 먼저 사표를 낸다는 것은 은혜를 배신하는 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내가 사표를 낸다면 그 집값 물어 내라고 이사장이 거품을 물 것 또한 자명한 일이었고요. 그래서 사표를 던지고 싶던 것을 수 십 번 참은 끝에 마침내 해고를 당했습니다. 비로소 떠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뭔가 구체적으로 세워진 계획은 없었지만 똥물 같았던 빠룽에서 마침내 떠나게 되었다는 사실이 너무나 기뻤습니다.
“뭐가 그렇게 좋아?”
그 기분이 그렇게나 드러나 보였던 모양입니다. 빠룽공장에 돌아오자 이제는 눈이 안보일 정도로 쑥 들어간 권상무가 흡혈귀 같은 얼굴을 하고 나타나 그렇게 물었습니다.
“해고 당했어요.”
그는 충격을 받은 듯 한참 동안이나 말이 없었습니다. 그러더니 내 두 손을 덥석 잡더군요.
“축하한다.”
지난 6개월 동안 교감을 나누었던 권상무는 내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의 입가에 흐르던 잔잔하면서도 체념한 듯한 미소는 그가 진심으로 나의 해고를 축하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내가 저녁 아홉 시쯤 집에 도착하자 아내는 깜짝 놀랐습니다. 난 빠룽 공장에 출근한 이후 밤 열 한 시 이전에 귀가한 적이 없었습니다. 아내는 내가 사무실에서 들고 온 내 사물들을 보고 이미 마음에 짚이는 바가 있었겠죠.
“짐을 싸자. 여길 떠날 날이 드디어 온 거야.”
내 목소리가 너무 비감했던 것일까요? 아니면 당연한 귀결이기 때문이었을까요? 평소라면 끝없는 질문을 던져왔을 아내도 아무 말 없이 바로 짐을 싸기 시작했습니다. 인도네시아에서 오래 살았던 만큼 세간이 적지 않았지만 짐 싸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이미 대부분 박스로 포장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첫 월급 사태가 벌어진 날부터 나는 틈날 때마다 하나 둘 다시 이삿짐을 싸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매일 밤 귀가하여 그 박스들을 보면서 반드시 이곳을 떠나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다져 왔습니다. 생활비를 쪼개고 쪼개 이사비용도 매달 조금씩 준비하고 있었고요.
부동산 브로커를 통해 예전에 살던 쯤빠까마스 아파트의 유닛 하나를 계약하는 것은 밤늦은 시간에도 가능했습니다. 들어가 살 집을 까다롭게 고를 이유도 없었습니다. 르박불르스를 당장 빠져 나갈 수만 있다면 어떤 집이라도 상관없었으니까요. 그래서 다음날 아침 일찍 쯤빠까마스에서 임대계약서에 서명하고 바로 트럭을 수배해 르박불르스의 짐들을 빼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해고당한 지 스물 네 시간도 채 되지 않아 이사를 모두 마쳤습니다. 우리가 르박불르스에 오던 때와 마찬가지로 떠나는 것 역시 전광석화와 같았습니다.
“이 시간에 어쩐 일이야? 오늘 공장에서도 안보이고?”
르박불르스의 우리 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찌네레의 주택단지에 살던 안이사를 찾아 간 것은 저녁 여덟 시가 막 지난 시간이었습니다. 안이사는 현관 앞 뜰에 앉아 맥주를 몇 잔 걸치고 기분 좋게 취해 있었습니다.
“집에 계신 거 보니 컨테이너들 다 나간 모양이네요?”
“물론이지. 오늘 새벽에 잘 나갔지.”
하루 만에 여러 개의 공장에서 후다닥 생산을 마쳐 채워 넣은 두 컨테이너 안의 물건들은 과연 어떤 상태였을까요? 나는 한 달쯤 후 스페인에서 그 컨테이너를 열어 볼 바이어의 표정을 상상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시간에 연락도 없이 어쩐 일이야?”
“이거 전달해 드리려고요.”
나는 그에게 르박불르스의 집 열쇠와 내게 배정되어 있던 디젤차량의 키를 내밀었습니다. 그것을 받아 드는 안이사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어요.
“이건 왜?”
“어제 밤에 이사장님이 절 해고했어요.”
“얘기 못들었는데…?”
어쩌면 이사장은 그 때 그냥 자신이 내 목줄을 쥐고 있다는 사실을 하청공장에서 과시하고 싶었던 것뿐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게 이제 와서 무슨 상관이겠어요? 난 다시 말려 들어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자칫하면 권상무처럼 그 늪에서 다시는 헤어 나오지 못할 지도 모르니까요.
“뭐, 사소한 일이라 아마 잊으신 모양이죠.”
그 대목에서 씩 웃으며 돌아 나왔어야만 했습니다. 그래야만 영화에서처럼 멋진 마지막 장면을 연출할 수 있었던 것인데 말입니다. 그러나 이사장은 이번 달 내 월급을 절대 줄 사람이 아니었고 난 이제 백수가 되었으니 당장 내일부터 다시 살 길을 찾아 봐야 했습니다. 멋을 부릴 여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가짐에서 예전과는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때 나는 상황에 떠밀려 나락의 밑바닥을 헤매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순수한 내 의지로 박차고 거리로 나선 것이었습니다. 이제부터 벌어질 모든 일들이 전적으로 내 책임이라는 의미였지요. 이젠 그 누구의 탓도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나이 40에 난 드디어 어른이 되었습니다.
그 후로도 또다시 취직하기도 했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 싸우기도, 힘을 합쳐 동업하기도 했지만 어떤 경우에도 죽을 듯 힘들다고 느껴지지 않았던 것은 이사장에게 받은 혹독한 자존심의 시련과 그때 살아낸 지옥 같았던 빠룽에서의 생활이 나를 단련시켰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2015. 1.1.(Re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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