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으로 살아 가기
[한인뉴스 연재] 바퀴벌레 이야기 본문
우여곡절 끝에 현지법인 근무를 마치고 돌아간 서 울에서 본사에 사표를 던진 후, 다시 자카르타로 왔을 때의 일입니다.
제대로 된 숙소를 정하지 못한 채 임시로 들어간 꼬스(Kost)라는 현지 자취방은 너무 좁고 어수선 해 지인에게 맡겨 두었던 짐들은 돌려받을 엄두 도 내지 못했습니다. 고작 찾아 온 것이라곤 구식 386 컴퓨터 한대와 그에 딸린 책상 하나가 전부였 고 독립 후 첫 사무실이 된 띠빠르짜꿍(Jl. Tipar Cakung) 거리의 한 공장 구석방에 그것들을 갖다 놓았습니다. 그러다가 어찌어찌 자카르타 북부 외 곽의 주택단지에 입주하게 되었을 때엔 비록 작 고 허름한 간이 2층집이었지만 한 단계 업그레이 드된 생활환경에 난 크게 만족했습니다. 소형차도 한 대 비집어 넣을 주차공간도 있었습니다. 이제 비로서 짐들을 가져올 준비가 된 셈입니다. 그 짐 이라는 게 달랑 가방과 박스 몇 덩어리였습니다.
원래 거기엔 버려도 상관없는 물건들만 들어 있 어야 했습니다. 철수할 당시 아직 전 직장을 계속 다닐지, 아니면 그만두고 자카르타로 돌아와야 할 지 확신이 서지 않던 시절이었으므로 내가 굳이 남겨 두었던 것은 간단한 옷가지들과 버리기 직전 인 약간의 주방도구, 낡은 이불보 정도였는데 남 다른 준비성을 가진 아내는 다른 요긴한 물건들을 곳곳에 끼워 놓았습니다. 어떤 가방에서는 멸치액 젓도 나왔습니다.
그 가방들 중 한 개의 지퍼를 열면서 난 낮은 목 소리로 중얼거렸습니다.
“이거 뭐, 컴컴해서 하나도 안보이네…”
토요일 오후 대낮에 짐을 풀고 있는데도 가방 안 이 시커멓게 보이는 건 필시 그림자 때문이라 생 각했습니다. 옆에서 일을 돕던 에피와 릴리는 같 은 직장 OB들이었는데 그들은 그들대로 다른 가 방들을 풀며 주방으로, 식탁 위로 분주하게 물건 들을 옮기느라 나한테 신경 쓸 겨를이 없어 보였 습니다. 가방 안에서 확 풍겨 나와 내 얼굴을 강타 하는 시큼한 냄새. 가방 안 그 시커먼 그림자가 파 르르 떨리고 있었습니다.
“으아악!!!!”
생전 그렇게 놀란 적이 없었습니다. 막 가방 지 퍼 끝까지 밀려 나온 것처럼 보인 그림자는 사실 그 수를 셀 수도 없는 바퀴벌레 군단이었던 것입니다. 가방은 몰려나오기 시작한 바퀴벌레 떼에 파묻혀 일순간 사라져 버린 듯 보일 정도였고 밀려드는 파도처럼 서로의 몸 위를 올라타며 무섭게 달려드는 영화 속 좀비들처럼 한꺼번에 몰려나와 거실 타일 바닥에 무너지듯 아무렇게나 착지해 바 로 산개하는 바퀴벌레들은 애당초 그렇게 철저히 사전훈련을 받은 것처럼 일제히 사방을 향해 내달 리기 시작했습니다.
“꺄아악!!”
비명 이중창. 에피와 릴리가 동시에 식탁 위로 뛰어 올라가며 비명을 질렀고 질겁한 나 역시 체면을 무릅쓰고 식탁 위로 뛰어 올라가자 이번엔 식 탁 다리가 금방이라도 부러질 듯 삐걱거리며 휘청거렸습니다. 그 위에서 본 건 얼마 크지도 않은 그 가방에서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바퀴벌레 떼의 노 도와 같은 질주였습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아내는 그 가방에 순창 고추장을 한 통 넣어 두었던 것입니다.
‘저걸 잡아? 말아?’
그런 생각을 하며 1초 사이에 수백 번은 망설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제 막 임대한 새 집에서 저 정도 숫자의 바퀴벌레들을 식솔로 거느리고 살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난 어느새 벗어 든 운동화를 두 손에 들고 번개처럼 식탁에서 뛰어내려 초고속으로 타일바닥을 마구 두드리며 훑어 나갔고 뒤이어 두 여자도 크리넥스 통이며 두터운 전화번호부를 들고 가세하면서 거실에서는 인간과 바퀴벌레 들의 불꽃 튀는 사투가 벌어졌습니다.
전쟁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그 전투에 서수많은 바퀴벌레 시체들이 거실 타일바닥에 산산조각 나 널브러졌지만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수 의 바퀴벌레들이 후일 게릴라전을 기약하며 어디론가 빠져나가고 말았습니다. 그 길로‘바이곤 (Baigon)’‘힛(HIT)’등 바퀴벌레 스프레이 세 통인가를 사 집안 곳곳에 뿌려댄 끝에 상당수 의 잔당들을 소탕했지만 그 후로도 오랫동안 바퀴 벌레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사방천지에 출몰하며 소름을 돋게 했습니다.
인도네시아의 바퀴벌레들은 한국 것들보다 훨씬 커서 다 큰 놈들은 보통 검지손가락 크기쯤 되 고 제대로 살이 오른 놈들은 그 두 배쯤 되기도 합니다. 더욱 소름 끼치는 사실은 이 놈들이 스스로 잠자리나 메뚜기라고 착각하고 있는지 툭하면 날아다닌다는 것이었습니다. 뭔가 중대한 임무라도 띈 것처럼 더듬이를 꼿꼿이 세운 심상찮은 표정으로 헬리콥터 소리 같은 걸 내면서 일직선으로 곧 장 날아갑니다. 그런 놈이 내 눈 앞으로 날아들면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은 물론이고 뒷덜미가 쭈뼛 하면서 머리털마저 곤두서 버리죠.
바퀴벌레 가방을 연 이후로 그런 놈들이 매일 집 안에 출몰했습니다. 가방을 집 밖에서 열었어야 했다고 후회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잠잘 때 안경과 자명종시계가 놓인 머리맡 에는 살충제 스프레이도 늘 한 통을 놓아 두어야 했습니다. 간혹 대청소를 하다 보면 침대 밑에 죽 은 바퀴벌레들이 우글거렸는데 그 놈들은 옷장 속 이나 신발 속, 심지어 양복 주머니까지 정찰대를 보냈다가 전우의 시체를 한두 마리씩 남겨놓고 사라지곤 했습니다.
옆집이 이사간 후 바퀴벌레들 상당수가 그 빈 집으로 이주했는지 떼를 지어 출몰하는 일은 점점 잦아들었습니다. 그러던 중 동업하던 동료들이 종종 자카르타에 출장 나왔는데 짠돌이 박사장은 절 대 호텔에 묵는 법이 없는 번거로운 친구였습니다. 당시 에어컨 달린 방이 하나 뿐이어서 박사장 이 출장 오면 같은 방에서 함께 자야 했으니 말입니다. 난 침대 밑, 옷장 속, 창고로 쓰던 간이 2층 의 작은 방까지 철저히 살충제를 뿌리고 대청소한 후 공항에서 박사장을 맞았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 내 일인용 침대에서 멀찍이 떨어 진 문간에 꺼내놓은 손님용 매트리스에 박사장 잠 자리를 마련해 놓고 잠을 청하려는데 어디선가 낯 익은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바스락 바스락…
난 이 소리를 잘 알고 있습니다. 바퀴벌레가 천 위를 기어 다니는 소리죠. 잡으려 들면 순식간에 도망칠 테니 여기서 관건은 우선 소리만으로 그 구체적인 위치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미리 마음 속으로 결정한 무기를 단숨에 집어 들 고 소리가 난 지점을 재빨리, 온 힘을 다해 가격하 는 것입니다. 물론 그 사이 불도 켜야 합니다.
하지만 그 소리는 내 침대 안에서 들려오고 있었습니다. 난 은연 중에 내공을 청각에 집중했습니다. 그렇게 포착한 위치는 바로 내 배게 밑. 소름 이 돋았어요. 아까 오후, 공항으로 출발하기 전 열 심히 뿌려댄 살충제에 대한 복수였을까요? 바퀴 벌레 수뇌부는 내 침상에 자객을 침투시킨 것입니다. 무서운 놈들입니다.
그런데 이 자객들을 상대할 적당한 무기가 없었 습니다. 아! 골프채가 있습니다. 침대 발치의 방문 뒤쪽에 세워둔 골프가방이 있었습니다. 입주 초창 기엔 그 골프가방 안에서도 죽은 바퀴벌레들이 1 개 중대는 나왔고 그 중엔 아직 시퍼렇게 살아 있 는 놈들도 있어 7번 아이언으로 거실 타일 위에 서 미친 듯이 스윙연습을 한 적도 있었습니다. 생 각해 보면 골프채한테 좀 미안합니다. 필드엔 거 의 데려가 주지 못하는 주제에 주로 그런 특수용 도에만 쓰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바퀴벌레들이 나 한테 앙심을 먹은 건 그 간의 학살현장을 돌이켜 보거나 전화번호부로부터 시작해 점점 더 창조적 으로 선택되고 있는 신무기들을 생각해 보면 무리 도 아닙니다.
자, 이제 작전개시입니다. 침대에서 강시처럼 몸 을 화들짝 일으켜 세우며 몸을 날려 골프가방에 서 7번 아이언을 뽑아 들고 전등 스위치를 올리 는 데까지 0.8초. 그리고 배겟닛이 해어지도록 골 프채로 두드려 패는 건 1분. 잠들다가 화들짝 놀 라 깬 박사장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입을 다 물지 못합니다.
배겟닛 밑을 들춰보니 아무것도 없었어요. 하지 만 그 동안 경험치를 한껏 높인 내 바퀴벌레 레이 다가 잘못된 적은 한번도 없었습니다. 침대 쿠션 을 살짝 들춰보니, 아니나 다를까 바퀴벌레 두 마 리가 허둥지둥 퇴로를 찾고 있었습니다. 평소에는 두 손으로 낑낑거리며 들어 올리던 무거운 침대 쿠션이 초능력자가 된 것처럼 아드레날린이 마구 분비되는 초긴장상태에서 한 손으로 홱 제쳐집니 다. 그 상태에서 그대로 골프채로 가격! 침대의 나 무가 퍽! 하며 먹어버리는 소리를 내지만 바퀴벌 레들은 A4용지 두 장 두께 차이로 몸을 피합니다. 내 스윙의 정확성을 믿어서는 안되는 일이었어요. 남들이 재봉틀 박듯 쭉쭉 직선으로 나가는 골프코 스에서는 나는 촘촘하게 오버로크 치며 버벅거리 는 실력이었거든요.
회심의 일격을 피한 바퀴벌레들은 침대 밑으로 급속 행군! 이번엔 무서운 힘으로 침대마저 한 손 으로 홱 제치면서 다시 한번 골프채로 망치질! 하 지만 바닥 타일만 힘없이 깨질 뿐 바퀴벌레 두 마 리를 지그재그를 그리며 쏜살같이 빠져나갑니다. 이제 골키퍼와 일대일 상황. 박사장이 자기 앞으 로 달려드는 바퀴벌레들을 향해 갑자기 베개를 집 어 듭니다.
퍽!
“야! 잡았어! 잡았어!”
베개로 그 밑에 깔린 바퀴벌레들을 압박하면서 싱긋 웃고 있는 박사장 이마에 땀방울마저 송글 거립니다.
“잠깐 기다려! 놓치면 안돼!”
이젠 어쩔 수 없습니다. 제 몫을 못한 7번 아 이언을 엉망진창이 된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던 져 놓으면서 잠깐 3번 우드를 생각해 봤지만 여전 히 어림도 없고 결국 한 맺힌 전화번호부를 거실 에서 갖고 뛰어 들어왔습니다. 그 다음 벌어진 잔 혹한 장면들은 차마 눈뜨고 키보드 두드릴 수 없 습니다.
자객들을 처치하고 나니 급격히 피로가 몰려 왔 습니다. 박사장의 얼굴은 여전히 상기되어 있었고 요. 그런데 이 때 또 들려오는 소리.
바스락…
그럴 리가요? 바퀴벌레 수뇌부가 제 2의 자객팀 을 보낸 걸까요?
“또 있어. 가만히 있어 봐.”
“다 잡았잖아? 난 아무 소리도 안들리는데…?”
이번에는 머리 위에서 나는 소립니다. 문득 고개 를 드니 커튼 레일링 위에서 내밀던 머리를 흠칫 도로 집어넣는 녀석이 보였어요.
“저 위!”
내가 벌떡 일어서자 박사장도 엉겁결에 따라 일 어나며 커튼 위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이놈은 항공단 소속입니다. 커튼 위에서 기도비닉을 유지 하며 침착하게 사태를 주시하던 이 놈은 상황이 불리함을 보고 내뺄 심산이지만 빨간 마후라답게 최후의 일격을 가하기로 작정하고 있었습니다. 각 질 날개 밑의 잠자리 날개 같은 것을 활짝 편 이놈 은 순식간에 커튼 위에서 이륙하며 급강하, 저공 비행을 감행한 것입니다. 푸타타타 하며 예의 그 헬리콥터 소리 같은 것을 내면서 말입니다.
“우와아아아아악!!!”
이 비명은 박사장이 지른 것인데 나중에 그가 애써 변명한 말을 옮기자면 자기 코앞으로 날아들던 바 퀴벌레는 하나도 무섭지 않았지만 내가 급히 몸을 돌리며 7번 아이언을 다시 잡는 모습에 질겁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나도 내 실력을 아는데 박사장 얼굴 을 향해 예의 살인적인 스윙을 할 리 없는 일입니다.
뒤로 엉거주춤 물러서던 박사장은 이불이 발에 꼬이면서 엉덩방아 찧고 뒷통수를 벽에 냅다 부 딪히고 말았어요. 그런 그의 이마 위를 스치듯 지 나간 바퀴벌레는 열린 문을 통해 거실의 어둠 속 을 날아 유유히 사라져 갔습니다. 적이지만 대단 한 놈입니다.
그날 가벼운 뇌진탕을 일으킨 박사장은 그 후 자 카르타에 올 때마다 호텔에 투숙하는 좋은 습관을 갖게 되었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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