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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뉴스 연재] 무임승차

beautician 2016. 11. 8.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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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뉴스 2016. 10월호 연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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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량들이 난폭하게 속력을 내는 도로에서 대형트럭과 컨테이너로리들 틈에 끼어 능숙하게 지그재그로 차를 몰던 그는 강렬한 음악소리 사이에 간간히 들려오는 어떤 기묘한 소리가 신경쓰여 카스테레오를 끄고 귀를 기울였습니다. 분명 아기 울음소리 같은 게 들리고 있었어요. 있지도 않은 갓난아이 울음소리가 달리는 차 안에서 들려오는 것은 분명 좋은 징조가 아닙니다.

  그의 다이하추 페로자는 94년 형 투도어 찝이었는데 이젠 자카르타 도로에서 거의 볼 수 없는 구식 모델입니다. 당시에도 새 차는 아니었지만 아기귀신이 붙을 정도로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까지는 아니었고 별로 넓지 않은 공간을 한번 휙 둘러보는 것만으로 차 안을 떠돌아 다니는 도깨비불이 없다는 건 충분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아까 그 아기 울음소리는 도대체 어디서 들려온 것일까요?


  바야흐로 수하르토 정권의 철권독재를 무너뜨린 1998년 5월의 민주화운동과 엄청난 인명피해를 동반한 유혈폭동이 맹위를 떨치며 자카르타 전역을 초토화시킨 지 얼마 되지 않던 시절, 그가 북부 자카르타 소재 짜꿍 지역 주택 단지인 따만모데른에 살 때였습니다. 수많은 원혼들이 떠돌아 다녀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을 시기였지만 자기 차에 귀신이 붙는 것만큼은 그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중부 자카르타의 한 아파트단지 경비원들 사이에서 떠돌던 귀신이야기가 있었습니다. 한 운전사가 겪은 일인데 그가 일하던 집의 주인 가족들이 아마 술라웨시 어딘가에 크루즈 여행이 라도 떠났던 모양이죠. 신새벽에 딴중쁘리옥 페리 선착장까지 주인가족들을 데려다 주고 돌아오던 운전사는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어스름 속에 갑자기 나타난 일단의 사람들을 셈뻬르 갈래길에서 치고 말았습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 졸음운전을 했던 모양이죠. 그러나 차를 세우고 뛰어나가 보았을 때 도로에 널브러져 있어야 할 사람들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한 두 명도 아닌 여러 명이었는데 말입니다. 뭔가 석연치 않았지만 실제로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은 단순한 착각이라면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운전사는 황망한 마음을 추스르며 다시 차에 올랐는데 한참을 가다 차안 룸미러에 이상한 것들이 비치고 있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아까 자기가 치었던 사람들이 뒷좌석에 우글거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돌아보면 아무도 없지만 룸미러에만 비치는 그들은 핏기 없는 섬뜩한 얼굴을 하고서 운전사의 등 뒤로 손을 뻗쳐 어깨와 뒤통수를 잡아당기려 하 고 있었습니다. 몇 번씩이나 사고가 날뻔 하면서 간신히 아파트에 도착한 운전사는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에서 차 안을 가리키며 경비원들에게 헛소리를 했다고 합니다. 무서운 이야기였어야 했는데 들을 당시엔 그 와중에도 차를 버리지 않고 끝내 목적지까지 가져온 대단한 운전사의 놀라운 책임감을 그는 감탄하고 있었습니다.


  아무튼 그런 비슷한 일이 이제 벌어지려는 모양인데 그래도 도의적으로 이건 아니죠. 시간이 오전 10시를 막 지나고 있었어요. 비록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쾌청한 날씨는 아니지만 시간적으로 귀신이 나와도 될 배경은 절대 아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아기 울음소리는 여전히 들려왔습니다.

 

그런데 잘 들어보니 꽤 귀에 익은 소리였습니다. 오래전 그가 상무대 훈련을 마치고 처음 발령받은 전방부대는 군사분계선에서 2킬로미터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는데 그곳에서의 첫날 밤, 숙소 밖에서 들려오는 아기 울음소리에 그는 소름이 돋았습니다. 민가가 가까이 있을리 없는 전방부대에서, 그것도 칠흑 같은 한밤중에 갓난아기가 버려져 있을리 만무한 일이었으니까요. 어딘가 구슬픔 마저 느껴지는 그 울음소리가 방문 밖을 자꾸 어른거리기에 6.25 당시 격전지였던 그곳에서 당시 죽은 아기원혼들이 아직도 돌아다니는 거라고 그는 간단히 수긍해 버렸고 그러자 무서운 생각보다 측은한 느낌이 가슴 속에서 샘솟았습니다.


  다음날 아침 상황실에서 전임소대장이었던 이중 위에게 그런 감회를 말하자 이중위는 삼키려던 커피를 스프레이처럼 내뿜으며 깔깔 웃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아기 울음소리라고 생각했던 것은 사실 고양이 울음소리라는 거였어요. 그의 부대 뒤쪽으로 펼쳐진 야산에는 야생고양이들이 많이 살고 있었는데 당시 그의 숙소가 PX 바로 옆이었으니 밤마다 고양이들이 내려와 쓰레기통을 뒤지며 울어댄 것입니다. 그것도 모르고 혼자 턱도 없는 감상에 젖었다는 생각에 그는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그날 밤 또 다시 아기 울음소리를 듣고서, 귀신을 보더라도 절대 놀라지 않겠다는 각오로 문을 열어 젖혔을 때 정말로 고양이 수십 마리가 영롱한 달 빛 아래 숙소 앞을 어슬렁거리고 있었습니다. 발정 난 고양이들이 그런 소리를 낸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그런데 차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오히려 낑낑 앓는 새끼고양이 같았습니다. 결국 차를 세우고 좀 자세히 살펴보지 않을 수 없었어요 하지만 그 위치가 하필이면 딴중쁘리옥 항구 앞. 유지보수 상태가 형편없는 도로변 좁은 보도를 따라 쭉 세워진 철조망 너머로 하늘을 찌를 듯 쌓여 있는 컨테이너 빌딩들이 끝없이 펼쳐져 있고 그 뒤로는 컨테이너 크레인들이 머리꼭지를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비록 아침시간이지만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단정히 틀어 맨 그와 같은 외국인들이 함부로 차를 세우기엔 분명 적당한 곳이 아니었습니다. 선원들을 위한 싸구려 선술집들과 클럽들이 즐비 하게 늘어선 그곳은 대형 차량들이 경주라도 하듯 쏜살같이 달리고 있었지만 인도엔 인적이 드물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차를 갓길에 세우고 차 밑을 여기저기 들여다보는 사이 어느새 적잖은 남자들이 어디선가 스물스물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대체로 무법지대로서 악명을 떨치던 딴중쁘리옥은 자카르타 폭동 당시 비교적 피해가 경미했던 북부자카르타에서 유일하게 아수라장이 되었던 곳임을 기억해 내면서 그의 머릿속 경고등이 점멸하며 비상 사이렌을 울렸습니다. 공습경보, 공습경보.


  한 무리의 사람들이 어느새 등 뒤에 바짝 다가온 것을 발견한 그는 허겁지겁 차에 올라 시동도 걸기 전 우선 도어락부터 잠갔습니다. 우범지대에서 외국인은 무조건 조심하는 게 최고입니다. 그리고는 황급히 엑셀을 밟아 질주하는 대형차량들 사이로 잽싸게 끼어들었습니다.


아까 몇 번씩이나 들여다보았던 차 밑엔 아무것 도 없었습니다. 만약 고양이가 있었더라도 차를 세웠을 때 이미 뛰어 내렸을 테죠. 그래도 또 울음소리가 들린다면 그땐 정말 귀신을 의심해 봐야 합니다.


  톨게이트 입구가 가까워지면서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새벽에 이미 한 차례 엄청나게 쏟아 부은 빗물이 아직 곳곳에 고여있던 도로의 경사진 부분엔 폭우가 쏟아지자 금세 급류가 휘 몰아쳤습니다. 차량 지붕을 때리는 세찬 빗소리가 귀를 먹먹하게 할 정도였는데 그 소리를 뚫고 울음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한 것은 짜왕 방면으로 톨 위를 한참 달리던 때였습니다.


  차를 세울 마땅한 장소를 찾기 힘든 고가고속도 로에서 계속 뒤따라 다니는 정체불명의 울음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것은 정말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아무래도 고양이 울음소리가 맞는다는 확신도 들었어요. 요즘 세상에 무슨 귀신! 그러니 이성적으로도 그렇게 추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보닛을 열어보면 뭔가 중요한 부품이 통 째로 빠진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듬성듬성 빈 공간이 많은 페로자 찝엔 정차 중일 땐 고양이 일개 중대가 들어가 놀아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한참을 달려와 뜨겁게 달아오른 엔진이나 복잡한 배관 틈에 굳세게 매달려올 만한 슈퍼 고양이가 있다는 얘기는 어디에서도 들은 적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고양이 소리는 보닛 쪽이 아니라 차 뒤쪽에서 들리는 것 같았는데 그쪽에 있는 것들은 차 동축과 쇽업소버 등 고양이가 끼거나 걸리면 치명 적인 것들뿐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시속 80km 넘게 달리는 차 안으로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울음소리는 지금 그 뒤쪽 어딘가에 아직도 살아있는 고양이가 꼼짝 못하게 끼어 있다는 증거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끼이지 않아 움직일 수 있었다면 아까 딴중쁘리옥 앞길이나 그 전에 차를 세웠던 KBN 공단의 봉제공장 앞에서 벌써 뛰어 내렸어야 했습니다.


  고양이가 아직 죽지 않을게 틀림없으니 이제 그는 도로 한 가운데서라도 차를 세우고 그 놈을 꺼내 줘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점점 거세지는 빗줄기가 그의 일말의 양심을 귀찮다는 감정과 타협하 게 만들었어요. 게다가 대형차량들이 질주하는 고속도로에서 차폭의 반도 안 되는 갓길에 차를 세우고 뭔가 작업을 하려는 것은 목숨을 내거는 일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목적지인 빤쪼란의 사무실까지는 이미 반쯤 달려온 상황. 이제 꺼내 주더라도 고양이는 어딘가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을 것 이고 어쩌면 이미 걸레처럼 만신창이가 되어 있을 지도 모릅니다.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와이퍼 사 이로 전방을 바라보는 그의 눈앞엔 바퀴 어딘가 에 꼬리나 뒷다리가 끼어 바퀴가 한번 돌 때마다 휘돌려져 아스팔트 바닥에 있는 힘껏 머리를 내다 꽂고 있는 고양이의 모습이 자꾸 어른거렸습니다. 이제 도로에서든 사무실건물 주차장에서든 차를 세운 후 그렇게 너덜너덜해진 고양이 시체를 차바퀴나 회전축 어딘가에서 끌어내야 할 것이고 어쩌면 그는 차 밑 어딘가에 미처 수습하지 못한 고양이의 신체 일부를 매단 채 한동안 자카르타를 돌아다니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런 끔찍한 상상이 꼬리를 물었습니다. 계속 들려오는 울음소리로 봐서는 그 정도까지 처절한 상황은 아닐지 모르나 그가 아는 한,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차 밑 그쪽으로는 고양이가 올라타거나 매달릴 안전한 공간이 절대 없었고 그런 환경에서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는 고양이는 없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날 아침 그가 집을 나설 때 한 무리의 고양이들이 집 앞 골목을 배회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엄마고양이와 네 마리의 새끼 고양이 들이었는데 그 전부터 종종 눈에 띄던 녀석들이었습니다. 새끼들은 그날 아침 집 앞 골목 일대의 쓰레기통들을 뒤지며 난장판을 만들고 있었는데 엄마고양이는 천방지축인 애들 때문에 잔뜩 화라도 났는지 비어있던 옆집 차고로 기어들다가, 자길 보고 있었다는 죄밖에 없는 그에게 콧등에 주름을 잔뜩 잡고 송곳니를 드러내며 마치 압력밥솥에서 수증기가 빠지는 듯한 쉬-익 하는 소리로 독기를 뿜으면서 신경질을 부렸습니다. 사실 엄마고양이는 언젠가부터 그를 보기만 하면 그런 식으로도 발을 해왔습니다.



  그 네 마리 새끼들은 그가 차에 시동을 걸 때까지도 차 주변을 뛰어 다니면서 쓰레기통에서 발견한 생선조각을 놓고 추격전을 벌였는데 지금 저 밑 어딘가에서 비명을 지르고 있는 녀석은 어쩌다가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그 중 한 마리일 것이라는 판단이 섰습니다. 생판 모르는 녀석도 아니고 평소 알고 지내던 놈이라니 그의 마음은 더욱 착잡해졌습니다.


  그 녀석들이 주택단지 수영장 입구 화단에서 태어난 것이 대충 3개월쯤 전의 일이었고 그때 엄마고양 이의 배 밑으로 파고들며 젖을 빨던 손바닥 1/3만한 크기의 새끼들은 아직 눈도 뜨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수영장에서 그 녀석들을 들여다 볼 때 평소 성질 더러운 어미도 그때만은 출산에 힘을 다했는지 별로 움직이지도 못했고 사람들이 새끼고양이를 안아보아도 송곳니를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화단에 고양이 보금자리를 만들 어준 사람은 수영장 관리인이었는데 누군가의 악의적인 장난으로 흉측하게 잘리거나 부러지고 휘어진 꼬리를 한 고양이들이 대부분인 자카르타에서 애완동물을 키울 여유가 전혀 없었을 수영장


  관리인이 아무도 돌보지 않는 길고양이들을 보살 펴 주는 것은 사뭇 의외였습니다.


“저것들도 알라가 주신 생명인데 그냥 버려둘 수는 없죠. 하지만 당분간이에요. 이제 새끼들이 눈뜨고 뛰어다니게 되면 쫓아내지 않아도 자기들이 알아서 나갈거예요.”

 

 관리인의 말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새끼들이 눈을 뜨자 화단의 보금자리는 비어있기 일쑤였고 고양이들은 온 동네를 싸돌아다니며 사고를 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거의 매일 그의 눈에 띄었는데 대체로 흰색 털이 수북한 엄마고양이와 달리 새끼들은 누런 줄무늬 두 마리와 검정 줄무늬 두 마리였습니다. 주택단지에 서식하는 많은 길고양이들 중 그들이 특히 눈에 띈 것은 검정 줄무늬 중 한 마리가 다른 형제들 반 밖에 안 되는 덩치 의 발육부진이었기 때문이었어요. 그 녀석은 덩치 큰 형제들 사이에게 전혀 기죽지 않고 쫓아다니며 위험할 정도의 장난기를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었습니다. 그 녀석들이 귀여워 그는 일찍 퇴근 할 때면 일부러 사료며 통조림도 사와 차고 앞에 고양이 밥상을 차려놓기도 했는데 오늘 그들 중 한 마리가 그의 차 밑 어딘가에서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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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뉴스 2016. 11월호 연재(하)



 

 마침내 사무실 지하주차장에 차를 세웠을 그는 참담한 심정이 되어 있었습니다. 울음소리가 이상 들려오지 않은지도 이미 한참이 지났습니다. 이제 고양이 시체를 찾아 끌어내야 하는 시간입니다. 사무실 사환 딜러에게 카톤박스를 가지고 내려오라고 전화할 차에 고양이 시체가 있다는 말을 들은 그의 파트너 릴리스는 펄쩍 뛰며 얼른 올라와 손부터 씻으라며 히스테리를 부렸습니다. 아직 고양이를 만지지도 않았는데 말입니다. 하지만 그의 차에서 벌어진 일이니 어차피 뒷수습도 그가 해야 일이었습니다. 직접 카톤박스를 깔고 밑에 기어들어가진 않더라도 시체를 발견 하면 최소한 어느 화단에라도 손수 묻어 주어야겠다고 그는 생각했습니다. 딜라나 주차장 경비원에게 부탁하고 그가 나몰라라 자리를 뜬다면 오늘 죽음을 당한 가여운 고양이는 쓰레기통에 버려질 것이 뻔했습니다.


  차 안에서 손전등을 꺼내 다시 밑을 비춰 보자 빗길을 달린 차에서 아직도 뚝뚝 떨어지고 있는 물방울들이 고양이가 죽어가며 흘린 핏방울처럼 느껴져 그는 설마 하는 마음에 떨리는 손가락으로 살짝 찍어보았습니다. 그건 분명 흙탕물이었어요 하지만 조명 때문인지 그의 눈에는 페로자 찦이 피로 물들어 있는 보였습니다. 그때였어요.


야옹~


  뭐시라? 그는 반사적으로 손전등으로 다시 이곳저곳을 비추어 보았습니다. 하지만 밑엔 여전히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등에 소름이 돋기시작했습니다. 은행에서 돈을 빌려도 원금을 갚기 전에 거치기간이란 있는데 녀석은 죽자마자 쉬지도 않고 바로 귀신으로 데뷔한 것일까요? 그는 다시 몸을 일으켜 주변을 돌아보았습니다. 주차장이 어둡긴 했지만 그의 건너편 끼장 뒤로 끄또쁘락과 가도가도를 파는 깐띤 구내매점이 있었고 거기 앉아 있는 무리의 운전사들이 보였습니다. 로비로 올라가는 계단 앞에는 정복을 차려 입은 경비원도 서있었고요. 정도면 귀신 나올 분위기는 절대 아닌데 저들에 게는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 걸까요?


  미심쩍은 마음에 다시 밑을 헤집던 손전등을 오른쪽 뒷바퀴 위의 시커먼 공간에 비췄을 안에서 불쑥 나타난 작은 얼굴이 그를 소스라치게 놀라게 했습니다. 검정 줄무늬. 발육부진, 녀석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기름통 위에 그런 공간이 있으리라고는 미처 각지도 못했습니다. 쇽업소버 위엔 기름통 위로 통하는 작은 입구(?) 있었고 위에 비교적 넓은 공간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고속으로 돌던 타이어가 쏟아 붓던 흙탕물을 고스란히 뒤집어 손바닥만한 작은 고양이가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입구에 고개를 내밀고 있었습니다. 잡으려고 손을 뻗자 안쪽으로 슬금슬금 도망가는 것이 어딘 가에 있는 것도 아니고 다치지도 않은 것이 명했습니다. 단지 쾌적한 승차감과는 전혀 관계없 좁은 공간에서 험한 도로를 고속으로 달려 탓에 멀미를 하고 있을 것만은 분명했어요. 오늘 아침 어쩌다가 위까지 기어 올라갔던 녀석은 빠져 나올 찬스를 놓쳐 30km 족히 거리를 무임승차해온 것입니다.


  뒤늦게 내려온 딜라와 함께 밑으로 기어들어 흙투성이가 되어가며 고양이를 간신히 끄집어 내는 데에 30 정도 시간과 노력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끔찍한 상상으로 참담해졌던 그의 마음은 이미 따뜻한 안도감으로 푸근해져 있었습니다. 소동을 보고 경비원과 기사들이 모여 들었고 마침 그가 고양이를 안고 밑에서 기어 나오자 모두들 탄성을 지르며 박수까지 쳐주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그의 안에 들어와 안겨있는 투성이 새끼고양이는 구출과정에서 다시 쇼크를 먹은 오돌오돌 떨고만 있었습니다.


갖다 버렸다구??”


  그는 언성을 높이지 않을 없었습니다. 아까 밑을 기며 난리를 치느라 흙투성이가 와이셔츠 소매며 팔뚝을 화장실에서 씻고 돌아오는 사이, 그가 사무실에 풀어 놓은 고양이를 릴리스가 딜라를 시켜 다시 주차장에 내다 버리라 했다는 것입니다. 고양이를 구조하느라 이미 늦어버린 속시간을 대려면 바로 뛰어 나갔어야 하는데 약속 시간은 다시 기약도 없이 뒤로 밀립니다.


집이 짜꿍인데 여기다 풀어 주면 어떡해?”

흙투성이 고양이를 어떻게 사무실에 놔둬요? 여긴 사무실이지 동물원이 아니라구요!”

우리가 오늘 하루만 동물원 차리면 걔는 오늘 저녁에 자기 엄마랑 재회할 있는데 시간을 참아서 고아로 만들자는 거야?”

손님이라도 오면 어떡해요? 고양이한테 커피 타오라고 거에요? 그리고 건물 관리사무실 에서 알기라도 하면 어쩌려구요??”


 말싸움으로 릴리스를 이긴 일은 거의 없습니다. 누구나 종종 억지주장을 하는 법이지만 술라웨시 여인은 자기 주장이 너무 강했어요. 미팅할 때마다 상대방을 손쉽게 설득해 자기 편으로 만들고 이민국이나 노동부, 세무서에서 쳐들어와도 눈썹 하나 까딱 안하고 싸우거나 회유하면서 능구렁이처럼 넘어가는 릴리스는 많은 장점을 여자였고 그래서 그녀의 명의로 회사를 내고 파트너 관계까지 발전한 거지만 눈을 치뜨고 덤벼 때면 바로 얼마 전까지도 그가 자기 월급을 주고 있었다는 사실을 완전히 잊은 보였습니다. 그래도 설마 릴리스가 그를 깔보고 머리 위에 올라 앉으려 리는 없습니다. 자꾸 그렇게 느껴지는 자신이 너무 예민하기 때문이라고 그는 생각했습니다.


 고양이를 사무실에 없다는 릴리스의 말도 충분히 일리가 있지만 고양이가 사람이 아니라고 해서, 그리고 그의 페로자에 몰래 무임승차 해왔다고 해서, 이제 와서 절대 불가능하지도 않은 아주 작은 배려를 아껴 가족들과 생이별시키는 것은 너무 비인간적인 처사입니다. 모르긴 몰라도 분명 비고양이적이기도 것입니다.


  “오늘은 놈이 손님이야! 손님이라고! 어쩌자고 손님을 맘대로 쫓아내? 무조건 찾아 !!”


  허탈 , 노여움 반에 그렇게 화를 내며 그는 사무실을 나섰습니다. 비록 늦었지만 약속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 합니다. 그날 아침 일찍 KBN 공단에서 검사한 자켓들과 오후에 찌비농 공장에서 검사할 우비들은 주말까지 선적되어야 하는 것들이었습니다. 시간을 마냥 미룰 없는 일입니다.


 고양이를 구해 주느라 검품을 없었어요...

 명색이 비즈니스인데 바이어나 공장에게 이런 소리는 죽어도 없는 일입니다. 고양이를 버리고 돌아온 딜라는 고래싸움에 터진 새우 꼴이 되어 다시 고양이를 모시러 허겁지겁 주차장으로 내려가야 했습니다. 릴리스와 팽팽한 눈싸움 공방을 결과였죠. 약속장소인 찌비농으로 달려 가던 자고라위톨에서 새끼고양이를 무사히 되찾아왔다는 릴리스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퉁명스럽기 그지없었지만 지하 주차장에서 천방지축 도망치는 고양이를 잡으러 땅을 뻘뻘 흘리며 뛰어다녔을 딜러의 모습이 선하게 떠올라 그는 혼자 미소 짓지 않을 없었습니다.

 

 그가 사무실에 다시 돌아왔을 때 책상 옆 카톤박스 안에 웅크리고 있던 새끼고양이는 릴리스 못지 않게 사뭇 심기가 불편해 보였습니다. 단식투쟁이라도 하는 중인지 태어나서 한 번도 먹어보지 못 했을 닭다리에 우유까지 줘 보았지만 그 녀석은 입도 대지 않았고 그가 박스 안에 손을 넣어 쓰다 듬으려 하면 이빨과 발톱을 곤두세우고 으르렁거렸습니다. 아까 차 밑에서 끌어낼 땐 얌전하던 녀석이 말이죠. 그건 엄마한테 물려받은 유전자의 영향이거나 충격에서 많이 회복되었다는 증거일 수도 있었습니다.


  “구해 줬다고 뭐 영웅취급 받을 줄 알았어요? 직 원들한테나 그만큼 해봐요.


  아오, 저 싸가지.

  하지만 릴리스가 빈정거리듯 말해도 지금은 아까 같은 전투모드가 아님을 말투에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사실 릴리스도 마음 약하고 섬세한 여자입니다. 최소한 몇 년 전 면접 보러 왔던 그녀는 분명 그랬습니다. 파트너로 발전한 지금은 잘 보여주려 하지 않아 그렇지 심성은 여전할 거라 그는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단지 금방 품을 떠날 새끼고양이에게 쉽게 정을 주지 않으려 하는 것뿐이겠죠.

  

  “어디 한 번 같이 가봐요. 고양이들이 고맙다고 고개라도 까닥 하는지.

 

 퇴근길에 릴리스는 고양이 박스를 자신이 직접 들고 함께 차에 올랐습니다. 그건 누가 봐도 화해의 제스처였습니다. 집이 빤쪼란 사무실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빠사르밍구인 릴리스가 짜꿍에 간다는 건 나중에 한 시간 가까이 혼자 택시를 타고 귀가하는 수고를 감수하겠다는 뜻이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그게 정말 화해의 시도라면 그 역시 그녀를 차에 태워 빠사르밍구까지 데려다 주는 화기애애함을 보여줘야 합니다. 아까 짜증내서 미안하다는 한 마디면 될 것을 쓸데없는 자존심이 참 비효율적으로 먼길을 돌아가게 만듭니다.


혼자 가도 된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그는 애써 참았습니다. 모처럼 찾아온 휴전분위기를 굳이 망칠 필요는 없었으니까요. 처음 만났을 때 만해도 조신하던 릴리스의 버릇을 저렇게 다 버려 놓은 건 따지고 보면 다 그의 잘못이기도 했습니다. 일로 만났으니 칼같이 선을 긋고 그 선을 넘으면 불같이 화를 냈어야 했는데 언젠가부터 늘 예뻐하고 칭찬하고 응석을 받아 주기만 했던 거죠. 그는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짜꿍 집에 도착했을 때 석양이 뉘엿뉘엿 지는 중이었고 동네사람들은 차에서 박스를 끄집어 내 는 그들을 유심히 바라보았습니다. 몇 년 동안 변함없이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는 동네사람들의 시선은 언제나 부담스러웠습니다. 그는 그 골목에서는 물론 단지 전체를 통틀어 몇 안되는 외국인 입주자들 중한 명이었습니다. 내로라 하는 외국인들이 남부 자카르타의 뽄독인다나 끄바요란 지역에 밀집해 살던90년대 말, 북부 자카르타의 허름한 주택지에 사는 한국인은 현지인들에게 호기심의 대상이었습니다. 폭동 직후 자경단을 급조해 온갖 살벌한 도검류를 들고나온 주민들은 함께 순찰을 도는 외국인의 모습을 신기해 하며


  서툰 영어로 말을 걸어왔는데 그 후로 그는 동네 에서 벌어지는 온갖 잔치며 대소행사에 초대를 받곤 했습니다. 이제 그가 낯선 여인과 함께 큰 박스를 들고 차에서 내리자 옆집 담장 위로 사람들 머리가 자꾸 솟아 올라왔습니다.


  박스를 내려 놓고 옆으로 눕히자 당장 박스에서 뛰어 나갈 줄 알았던 새끼고양이는 박스뚜껑을 밟고 선 채 야옹~ 하며 길게 몇 번을 울어댔습니다. 그러자 눈깜짝할 사이에 여기저기서 고양이들이 뛰어나오기 시작했어요. 그 녀석들입니다. 엄마고 양이, 줄무늬 형제 고양이들. 집 앞은 폴짝폴짝 뛰는 고양이들로 난리가 났습니다. 가족의 정은 동물들도 마찬가지인 겁니다. 그들은 아침부터 종적을 감춘 발육부진 막내를 찾아 하루 종일 온 동네를 뒤지고 다녔겠죠.


  엄마고양이가 가까이 오자 그제서야 발육부진 이 녀석이 박스에서 쏜살같이 뛰어나가 엄마 주변을 돌며 날뛰기 시작했고 형제들도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그 주변을 에워싸며 뛰어 다녔습니다. 기뻐하는 녀석들을 보니 좋은 일을 했다는 생각에 그는 마음이 따뜻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살짝 옆을 돌아보니 짐짓 찌푸린 표정을 짓고 있던 릴리스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지고 있었습니다.


  그의 집 앞에서 볼일을 다 본 고양이들이 공터 쪽으로 몰려가기 시작했는데 그를 홱 돌아보는 엄마 고양이의 눈초리가 심상치 않았습니다. 아니, 저 놈이 고마운 줄 모르고...!


  저 녀석은 그가 마음 고쳐먹은 유괴범이라고 생각하는 게 틀림없었습니다. 그건 다시 한 번만 더 까불면 가만 두지 않겠다는 위협과 경고의 눈초리였어요. 예의 그~하는 독기를 뿜으면서 말이죠. 쟨 도대체 왜 저러는 걸까요? 그는 또 한숨을 내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릴리스 말대로 저 녀 석들은 도무지 고마워 할 줄 모르는 거겠죠. 엄마 고양이가 다시 새침하게 고개를 홱 돌리며 새끼들 뒤를 쫓아 갈 때 그 장면을 본 릴리스는 벌써 깔깔 거리며 요절복통 웃어대고 있었습니다.


  뭐, 설화에 나오는 것처럼 잉어나 거북이를 방생 해 주었더니 나중에 용왕이 꿈에 나타나 감사의 절을 하더라는 식의 전개를 그는 애당초 기대하지도 않았습니다. 고양이들이 몰려와 그의 다리에 몸을 부비면서 막내 돌려줘서 고마워요... 뭐 이런 거 기대하지 않았단 말입니다!


  어쨌든 그는 누가 뭐래도 오늘 좋은 일을 하나 한 셈입니다. 아무도 고마워 하지 않지만 그는 그 날 잠시 고양이들의 천사가 되었던 것입니다. 자부심을 가져 마땅한 일이었습니다.


  “~! 이래!! 하하하!


  그런데도 아직까지 웃음을 멈추지 못해 그의 등을 탕탕치며 깔깔거리는 릴리스를 그는 애써 무시했습니다. 자부심을 갖게 되기보다는 오히려 고양이처럼 냉정함과 살가움 사이에서 종잡을 수 없는 릴리스 이 녀석이 날이 갈수록 버릇없이 굴도록, 그리고 엄마고양이가 그를 볼 때마다 매번 독 기를 뿜으며 덤벼들도록 스스로 방치했던 사실을 그는 많이 반성했습니다. 예뻐하지만 말고 모질게 가르쳤어야만 했던 건데 말입니다. 상대방에게 모질지 못한 것이 그토록 잘못이라면 무임승차한 새끼고양이에게 일단 차비라도 내놓으라 다그쳐야 했던 거라고 그는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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