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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아찌아 한글표기 - 다른 한 쪽의 이야기

beautician 2023. 10. 11. 20:08

거침 없이 한국말 하는 아이들... 한글 도입 14년, 찌아찌아족은 지금

[현장르포] 한글 받아들인 찌아찌아족 한글학당 탐방기

하주희 월간조선 기자 everhope@chosun.com
입력 2023.10.01. 06:59업데이트 2023.10.01. 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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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이 붉은색으로 물들어간다. 깨진 와인병에서 술이 점점 더 많이 흘러나왔다. 6월 26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공항, 입국 수속을 위해 줄을 서 있던 참이었다. 함께 인도네시아에 온 일행이 와인병이 든 쇼핑백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깨진 와인병과 바닥을 적시는 술을 번갈아보고 있는데 공항 남자 직원이 다가온다.

사진=정덕영

“이거 문제가 될 수 있다.”

벽에 붙은 감시카메라를 가리키며 자못 위협조다.

‘술병을 바닥에 떨어뜨린 게 문제가 된다고?’

술병 사고 전에도 그 직원은 기자에게 비자를 왜 사전에 신청하지 않았냐고 추궁하는 둥 뭔가를 원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던 참이었다. (많은 외국인 입국자들처럼 기자도 입국장에서 도착 비자를 발급받을 예정이었다.)

 

비행기를 놓치다

그때 히잡을 쓴 여성 직원이 빗자루와 양동이를 들고 나타났다.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사고 현장을 정리했다. 김이 샜다는 듯 그 직원도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사실 와인병이 깨지는 건 여러 문화권에서 부정적인 징조로 친다. 물론 과학적인 근거는 없다. 믿거나 말거나다.

수속을 마치고 공항 안에 있는 호텔로 이동했다. 호텔에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 날 일찍 바우바우(Bau-Bau)로 향하기 위함이다. 먼저 마카사르로 가는 국내선을 탑승한 후, 거기에서 부톤(Buton)섬 바우바우로 가는 비행기를 갈아탈 예정이다. 바우바우에는 찌아찌아(Cia-Cia)족이 산다. 그들에게 한글과 한국어를 가르치는 정덕영 교장과 바우바우 한글학당이 그 곳에 있다.

다음 날 아침, 기자는 체크인 카운터 앞에서 넋을 놓고 서있었다. 비행기를 놓친 것이다. 꿈이 아닐까.

 

동서 길이가 5150km

물론 비행기를 놓친 직접적인 이유는 기자가 체크인 카운터에 여유 있게 도착하지 않은 것이었다. 세부적인 이유를 굳이 꼽아 보자면 세 가지가 있다.

첫째, 자카르타에서 출발하는 국내선은 국내선이 아니라 거의 국제선이다. 국제선을 타는 마음가짐으로 체크인을 해야 한다는 얘기다. 한국이라면 국내선은 탑승 1시간 전에 가도 충분하다. 인도네시아는 다르다. 일단 공항 진입 과정부터 복잡하다. 수카르노 하타 공항은 1터미널, 2터미널, 3터미널로 이뤄져 있다. 1터미널은 국내선 터미널이고, 2·3은 국내선, 국제선 공용(共用) 터미널이다. 국제선, 국내선 공용이다 보니 공항 안으로 들어가기 위한 보안 검색 절차에도 시간이 걸린다. 주목해야 할 건 국내선의 경우 탑승 터미널과 게이트가 수시로 바뀐다는 거다. 탑승 전까지 계속 확인해봐야 한다. 탑승 전날 확인할 때는 2터미널이었는데 당일 가보니 3터미널인 경우도 잦다. 터미널 사이 이동에도 시간이 많이 걸린다. 30분은 잡아야 한다.

나중에 호텔 프런트에서 직원에게 물었다.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국내선을 타기 위해 보통 몇 시간 전에 공항에 가나요?” 단호한 어조로 “2시간 전이다. 그래야 안전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사실 한국과 사정이 다른 게 당연한 것이, 인도네시아는 한국과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국토의 규모가 엄청 크다. 동남아 적도상에 길고 넓게 자리해 있다. 서울-자카르타 직선거리가 5283km(비행시간 약 7시간)인데, 인도네시아의 동서 길이가 5150km다. 서쪽 끝에 있는 사방에서 메단, 자카르타, 자야뿌라를 경유해 동쪽 끝인 머라우께까지 가려면 국내선 비행시간만 20시간이 걸린다.

 

시간관념 부족한 인니 항공사들

둘째, 인도네시아 항공사들에 문제가 있다. 인도네시아에서 국내선을 운항 중인 항공사로는 라이언 에어, 바틱 에어, 가루다, 시티 링크 등이 있다. 인도네시아 항공사의 시간관념은 여행객들 사이에 유명하다. 국적기인 가루다와 가루다가 운영하는 시티 링크는 그나마 나은 편이다. 라이언 에어는 악명 높다. 출발 시각을 한두 시간 뒤로 미루는 건 다반사다. 운항을 당일에 갑자기 취소하는 일도 흔하다. 얼마나 어이없나 하면, 심지어 일찍 출발하기도 한다. 고속버스도 그러지 않는데 말이다. 기자가 놓친 비행편도 라이언 에어였다.

나중에 부톤섬에서 다시 자카르타로 나올 때도 어김없이 라이언 에어가 추억을 만들어줬다. 예약해놓은 항공편을 갑자기 없애버렸다. 운항이 취소됐다는 것도 출발 당일까지 알려주지 않았다. 뒤이어 예약해놓은 항공편 모두 탑승할 수 없었다.

 

세계 최대 이슬람국가

셋째, 6월 마지막 주가 갑자기 인도네시아의 황금연휴가 되어버렸다. 무슨 얘기인가 하면, 6월 29일(목)은 원래 인도네시아 휴일이다. 이슬람 희생제 ‘이둘 아드하(Idul Adha)’ 종교일이다. 그런데 그 앞뒤 평일도 갑자기 휴일이 됐다.

인도네시아는 세계 최대의 이슬람국가다. 그러나 사우디아라비아나 이란 같은 이슬람국가와는 다르다. 세속(世俗)국가를 표방한다. 이슬람교와 함께 불교, 힌두교, 가톨릭, 개신교, 유교를 국가 종교로 지정했다. 각 종교의 축일마다 다 쉰다.

2016년 기준 전체 인구의 87%가 무슬림이다. 전체 인구가 많다 보니 기독교를 믿는 이들도 2000만 명이 넘는다. 2021년 기준 2억7200만 명이다. 주민등록증에 자신의 종교를 명시해야 한다. 무신론자(無神論者)는 공산주의자로 간주되어 사회에서 배척하는 분위기였다. 최근엔 조금 달라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무신론자라고 떳떳이 밝히기는 어려운 분위기다.

인도네시아 정부가 이슬람 희생제 앞뒤 날도 쉬라고 갑자기 발표했다. 6월 28일(수)과 30일(금)이 ‘권장 공동휴일(Cuti Bersama)’이 되면서 5일 내내 쉴 수 있는 연휴 기간이 되어버렸다. 인도네시아 주요 언론에 보도된 게 6월 20일이니, 휴일 일주일 전에 발표됐다.

어쩐지 공항에 사람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비행기를 놓치고 망연자실해서 다음 비행편을 검색했다. 더 공포스러운 건 비행기 좌석이 실시간으로 다 팔리고 있다는 거였다. 아무리 황금연휴라도 왜 이렇게 사람들이 어딘가를 가려고 할까 의아했다. 부분적인 이유를 나중에 인도네시아 역사를 공부하며 알게 됐다.

1980년대 들어서면서 인도네시아 정부에 오일 달러가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수하르토 정부는 인구 조밀 지역에서 저개발 지역으로 주민을 이주시키는 정책을 추진했다. 이러니 갑작스러운 연휴에 국내선이 난리통이 된 게 이해가 되기도 했다. 실제로 후에 비행기와 배에서 마주친 가족 단위의 여행객들은 대개 고향을 찾아가는 듯했다.

 

‘인도’는 인도네시아 의미

어쨌든 다음 날까지 바우바우에 도착해야 했다. 바우바우시에 먼저 도착해 있는 찌아찌아문화교류협회 측과 연락해 방법을 모색했다. 그 상황에서 최선의 방법은 켄다리까지 비행기를 타고 간 다음, 배를 타는 거였다. 켄다리는 동남술라웨시의 주도(州都)다. 켄다리로 가는 비행기표도 물론 다 팔렸지만, 대기를 걸어놨더니 기적처럼 구해졌다. 기자처럼 비행기를 놓쳐 자카르타 공항에 오지 못해 비행기를 놓친 이들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켄다리에 도착해 공항을 나서니 어느덧 해가 지고 있다. 거리 풍경은 기묘하다. 가게들이 분명 영업을 하고 있고 꽤 많은 사람들이 거리를 걸어 다닌다. 그런데도 거리가 어둡다. 가로등이 거의 없다. 도로 중앙분리대에만 겨우 있다. 차 사고만 나지 말라는 뜻인가. 거리 전체가 어둠 속의 축제를 벌이고 있는 것 같다.

유심히 보다 이유를 알았다. 가로등이 없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 조명의 조도(照度)가 낮다. 영업 중인 상점 내부도 그리 밝지 않다. 전기의 전압(電壓)이 낮아서였다. 무슨 일인지 마트 체인인 ‘인도마트(Indo Mart)’는 무척 환했다. 알고 보니 돈을 따로 들이면 승압(昇壓)을 할 수 있단다.

 

‘흥남 철수’

다음 날 새벽 6시30분, 항구로 향했다. 부톤섬으로 가는 배를 타러 가는 길이다. 바우바우 한글학당 측에서 알음알음으로 현지인을 통해 표를 구해줬다.

정말 당황하면 웃음이 나올 수 있다는 걸 혹시 아는지. 항구에 도착해 나도 모르게 아하하하 웃음이 터졌다. 3배쯤 과장하면 흥남 철수 같은 광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그리 크지 않은 배에 올라타려 수백 명이 아우성이다. 배 2층 갑판으로 막무가내로 기어올라가는 이들이 보였고, 배 안으로 들어가는 좁은 입구 안팎으로 수백 명이 거품처럼 몰려 있었다. 모두 표를 들고 있긴 한데, 과연 저 무리에 끼어 배를 탈 수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어안이 벙벙해서 서 있는데 배를 예매해준 현지인 남성이 재빨리 선원 한 명을 붙잡고 뭐라뭐라 말한다. 그러자 선원이 억지로 길을 만들어줬다. 그들이 아니었으면 표를 100장 들고 있어도 못 탔을 거라 확신한다.

간신히 자리에 앉고 보니 바닥이고 선반이고 엉덩이를 붙일 수 있는 모든 곳에 사람들이 앉거나 서 있다. 아기까지 둘러메고 서서 가는 이들을 보니 자리에 앉아 가는 게 미안할 지경이다. 8시가 되니 배가 출발한다. 집으로 가고 있기 때문일까. 선실 안엔 기대감 같은 게 떠다녔다. 배가 흔들리자 사람들이 ‘우우’ 하며 재밌다는 듯 소리를 질렀다.

 

유명해진 찌아찌아족

앞자리에 앉은 여성들과 대화를 나눴다. 물론 번역 앱을 사용했다. 그들은 기자에게 “어디 가냐”고 물었다. “부톤! 찌아찌아”라고 했더니 “아” 하면서 단박에 고개를 끄덕인다. 여정 도중 만난 인도네시아인들에게 “한글을 채택한 찌아찌아족을 아는가” 물었더니 많은 사람이 안다고 대답했다. 찌아찌아족이 한글을 채택해 상당한 홍보 효과를 거뒀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바우바우에는 한때 ‘코리안 빌리지(한국 마을)’도 있었다. 한복을 입고 기념촬영도 할 수 있는 일종의 작은 한국 거리다. 한국에 관심이 있는 인도네시아인들이 꽤 많이 찾았다고 한다. 지금은 운영하지 않는다.

부톤섬에 도착했다. 5시간 걸린다더니 거의 7시간이 걸렸다. 배가 가라앉지 않은 것만으로 감지덕지였다. 승객들은 순식간에 배에서 빠져나갔다. 와중에 짐가방이 없어지지 않은 것은 기적 같았다. 공기 중에 두리안 향기가 떠다닌다. 한국어로 쓴 손피켓을 들고 마중 나온 찌아찌아 아이들이 보였다.

부톤섬의 면적은 4727km²로 제주도 면적(1846km²)의 약 2.5배다. 강원도 인제·평창·홍천을 합한 면적과 같다. 대부분 열대 우림 지대다. 바우바우시의 인구는 16만 명, 13개 민족으로 이뤄져 있는데 이 중 찌아찌아족이 가장 많다. 찌아찌아족은 약 9만1000명이다. 대부분이 이슬람교를 믿는다.

 
 

2010년부터 한글 가르친 정덕영씨

찌아찌아족 초등학생 아이들. 초등학생은 한글을 배우고, 중·고등학생은 한국어를 공부한다. /사진=정덕영

찌아찌아족은 고유 언어인 찌아찌아어가 있지만 사멸(死滅)될 위기에 처해 있다. 젊은이들은 인도네시아어로 소통한다. 언어가 없어진다는 건 그 언어가 담고 있는 이야기들도 없어지는 걸 의미한다. 찌아찌아어는 고유 문자가 없기 때문에 사라져 가는 전통과 기억을 기록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한글을 받아들인 이유다.

찌아찌아족과 한글의 첫 만남은 18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5년 전태현 한국외국어대 말레이·인도네시아어 통번역학과 교수는 국제학술대회 참석차 바우바우시를 방문했다. 이때 처음 고유 문자가 없는 찌아찌아족을 알게 됐다. 전 교수에게 이 얘기를 전해 들은 훈민정음학회는 찌아찌아족에 한글 사용을 제안했다. 찌아찌아족은 부족장 회의를 열었다. 한글을 부족의 문자로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14년 전, 2009년의 일이다.

현지에서 한글을 가르칠 교사로 정덕영씨가 선발됐다. 이듬해인 2010년 바우바우시로 떠났다.

 

한국찌아찌아문화교류협회

2011년 정부의 지원이 끊겼다. 세종학당과 정씨는 귀국해야 했다. 찌아찌아 아이들은 돈을 모아 현지 신문에 “선생님이 돌아오게 해달라”는 광고까지 냈다.

정덕영씨의 호소를 듣고, 몇몇 뜻있는 인사들이 모였다. 이들은 사비(私費)를 털어 후원금을 모았다. 사단법인 한국찌아찌아문화교류협회를 만들어 지금까지 후원을 계속하고 있다. 기자와 여정을 함께한 백순진 함께하는음악저작인협회 이사장(4월과5월 리더) 같은 이들이다. 덕분에 한글 교육이 지금까지 이어져왔다.

지난해 8월엔 바우바우에 학교를 세웠다. 1311㎡ 부지 위에 연면적 465㎡ 2층 규모의 건물 안에 한글학당이 자리하고 있다. 교보생명이 건축비를 보탰다.

 

한글 고어 사용하는 찌아찌아족

올해는 한국·인도네시아 수교 50주년이다. 50주년을 기념해 한국 기업과 기관들이 바우바우시에서 힘을 합쳤다. ‘팀코리아’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는 현지에서 기업들과 함께 이번 행사를 기획했다. e러닝 콘텐츠를 만드는 기업인 아라소프트(대표 강정현)는 찌아찌아족이 사용할 수 있는 맞춤형 문서 저작 프로그램을 만들어 기증했다. 맞춤형 프로그램이 필요한 이유가 있다.

찌아찌아족 언어의 발음 특성상 한글 고어(古語)를 문자에 활용한다. 순경음(脣輕音) 비읍(ㅸ)이다. 훈민정음 창제 당시엔 사용됐지만 이후 사용하지 않게 됐다. 영어의 브이(v) 발음과 비슷한 음가(音價)를 가졌던 걸로 추정된다. 찌아찌아어에서는 순경음 비읍을 활용하는데, 이걸 표기할 수 있는 디지털 문서 저작 프로그램이 없었다. 책을 만들 때 손으로 써서 제작했다. 아라소프트는 순경음 비읍을 쓸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라이선스를 기증했다.

KB국민은행은 노트북과 스마트 태블릿 60여 대를 바우바우 한글학당에 기증했다. KB국민은행은 인도네시아에서 활발히 사업을 펼치고 있다. 현지 은행인 부코핀은행을 인수해 KB부코핀(행장 이우열)으로 사업 중이다.

바우바우 현지 협력을 기념하는 행사가 6월 28일 한글학당 앞마당에서 열렸다. 말 그대로 산 넘고 물 건너 간 끝에, 이 행사를 겨우 눈으로 직접 볼 수 있었다. 이상덕 주인도네시아 한국 대사가 직접 참석해 한글학당에 현판을 기증했다. 한국 대사가 바우바우시를 찾은 건 수교 이래 처음이라고 했다.

 

양칠성과 허영

이상덕 대사는 축사에서 인도네시아와 한국의 오랜 인연을 소개했다. 양칠성, 허영 등 낯선 이름들이 들려왔다. 이들의 이름에는 인도네시아와 조선, 일본의 역사가 얽혀 있다.

1942년 3월 일본군은 자바해전에서 승리해 인도네시아를 군정 통치하기 시작했다. 전북 완주 출신인 양칠성은 1942년 2월, 일본군 군무원으로 인도네시아에 왔다. 자바섬에서 포로감시원을 했다. 1945년 일본이 패망했다. 네덜란드군이 인도네시아로 돌아왔다. 양칠성은 조선으로 돌아오지 않고 인도네시아에 남았다. 일본군에서 이탈한 조선인, 일본인 동료들과 함께 인도네시아 독립군으로 활약했다. 1948년 11월까지 네덜란드군과 맞서 싸웠다. 체포된 후 1949년 8월 10일 처형당했다.

허영은 일제 시대 히나쓰 에이타로(日夏英太郎)라는 이름으로 활약한 영화감독이다. <그대와 나(君と僕)>(1941)라는 영화를 만들었다. 허영은 1942년 육군보도반원으로 인도네시아로 갔다. 그 역시 일본 패망 후 아내와 딸이 사는 일본에도, 모국(母國)인 조선으로도 돌아가지 않았다. 인도네시아에 남아 영화인으로 활약했다. 인도네시아 초창기 영화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인도네시아 영화의 아버지’라 불릴 정도라고 한다.

초등학생쯤 될까 찌아찌아족 아이들이 한복을 입고 등장해 아리랑을 불렀다. 바닷바람 속에 울리는 아리랑 노래를 들으며, 아이들의 그늘 없는 미소를 보자 비행기를 놓친 거며, 7시간 배를 탄 기막힌 기억이 슬며시 기화(氣化)되는 것 같다.

 

현지인 교사도 탄생

흐뭇한 표정으로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는 정덕영 바우바우 한글학당 교장. /사진=정덕영

기념식을 지켜보는 정덕영 교장은 담담한 얼굴이었다. 기쁜 마음을 애써 숨기는 듯했다. 2010년부터 지금까지, 가족도 없이 이국 땅에서 혼자 살며 한글을 가르쳐온 그가 아니었다면 한글학당도, 오늘의 기념식도 없었을 것이다. 그에게 물었다.

- 다 그만두고 한국으로 가고 싶을 때는 없었나요?

“있었죠. 교실에서 아이들 가르치는데 이민국에서 와서 체포하겠다고 한 적도 있었어요. 비자 문제 때문이었어요. ‘더 이상은 못 있겠다’ 싶었지요. 아플 때도 그랬어요. 간단한 병인데도 여기서는 고칠 수 없는 병에 걸렸을 때요. 처음에 오자마자 티푸스에 걸렸어요. 쓰러져서 열흘 입원했어요. 치료라고 해봐야 요양하고 나오는 정도였지요.”

- 그런데 왜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나요? 가족과 10년 넘게 떨어져 살고 있는데 그립지는 않나요?

“저도 제가 이렇게 오래 머무를 줄 몰랐어요. 가족들도, 저도 2~3년 있다 귀국할 줄 알았어요. 1년만 더, 1년만 더 하다 여기까지 왔어요. 여기가 인맥(人脈)의 사회거든요. 많은 사람을 알게 됐잖아요. 어느 순간에 칼로 무 자르듯 모든 걸 뒤로하고 돌아올 수가 없게 되어버렸어요. 처음엔 두 개 학교에서 가르쳤는데 지금은 열 개까지 늘어났어요. 현지인 교사도 세 명 채용했고요.”

- 다 버리고 돌아오기 힘들게 됐군요.

“제가 가르친 아이들이 자라서 이제는 보조 교사를 하고 있어요. 월급은 조금밖에 못 주지만 한국어 가르치는 거 괜찮은 일이라고 제가 그 아이들에게 권했어요. 그러니 어떻게 귀국합니까. 저라는 사람을 통해 이 아이들이 한글과 한국어와 인연을 맺었잖아요.”

한글학당에서는 찌아찌아 아이들에게 한글뿐 아니라 한국어도 가르친다. 찌아찌아족이 아닌 다른 종족도 그에게 한국어를 배운다. 현지에서 만난 찌아찌아족 아이들은 놀라울 정도로 한국어를 잘했다. 발음도 좋고, 아이돌이니, 드라마니 한국 문화에도 훤해 대화에 별 막힘이 없었다. 눈 감고 들어보면 한국의 여느 고등학생과 얘기하는 기분이었다. 한두 명만 그런 게 아니라 여러 명이 그랬다.

 

규제 완화하려는 조코위 정부

그는 한국이 그리우면 여객선이 오가는 항구에 간다고 했다.

“‘저 사람들 이제 고향에 가는구나, 이제 가족들 만나겠구나’ 사람 구경하면 조금 괜찮아져요. 아이들 가르치러 교실에 들어가면 다시 힘이 나지요. 한글 교사들도, 아이들도 이제 저를 믿고 따라요. 관공서 직원들과도 알고 지낸 지 벌써 십수 년 됐잖아요.”

인도네시아는 오랜 기간 외부에 배타적이었다. 사람들이 그렇다는 게 아니라, 정부 차원에서 외국의 투자나 진출에 신중했다. 외국 기업의 투자를 희망한다고 하면서도, 외국인 비자 발급엔 까다로웠다. 현 정권인 조코위 정부는 규제를 간소화하겠다고 하지만 아직도 규제의 벽이 만만치 않다. 자카르타 같은 도시라면 좀 나을 수 있지만, 지역에선 폐쇄적인 관행이 심각하다.

이날 기념식에도 이민국에서 나와서 기자가 누구인지 정덕영 교장에게 물었단다. 현지 호텔에 체크인하면 여권 사본이 자동으로 이민국으로 전달되는데, 기자는 비행기를 놓친 탓에 현지 호텔 체크인을 늦게 해서 아직 여권이 전달되지 않아서였다.

 

“보살이 되거나, 미친 사람이 되거나”

정 교장이 그동안 끈질기게 버텨 현지인들과 좋은 관계를 형성해놓은 건, 상당한 일이라는 걸 현지에 가보니 알 수 있었다. 그것도 정부의 지원 없이 민간 차원에서 말이다.

정 교장은 먼바다를 바라보며 말했다.

“여기에서 10년 이상 살면 보살이 되거나, 미친 사람이 됩니다.”

실감이 되는 게, 기자도 며칠 채 머무르지도 않았는데, 분노조절장애에 걸릴 것 같았다. 사람들은 친절하고 외국인에 배타적이지 않은데, 도로나 교통체계 같은 사회 인프라와 제도가 아직 많이 부족했다.

 

‘한글이라는 집’이 넓어지고 있다

부톤섬에 오기 전까진 의구심이랄까, 마음 한쪽에 이런 의문이 있었다. 찌아찌아족이 한글을 도입하는 게 그들에게 또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한글 덕분에 한글학교 앞마당에서 만나게 된 찌아찌아 사람들과 한국인들을 보며 어떤 의미가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어는 생각의 집이다. 다른 나라의 언어를 배우면 내 안의 어떤 부분은 잃고, 다른 부분은 채워진다. 그러면서 생각의 집이 확장된다. 한글학당 계단에 앉아 찌아찌아족 소녀들과 어떤 아이돌 가수가 제일인지 짧고 진지한 토론을 나눈 후 생각했다.

‘인도네시아 한쪽 부톤섬에서 찌아찌아족과 한국인의 지평이 조금씩 넓어지고 있구나. 한글이라는 집이 넓어지고 있구나.’

한글이라는 한 지붕을 공유하게 된 찌아찌아족과 인도네시아에 대해 이제부터는 우리가 더 많은 호기심을 가져도 좋을 것 같다.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들이 한글을 창제하고 반포한 목적이 바로 이런 게 아니었을까.⊙

 

 

※ 더 많은 기사는 <월간조선 홈페이지>에서 볼 수 있습니다.

 

출처:

https://www.chosun.com/culture-life/culture_general/2023/10/01/QPH6VC3ICZH2ZAVVFOP3OG7IG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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