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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영화 수퍼히어로 장르의 미래

beautician 2023. 3. 30. 11:56

인도네시아 영화  수퍼히어로 장르의 미래

 

<피르고와 스파클링스>&nbsp;포스터

 

인도네시아 수퍼히어로 세계관인 부미랑잇 유니버스(Bumilangit Universe)의 세 번째 영화 <피르고와 스파클링스(Virgo & the Sparklings)>202332일 개봉했다.

 

피르고는 영어로 버고라고 읽히는 virgo, 처녀자리 성좌의 인도네시아식 발음이고 이 영화에서는 불을 다루는 주인공 수퍼히어로 리아니(Riani)가 속한 밴드의 이름이기도 하다. 리아니는 밴드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능력을 다스리고 발휘하는 훈련을 거친 후 어둠의 세력과 흑마술을 세상에 퍼트리는 상태 밴드 스콜피온 시스터스(Scorpion Sisters)와 싸운다.   

 

수퍼히어로 리아니는 1973년 얀 미타가라(Jan Mintagara)의 만화에서 탄생했고 이후 2017년 아니사 니스피하니(Annisa Nisfihani)와 엘리 고(Ellie Goh) 함께 만든 동명의 웹툰을 기반으로 제작되었다. 영화의 분위기는 부미랑잇 유니버스의 전작 <군달라)(2019)<스리아시>(2022)가 비교적 고독하고 우울한 캐릭터의 수퍼히어로를 선보인 것과 달리 이미 포스터에서부터 통통 튀는 신세대의 젊음을 보여준다. 물론 영화 자체는 그런 분위기를 구현하는 데에 실패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지만.

 

왼쪽부터&nbsp;<군달라>, <스리아시>, <피르고와 스파클링스>&nbsp;포스터

 

2023323() 오후 이 영화 리뷰를 위해 아르타가딩 XXI 극장에 갔더니 이미 스크린에서 내려간 후였다. 필자가 극장에 가서 인도네시아 영화 리뷰를 하는 기준은 특정영화가 유료관객 100-200만을 넘어 그해 주요 영화 중 하나라고 간주되는 시점이거나 개봉 전부터 평단의 주목을 받던 작품, 또는 <피르고~>의 수퍼히어로물 처럼 현지에 새로 열린 신생 장르의 영화들이다. 주요 영화제에서 수상한 작품들은 넷플릭스나 프라임비디오를 통해 찾아보기도 한다.

 

<피르고~>가 채 3주도 버티지 못하고(실제로는 약 2?) 스크린에서 내려온 것은 인도네시아 수퍼히어로 장르에 길고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 사건이다. 자료를 찾아보니 총 관객이 7만 명을 넘지 못했다. 최소 30만 명은 넘어야 일반적인 인도네시아 영화의 손익분기점을 달성한다고 알려져 있는데 <피르고~>는 사실상 폭망한 셈이다.

 

<피르고와 스파클링스>&nbsp;주요 내용.&nbsp;관객은&nbsp;6만6,708명

 

이 영화를 연출한 1972년생 오디 C 하라합(Ody Chandra Harapa) 감독은 2003<뚜숙 자일랑꿍(Tusuk Jailangkung)>이란 공포영화 조감독으로 데뷔해 이후 조코 누그로호 감독 같은 유명 거장들과의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하며 착실히 감독 커리어를 쌓아 왔지만 <수상한 그녀>를 리메이크한 <스위트 20(Sweet 20)>이 흥행에 성공해 국내 영화제에 수상후보로 오른 것 외에는 이렇다할 성적을 내지 못했다.

 

특히 한국계 현지영화사 소나무시네하우스가 만든 2018년작 <‘발리에서의 영원한 휴일(Forever Holiday in Bali)>도 그가 감독했는데 이 영화는 공식적인 관객집계가 나오지 않을 정도로 폭망했다. 탄탄한 경력의 중견감독이지만 폭망가능성을 시한폭탄처럼 늘 가지고 있는 인물인 셈이다.

 

주인공 리아니 역의 2003년생 아디스티 자라(Adhistry Zara Sundari Kusumawardhani)는 일본식 걸그룹 AKB-48의 인도네시아 프랜차이즈 JKT 48 출신의 가수다. ‘자라 JKT 48’이란 이름으로 활동했었다. 그러다가 2018<딜란 1990(Dilan 1990)>을 통해 영화에 데뷔했는데 작품운이 좋았는지 2018-2020년 내리 3년간 로컬영화 흥행수위를 달린 <딜란> 3부작에 모두 출연한 것은 물론 좋은 영화로 소문난 <쯔마라 가족(Keluarga Cemara)> 1, 2, 청소년 임신과 출산문제를 다룬 기나 S. 누르 감독의 2019년 문제작 <두 개의 푸른선 (Dua Garis Biru)>, 2020년 팬데믹만 아니었다면 100만 관객은 훌쩍 넘겼을 <마리포사(Mariposa)> 등에 출연해 풋풋한 연기를 보였다.

 

그런 그녀를 함부로 소비해버린 <피르고~>는 사실 좀 용서가 안된다.

 

아디스티 자라의 최근 출연작들

 

영화가 잘 안되면 그건 당연히 감독 탓을 할 수밖에 없지만 영화제작예산이나 제작환경, 같은 시기에 개봉한 경쟁영화 등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2019년 발군의 조코 안와르 감독이 연출해 170만 명 가까운 관객이 든 부미랑잇 유니버스의 첫 영화는 <군달라>는 나름 쾌조의 스타트를 끊었지만 길고 긴 코로나팬데믹 시기를 지난 후 202211월이 되어서야 나온 두 번째 영화 <스리 아시(Sri Asih)>는 첫 영화의 3분의1 수준인 58만 명이 들었다. 하지만 당시엔 <와칸다 포레버>, <블랙아담> 같은 헐리우드 블록버스타와 맞붙었으므로 졌지만 잘 싸웠다는 수식어가 붙었다. 예전 <판데르베익호의  침몰(Tenggelamnya Kapan Van Der Wijck)>의 하야티(Hayati)처럼 비련의 여주인공만 연기하던 페비타 피어스(Peveta Pearce)가 몸을 만들어 액션연기를 대부분 직접 소화한 것이 꽤 인상적이었다. 비록 시나리오는 대체로 엉성했지만.

 

<군달라>는 도시를 장악한 악당들과 맞서 싸우고 <스리아시>는 세상을 멸망시키려다 머라삐 화산 속에 감금된 악한 불의 여신의 화신들을 상대한 것에 비해 음악으로 세상사람들을 현혹하는 어둠의 록밴드와 싸우는 <피르고~>는 너무 가볍고 장난스러워진 모습이다. 트레일러만 봐도 좀 경망스럽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려운데 202338일자 자카르타포스트의 관련 리뷰[1]에서도 야심적으로 만든 이 영화가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사운드와 조명, 카메라워크를 보였다고 지적했다.

 

2019년 갑자기 태동한 인도네시아 수퍼히어로 장르는 앞서 언급한 <군달라>로 시작되었지만 인도네시아 전통 와양 그림자극에서 인도 마하바라타 전설 속 영웅들 일곱 명을 매년 한 명 씩 영화를 통해 소개하겠다며 총 7편의 영화제작을 미리 발표한 사트리아 데와(Satria Dewa)’ 스튜디오가 나서면서 마치 미국의 DC와 마블처럼 인도네시아도 부미랑잇과 사트리아 데와의 경쟁구도가 만들어지는 듯했다.

 

하지만 <군달라> 이후 곧 나올 예정이었던 사트리아 데와 측 첫 수퍼히어로 영화 <사트리아 데와: 가똣까차(Satria Dewa: Gatotkaca)>가 팬데믹 고비가 완전히 넘어간 후인 20226월 개봉해 불과 18만 명 남짓 관객을 들이는 것에 그쳐 사실상 폭망하면서 인도네시아 수퍼히어로 세계관 한 축이 처음부터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부미랑잇 측의 첫 작품을 <사탄의 숭배자(Pengabdi Setan)>, <지옥의 여인(Perempuan Tanah Jahanam)> 등의 연이은 성공과 HBO 등의 러브콜로 현재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는 조코 안와르 감독에 맞서 사트리아 데와 측도 차세대 최고 감독으로 손꼽히는 하눙 브라만티요(Hanung Bramantyo) 감독을 내세웠는데도 벌어진 불상사였다.

 

<사트리아 데와:&nbsp;가똣까차>&nbsp;포스터

 

하눙 감독은 같은 해 <7번 방의 선물> 리메이크의 대성공으로 586만 명 관객을 들이며 로컬영화 흥행순위 3위에 올라 어느 정도 체면을 회복했으나 바로 위인 흥행순위 2위에 조코 안와르 감독의 호러영화 <사탄의 숭배자 2: 커뮤니언> 640만 관객에 눌려 이래저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다.

 

하지만 실제로 치명상은 입은 것은 인도네시아의 수퍼히어로 장르 그 자체였다.

양쪽 스튜디오의 최근작들이 모두 손익분기점을 넘기지 못하고 흥행에 대실패하면서 후속편 제작에 제동이 걸린 것이다. 부미랑잇 측은 <스리아시> 영화 말미 쿠키영상에 또 다른 수퍼히어로 고담(Godam)을 잠시 보여주며 후속작을 예고했는데 약속된 후속작이 나오지 않을 경우 로컬 수퍼히어로 장르는 잠시 휴지기를 갖는 것이 불가피해 보인다.

 

2023. 3. 25.

 

피르고의 원형과 현대물

 

PS. 여담이지만 수퍼히어로 만화나 영화의 출연은 현실적으로 해결, 척결이 안되는 문제들, 이기기 어려운 적이 등장했을 때 실제에서는 어려우니 창작물의 이야기 속에서라도 쳐부수고 이겨내겠다는 정신승리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것이라 보인다. 그래서 미국의 수퍼히어로들은 대개 대공황이나 제2차 세계대전 전후에 탄생했고 인도네시아의 수퍼히어로들도 네덜란드 강점기 끝물에서 수하르토 철권통치시기 사이에 대부분 나타났다.

 

그런 걸 보면 사실 한국의 수퍼히어로물은 더욱 그 연조가 깊다. 홍길동전, 전우치전이 우리 수퍼히어로물이니까.

 

그런데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고 이후 고단한 현대사를 거치면서도 한국에 더 이상 수퍼히어로 장르가 등장하지 않은 이유는 그간 우리가 겪은 고난이 너무 가벼웠기 때문이 아니다. 그렇다고 요즘 많은 이들이 말하는 바 어느 나라 어느 세대나 밖에 내놓기 민망한 대통령이나 장관들 한 두 명쯤 가지고 있는 건 마찬가지인데 한국이 그 상태가 좀 심하다 해도 이미 웬만한 고통엔 내성이 생겨 참고 견딜 수 있기 때문도 아니다.

 

얼마전 2016년을 통틀어 세계만방에 증명해 보였든 세상을 바꿀 힘이 우리 국민들 손에 있다는 것을 우리 스스로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엔 수퍼맨이 없다. 우리 국민들이 모두 수퍼히어로들이다. 건들기만 해 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