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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리뷰] 인도네시아 토착 수퍼히어로 영화 <스리아시 (Sri Asih)>

beautician 2022. 12. 4. 11:46

 

 

 <스리아시 (Sri Asih)> 리뷰

 

<스리아시> 포스터

 

인도네시아 토착 수퍼히어로 영화 <스리 아시(Sri Asih)>가 2022년 11월 17일 상영관 개봉했다. 2019년에 나온 <군달라(Gundala)>에 이어 부미랑잇 유니버스(Munilangit Universe)의 두 번째 수퍼히어로 영화다.

 

개봉일에 맞춰 끌라빠가딩 모이(Mall of Indonesia - MOI)몰의 플릭스(Flix) 상영관에서 이 영화를 관람했다. 대개는 200만 명쯤 관객이 드는 현지 영화들을 리뷰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워낙 오래 전부터 예고되어 있던 영화였고 사실상 인도네시아 수퍼히어로 영화의 미래를 좌우할 중요한 시기에, 그것도 <군달라>를 만든 조코 안와르 감독이 각본작업에 참여하고 페피타 피어스(Pevita Pearce)라는 걸출한 여배우를 앞세운 영화인만큼 기대와 관심이 컸다.

 

특히 부미랑잇 유니버스와 쌍벽을 이룰 것으로 기대했던 사트리아 데와 유니버스(Satria Dewa Universe)의 첫 영화 <사트리아 데와: 가똣까차(Satria Dewa: Gatotkaca)>가 2021년 제작완료하고서도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개봉을 늦췄다가 2022년 6월 전국 상영관에 걸었지만 고작 18만5,000명이란 기대 이하의 흥행성적으로 폭망하면서 후속작이 나오기 힘든 상황이 되었으므로 본의 아니게 원톱이 되어버린 부미랑잇 측 두 번째 영화가 이후 토착 수퍼히어로 장르의 앞날을 내다보게 하는 시금석이 될 것은 자명한 일이다.

 

‘스리아시’는 누구?

전혀 다른 문화를 배경으로 만든 영화를 보면 쉽게 비슷한 다른 이미지와 비교하여 폄하하거나 오해하는 경우가 생기곤 한다. 그래서 우선 영화보다 ‘스리아시’라는 캐릭터의 유래와 배경을 잠깐 들여다보자.

 

우선 ‘스리 아시’의 스리(Sri)는 이름으로도 많이 쓰이지만 원래는 고귀한 사람을 높여 부르는 칭호다. 그래서 술탄도 원래의 긴 이름 맨 앞이 ‘스리 술탄~’으로 시작된다. 그러니 ‘스리아시’는 ‘고귀한 아시’, ‘아시님’ 정도의 의미다. 원래 이름은 ‘아시(Asih). 같은 이름의 귀신영화가 있지만 스리아시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아시(Asih)라는 단어 자체는 Kasih(사랑), Asih asuh(사랑으로 키우다)라는 뜻이다.

 

귀신영화 <아시(Asih)>. 나름 다누르(Danur) 유니버스 스핀오프 작품으로 100만 관객을 넘겼다.

스리아시는 R.A. 코사시(Kosasih)가 1954년 멜로디 출판사(Penerbit Melodie)에 실은 만화 캐릭터였다. 인도네시아 최초의 수퍼히어로이며 최초의 여성 히어로이기도 하다. 가장 강력한 전사로 부미랑잇 세계관 최강자에 속한다. 작가나 출판사에서는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미국에서 1941년 처음 등장한 ‘원더우먼’의 영향을 받은 것은 분명해 보인다.

 

영화에서도 등장하지만 원더우먼이 사용하는 ‘진실의 밧줄’ 대신 스리아시는 자유자재로 늘어나는 빨간색 슬렌당(Selendang)을 이용해 적을 때리고 묶고 잡아 끈다. 특히 손목에 두른 철갑팔찌로 총알을 튕겨내는 것은 원더우먼의 설정과 정확히 일치한다. 아마존 전사민족은 아니지만 태생적 전사라는 점도 같다.

 

왼쪽부터 만화원작 속 스리아시, 영화 속 스리아시(이렇게 될 뻔), 갤 가돗의 원더우먼

만화 속 캐릭터의 외모까지 원더우먼을 닮았지만 영화 <스리아시>에서는 원작의 머리띠를 없애 일말의 차별성을 추구했다. 위에서 보는 것처럼 스리아시는 거의 원더우먼이 될 뻔했다.

 

 

하지만 머리띠가 빠지고 수트를 입히면서 상당히 현대적인 토착 수퍼히어로 캐릭터가 되었다. 수트를 입고 슬렌당을 두른 것이 좀 어색하지만 독특하기도 하다.

 

스리아시 스토리는 인류가 탄생하기도 전 오랜 옛날부터 선한 신 데위 아시(Dewi Asih)와 악신 데위 아삐(Dewi Api-불의 신)가 오랜 세월 싸우다가 결국 승리한 데위 아시가 데위 아삐를 머라삐 화산에 가두는 데에 성공하지만 매번 그곳을 빠져나와 세상을 멸망시키려는 데위 아삐에 맞서 각각의 시대에 데위 아시의 화신들이 나타나 데위 아삐의 화신들을 물리친다는 플롯을 기반으로 한다.

 

그래서 1950년 대에는 나니 위자야(Nani Wijaya)라는 화신이 등장한다. 그녀는 국제 마피아 조직과 싸우는 독립적 조사관 캐릭터인데 데위 아시의 힘을 받아 악당들을 격퇴한다. 이후 렝가니스(Rengganis)라는 이름의 사회환경운동가가 나니 위자야의 뒤를 이었고 그 다음이 영적능력을 가진 알라나(Alana)인데 영화 <스리아시>는 알라나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영화에서 나니 위자야 역에 나즈와 시합(Najwa Shihab)이 까메오로 등장하는 부분이 있어 놀라웠다. 나즈와 시합은 방송진행자, 저널리스트, 배우, 페미니스트 등 많은 얼굴을 가진 1977년생 여성으로 메트로 TV에서 매주 수요일 방영하는 <나즈와의 시선(Mata Najwa)> 진행자로서 유력 게스트에게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유명하다. 최근에는 권력자들 뒷배를 믿고 방송에서 공공연히 유명 연예인들을 저격, 비난하고 악담을 서슴지 않는 악당 여배우 니키타 미즈라니 (Nikita Mizrani)와 설전을 벌인 것으로도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니키타는 또 다른 유명인사에게 고소를 당해 2022년 10월 25일 명예훼손혐의로 체포된 상태다. 올곧은 저널리스트로 널리 알려진 나즈와의 출연은 반갑고 신선했다.

 

나즈와 시합(왼쪽)과 니키타 미즈라니

시놉시스와 역사-문화적 배경

영화 속 세계관은 <군달라>와 마찬가지로 인도네시아 정부는 무능하고 자카르타 경찰은 부패해 야심차고 탐욕스러운 기업가들이 이합집산하며 모든 이권을 차지하기 위해 서민들을 제물로 삼는다. 스카이라인이 좀 낮아진 배트맨과 조커의 고담시티(Gotham City)를 연상하면 딱이다.

 

하지만 영화 <스리아시>는 1994년 실제로 일어난 머라삐화산 분화 장면에서 시작한다. 1994년 11월 22일 머라삐 화산 분화로 27명이 실제로 목숨을 잃었는데 알라나는 화산으로부터 피신하던 차 안에서 태어나고 부모는 모두 목숨을 잃는다. 머라삐화산의 분화활동은 1548년부터 기록되어 있는데 2006년, 2010년, 2018년, 2021년에도 폭발한 인도네시아의 대표적 활화산 중 하나다.

 

그래서 알라나는 1994년생이니 2022년 현재 막 28살이 되었다는 설정이다. 이후 고아원에서 자란 알라나는 체육관을 운영하는 상류층 여인에게 입양되어 프로 격투기 선수로 성장하고 이후 스리아시로 각성하여 데위 아삐의 화신을 상대하며 제물로 바쳐질 위기에 처한 많은 서민들을 구해낸다는 것이 중심 스토리 라인이다.

 

영화기술 자체는 이제 한국이나 인도네시아나 헐리우드나 크게 차이가 없다는 것을 자주 느끼곤 한다. 특히 CG 면에서 그렇다. 돈을 많이 들이면 CG는 당연히 좋아진다. 만일 <스리아시>에서 어색한 장면들이 보였다면 그건 기술부족이 아니라 제작비가 부족했던 것에 다름아니다.

 

하지만 시나리오 측면에서는 많이 아쉽다. 제작사 측에서는 스리아시의 스토리와 배경을 관객들이 대략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해서 그런 건지 모르지만 등장인물들에 대한 소개나 설명이 제대로 되지 않아 캐릭터들의 입체감이 전혀 살지 않았다. 알라나 조차도 출생과 성장에 대한 장면들이 나오긴 하지만 입양한 어머니가 왜 그녀를 격투기 선수로 키웠는지, 알라나가 왜 현재의 불 같은 성정을 가지게 되었는지, 원래 그녀의 꿈과 목표는 무엇이었는지 추론하기 어렵다. 주인공인 알라나가 그러니 그녀의 주변인물이나 상대편 빌런들 역시 인물설정의 입체성을 기대할 수 없고 그건 결국 영화나 등장인물에게 감정이입이 되지 않는 결과를 낳는다.

 

시나리오 작가 기근에 시달리고 있는, 하지만 OTT 오리지널 작품제작이 늘어나면서 전체적인 연간 제작편수가 증가하고 있는 인도네시아 영화계로서는 좀 더 참신하고 역량있는 시나리오 작가들이 대거 필요한 상황이다. 아무리 내로라 하는 조코 안와르 감독이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했다고 해도 늘 대박을 터트리고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조코 안와르 감독과 어깨를 견주며 올해 <7번방의 선물> 리메이크로 대박을 터트린 하눙 브라만티요 감독도 예의 <사트리아 데와: 가똣까차>의 폭망을 피할 수 없었던 것처럼.

 

그래서 도저히 그냥 넘어가지 못할 시나리오 상의 단점들이 눈에 띈다. 그중 하나는 극중 빌런 중 하나인 악당 행동대장이 뭔가 중대한 역할을 할 것 같았는데 중간에 사라진 후 별다른 추가 설명이 없는 것인데 이것은 마치 <군달라>에서 주인공이 어린 시절 무술을 가르쳐주었던 형뻘 친구가 기차에서 헤어진 후 스토리 라인에서 사라져 버린 것과 비슷하다. 깜빡 빠뜨린 것인지, 후속편을 위해 어딘가에 세이브해 둔 것인지 알 수 없다는 건 좀 불친절하게 느껴지는 게 사실이다.

 

빌런들 뒤에 숨겨진 또 다른 진짜 빌런이 있다는 식의 설정도 꽤나 진부하고 그렇게 전개되는 연결과정도 그리 매끄럽지 않았다. 개연성 없는 전개만큼 몰입도를 떨어뜨리는 것은 없다.

 

하지만 그 모든 단점에도 불구하고 페피타 피어스가 연기한 스리아시는 꽤나 멋졌고 격투기 선수로서 몸을 만들고 액션연기를 직접 소화한 노력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처음 페피타를 스크린에서 본 것은 <판데르베익 호의 침몰>(2013)이었다. 거기서 그녀는 미낭까바우의 청순가련한 여성 하야티(Hayati)를 열연했는데 <스리아시>에서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배우들은 영화를 한번 찍을 때마다 완전히 다른 삶은 살아내는 듯하다.

 

<판데르베익 호의 침몰>과 페피타 피어스

 

외모와 이름에서 알 수 있듯 페피타는 영국 웨일즈 출신 아버지와 반자르마신 다약족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1992년생 혼혈이다.

 

영화 속에서는 인도네시아에서 흔한 문화현상들도 엿보인다. 그중 하나는 대체로 상류층 또는 부유층으로 분류되는 부류의 사람들이 가족들이나 친구들 사이에서 영어와 인도네시아어를 섞어서 말하는 트렌드다. 이런 식의 대화는 실제로 시내 수디르만이나 탐린 거리의 내로라 하는 회사를 다니는 20-40대 층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데 주로 유학파들이 그런 대화방식이 멋있어 보여 주변 사람들이 따라하다가 고착된 것 아닌가 싶다. 필자의 친구 중에도 미국에서 9년 살다온 수하르토 시절 장관 딸이 있었는데 그 친구가 쓰는 그런 말투를 당시 함께 만나던 다른 친구들도 따라 하더니 얼마 지나고 나서는 다들 인도네시아말로 열심히 말하다가 결론은 완전한 영어 문장으로 마무리짓는 식으로 말하고 있어 유행의 무서움을 새삼 깨달은 적이 있다.

 

또 다른 하나는 알라나가 스리아시로 각성하는 장면인데 일단의 두꾼 또는 주술사로 보이는 이들이 대거 등장해 알라나의 각성의식을 돕는 부분이다. 수퍼히어로라는 현대적 위상과 힌두-불교시대 또는 그 이전 고대의 주술이 어우러지는 이 대목은 인도네시아식 수퍼히어로 탄생방식의 전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내가 뽑은 최고의 장면이다.

 

흥행 전망

이 영화가 갖는 많은 단점에도 불구하고 <군달라> 후속의 부미랑잇 유니버스 작품이라는 점과 세 번째 작품인 <피르고와 스파클링스(Vorgo & Sparkling)>는 제작이 거의 완료되어 예고편 트레일러도 나와 있고 이번 <스리아시> 영화 말미의 쿠키 영상에 다음 수퍼히어로인 ‘고담(Godam)’이 등장하는 등 후속작들에 대한 기대를 걸어볼 수 있다는 점, 그리고 페피타 피어스가 나름 선전했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흥행할 것으로 보인다.

 

첫날 저녁 8시반 시간대의 괸객들도 적지 않은 편이었다. 단지 2시간 반의 러닝타임은 너무 길다는 느낌이다.

 

내 점수는 60점.

<코드랏(Qodrat)> 정도의 인도네시아식 <콘스탄틴> 퇴마영화도 150만 명을 찍었으니 <스리아시> 정도라면 그보다는 관객이 더 들 것 같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사트리아 데와: 가똣까차>가 지난 6월 불과 18만5,000명의 관객이 들었던 점을 생각하면 공포영화보다 수퍼히어로 영화의 선호도가 인도네시아에서 사실은 많이 떨어지는 것 아니냐 하는 생각도 든다. 왜냐하면 최근에만 해도 <블랙아담>, <와칸다포레버> 등 헐리우드 수퍼히어로 영화들이 몰려들고 있기 때문이다. 로컬 수퍼히어로들이 블랙아담이나 블랙팬더와 직접 붙어 싸우면 막상막하이거나 혹시 이길 수 있을지 몰라도 스크린에 몰리는 관객 수로 따진다면 판판히 깨질 수밖에 없는 구도인 것이 사실이다.

 

아무튼 인도네시아가 새로이 개척하고 있는 수퍼히어로 장르의 선전과 성공을 위해서라도 난 <스리아시>의 흥행성공을 희망하는 쪽이다.

 

2022. 11. 18.

 

영화에 등장하는 데위 아삐
만화 속 스리아시 캐릭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