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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속과 괴담 사이(52)] 투계왕 찐덜라라스(Cindelaras)

beautician 2022. 12. 11. 11:16

 

 투계왕 찐덜라라스(Cindelaras)

 

 

젱갈라 왕국

 

옛날옛적 아이를랑가 대왕이 세운 까후리빤 왕국에서 갈라져 나온 젱갈라 왕국(Kerajaan Jenggala)을 라덴 뿌트라 국왕이 다스리던 시절의 일입니다. 그는 화려한 궁전에서 착한 왕비와 아름다운 후궁을 데리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후궁의 눈부신 미모 속에 숨겨져 있던 악독한 마음이 문제였습니다. 후궁은 왕비를 질투하며 그 자리를 빼앗고 싶어 안달했습니다. 그녀는 어의(御醫)를 불러 음모를 꾸몄습니다.

 

어느날 후궁이 꾀병을 부려 병석에 눕자 국왕은 즉시 어의에게 후궁을 진맥하도록 했습니다.

“전하, 누군가 후궁마마 음료에 독을 탄 것 같습니다.”

어의의 보고에 왕은 크게 놀랐습니다.

“누가 감히 내가 총애하는 후궁에게 독을 먹였단 말이냐?”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독을 쓴 이는 왕비마마입니다. 왕비마마께서 전하의 총애를 뺏기지 않으려고 후궁마마를 죽이려 한 것으로 아옵니다. 이 나라의 권력을 왕비마마의 손 안에 쥐려고 말입니다.”

용한 의원이 진맥을 하면 그런 것까지 알게 되는 모양입니다.

물론 어의는 후궁이 시킨 대로 왕비가 일전에 독을 구할 수 있는지 물어보았다며, 있지도 않은 일을 꾸며내 왕비를 모함했습니다. 후궁이 당한 독이 당시 왕비가 물어보았던 것과 같은 종류라고 덧붙이면서요.

 

크게 노한 국왕은 왕비를 즉시 처형하라 명했습니다. 당시 왕비는 임신 중이었어요.

재상은 그간 국민들에게 사랑받던 왕비를 공개적으로 처형하는 것은 민심을 해칠 것이니 일단 도성을 벗어난 곳에서 비공개로 처형해야 할 것이라 진언했습니다. 그렇게 왕의 재가를 얻는 재상은 일단의 군사들을 이끌고 왕비를 정글 속으로 끌고 갔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후궁의 모략이란 것을 이미 간파하고 있던 재상은 차마 무고한 왕비를 죽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도성 밖, 국왕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왕비를 데려온 것입니다.

“아무리 처형이라 해도 왕비 전하의 몸에 아무나 칼을 댈 수는 없다. 최후의 예를 갖춰 내가 직접 왕비 전하의 마지막을 모시겠다.”

그는 함께 온 군인들을 물리고 좀 더 숲 속 깊은 곳으로 왕비를 데리고 들어갔습니다. 그곳엔마침 나무덩쿨에 발이 끼어 꼼짝달싹 못하게 된 토끼 한 마리가 있었는데 재상은 잠시의 머뭇거림도 없이 그 토끼를 칼로 내리쳐 그 피를 칼에 묻혔습니다.

“마마, 전하와 후궁마마께 왕비마마를 처형했다고 보고해야 합니다. 이 토끼 피를 마마의 슬렌당에 묻혀 가져가야 하니 통촉하여 주옵소서”

왕비는 슬렌당을 내주며 재상의 세심하고 조심스러운 마음에 고마움을 표했습니다.

재상은 무고한 왕비를 숲 속에 홀로 두고 돌아갈 수밖에 없음을 거듭 사과하며 무거운 마음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반드시 권토중래하실 날이 올 것습니다. 부디 보중하시옵소서.”

재상은 눈물을 삼키며 그렇게 말했습니다. 국왕의 눈을 피해 왕비를 도울 수 있는 더 이상의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목숨을 구한 왕비는 뱃속의 아기가 무사할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신에게 감사했습니다. 혹시 들통날 경우 자기 목숨을 내주어야 할 일생일대의 결심을 한 재상에게도 큰 빚을 졌습니다. 그녀는 사람들 눈에 띄지 않기 위해 그렇게 숲 속에서 살기로 했습니다. 그게 자신의 목숨을 살리는 길이고, 재상을 보호하는 길이기도 했습니다.

숲속엔 맹수와 독충들이 들끓었고 표범이나 호랑이가 왕비가 사는 곳 주변에 자주 출몰했지만 덤벼들거나 위협하지 않아 왕비는 정글과 그곳에 사는 동물들이 그녀를 따뜻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얼마 후 그녀는 얼기설기 지은 오두막에서 남자 아기를 낳아 찐덜라라스(Cindelaras)라는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

 

영리한 찐덜라라스는 어릴 때부터 새들과 동물들이 오두막에 찾아드는 숲속 동물들과 친구처럼 어울려 지냈습니다. 맹수들이 집 앞마당까지 들어오기도 했지만 웅크리고 앉아 한동안 찐덜라라스와 그 어머니를 지긋이 바라보다가 돌아갈 뿐이었습니다. 마치 맹수들이 번갈아가며 모자를 지켜주는 것 같은 상황이어서 언젠가부터 왕비 역시 더 이상 숲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전혀 두렵지 않았고 오히려 왕궁에서 받았던 모든 상처가 치유되는 느낌이었습니다.

 

찐덜라라스도 어느 새 청년이 되었습니다.

어느날 찐덜라라스가 숲에서 놀고 있을 때 독수리 한 마리가 날아와 알 한 개를 찐덜라라스 옆에 떨구고 갔습니다. 찐덜라라스는 그 알을 주워 부화하도록 보살폈습니다. 3주 후 알에서는 귀여운 병아리가 나왔습니다. 독수리가 가져온 알에서 병아리가 나왔는데 이 민화를 읽는 사람들 중 이를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것 같습니다.

 

찐덜라라스가 지극정성으로 키운 그 병아리는 독수리처럼 단단한 부리를 가진 건장한 장닭으로 성장했습니다. 다른 닭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고 힘이 셌습니다. 독수리가 물어온 알이었기 때문일까요? 하지만 무엇보다도 특이한 건 울음소리였습니다. 닭은 이런 소리를 냈습니다.

“꼬끼요~ 내 주인 찐덜라라스의 집은 정글 속에 있는데 지붕은 야자 잎으로 덮였고 아버지는 젱갈라 왕국 라덴 뿌트라 국왕이라지”

닭이 머리가 무척 좋은지 홰를 칠 때마다 이 긴 대사를 다 외웠다는 겁니다. 난 애당초 저 수상쩍은 놈이 절대 닭이 아닐 거라 확신합니다. 앵무새 유전자를 가진 독수리 변종 아니었을까요?

 

찐덜라라스와 어머니는 닭이 홰치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그동안 옛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지만 닭이 그런 소리를 내는 것을 들은 후 결국 찐덜라라스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그들이 왜 숲 속에 살게 되었는지 모두 털어 놓아습니다.

 

그러자 찐덜라라스는 아버지를 한번은 만나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머니는 처음엔 그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찐덜라라스가 고집을 부렸습니다. 그는 간신히 어머니의 승락을 얻어낸 후 수탉과 함께 길을 나섰습니다.

 

 

닭싸움 (Adu Ayam)

 

찐덜라라스가 근사한 수탉을 데리고 가는 것을 보고 닭싸움에 끼어 보라고 유혹했습니다.

 “이봐, 너! 네가 데리고 가는 닭과 내 수탉을 싸움 붙여 볼래?”

 “그러시든가.”

찐덜라라스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닭이 용맹스럽고 강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렇게 닭싸움에 참가한 찐덜라라스의 닭은 싸우는 족족 이겼고 시장바닥에서 그 누구도 그를 당해내지 못했습니다. 도성으로 가는 길에 들른 모든 시장바닥 투계대회에서 승승장구하는 찐덜라라스의 수탉 이야기가 급기야 국왕의 귀에도 들렸습니다. 국왕도 닭싸움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광팬이었어요.  라덴 뿌트라 왕은 왕궁 안에 축사를 짓고 거기서 싸움닭 여러 마리 키우고 있었습니다. 매년 많은 예산을 들여 전국 싸움닭들을 불러들여 큰 투계대회를 열곤 했습니다. 그는 곧바로 신하를 시켜 찐덜라라스를 궁전으로 불러들였습니다. 

 

“전하를 뵈옵니다.”

찐덜라라스가 수탉과 함께 국왕에서 절을 올렸습니다. 그 우아한 동작과 절도있는 목소리에 국왕은 이 잘생기고 영리한 청년이 필시 일반 평민이 아닐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이제 찐덜라라스의 수탉과 국왕이 키우는 싸움닭 사이에 닭싸움이 벌어지게 되었는데 왕은 시합을 앞두고 찐덜라라스에게 내기를 걸었습니다. 만약 찐덜라라스가 진다면 수탉의 목을 치고 만약 국왕이 진다면 왕실이 재산 반을 찐덜라라스에게 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요즘 법감정을 들이밀어 보면, 이길 경우 왕의 갑질을 감수해야 하는 거고 지면 왕이 국가 이익에 반해 어마어마한 배임을 저지르는 셈인데 옛날이고 전설이니 이런 내기가 가능해집니다.

 

시합이 시작되자 두 마리의 수탉이 치열한 싸움을 벌였습니다. 하지만 불과 몇 분만에 승기를 잡은 찐덜라라스의 수탉이 국왕의 싸움닭을 상대로 완승을 거두었습니다. 구경꾼들이 박수를 치고 환호를 올리며 찐덜라라스를 축하해 주었습니다.

국왕은 미간을 찌푸리며 크게 실망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찐덜라라스와 그의 싸움닭에 더욱 흥미가 생겼습니다.

 “좋아 패배를 인정하지. 이제 왕실 재산의 반은 찐덜라라스, 너의 것이다. 하지만 자기 소개가 늦었군. 그대는 어느 가문 출신인가?”

“폐하. 제가 폐하께만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찐덜라라스의 말에 왕은 그에게 가까이 다가오라 손짓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왕에게 다가가 귀에 무언가를 속삭였습니다. 왕의 안색이 변했습니다.

 

하필 그때 찐덜라라스의 닭이 홰를 치며 예의 이상한 울음소리를 냈습니다.  

“꼬끼요~ 내 주인 찐덜라라스의 집은 정글 속에 있는데 지붕은 야자 잎으로 덮였고 아버지는 젱갈라 왕국 라덴 뿌트라 국왕이라지”

수탉은 지치지도 않고 계속해서 그렇게 울었습니다. 라덴 뿌트라 국왕과 신료들은 그 닭 울음소리에 혼비백산하며 놀랐습니다. 하지만 가장 놀란 사람은 면류관을 쓰고 왕의 옆자리에 앉아있던 왕비, 즉 예전의 그 후궁이었습니다. 그녀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리고 말았습니다.

“그게 사실이냐?”

“그렇습니다, 전하. 저는 왕비마마의 아들입니다.”

찐덜라라스가 그렇게 답하자 궁전은 아연 숙연한 분위기로 변했습니다.

 

그러자 왕비가 된 후궁이 급히 국왕의 앞으로 뛰어나오며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그럴 리 없어요. 저 자가 거짓말을 하는 겁니다. 이미 죽은 반역자가 어떻게 아들을 낳는단 말입니까? 백번 양보해 설령 그렇다 해도 전 왕비는 저를 독살하려 하여 대왕이 처형하라 명한 사람입니다. 저 찐덜라라스라는 이는 국왕을 현혹하려는 거짓말쟁이이거나 반역자의 핏줄입니다. 당장 저 자의 목을 베어야 합니다.”

하지만 찐덜라라스는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습니다. 그가 처음 숲 속의 집을 나서던 순간, 언젠가 이런 절체절명의 순간이 오리라는 것을 미리 각오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그는 자신의 어머니를 죽음에 이르도록 참소한 후궁과 직접 처형을 명한 아버지가 어떤 사람들인지 알고 싶었고 그들이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 그때의 일을 후회하고 용서를 빈다면 얼마든지 용서해줄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 후궁, 그러니까 지금의 왕비는 용서를 빌고 싶은 마음이 눈꼽만큼도 없어 보였습니다.

 

찐덜라라스와 왕비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던 라덴 뿌트라 국왕은 급기야 자초치종을 묻기 위해 재상을 불러 꿇어 앉혔습니다.

 

재상 역시 전 왕비를 살려준 이후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것임을 예견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눈을 질끈 감고 왕에게 사실대로 고했습니다. 그러자 왕의 얼굴이 붉그락푸락 했습니다.

“지금의 왕비마마께서 당시 왕비마마를 모함했을 때 제 목숨을 바쳐서라도 폐하의 잘못된 결정을 바로잡았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난 폐하를 바로잡지도 못했고 폐하의 명령을 수행하지도 못했으니 이제 목이 잘려도 할 말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제 왕자님이 장성해 왕궁에 찾아왔는데 현명한 폐하께서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으셔야 합니다.”

 

“폐하! 저 놈들의 목을 치세요!”

왕비는 찐덜라라스와 재상을 가리키며 소름끼치는 목소리로 그들의 처형을 종용했습니다.

 

바로 그때, 조금까지만해도 홰를 치며 라덴 뿌뜨라 국왕이 찐덜라라스의 친부라고 울어대던 장닭이 대사를 바꾸었습니다. 그것은 그 수탉이 예전엔 단 한 번도 한 적 없는 대사였습니다.

“꼭꼭꼭! 저 여자는 거짓말쟁이, 꼭꼭! 저 여자는 살인자!

사람들이 더욱 술렁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닭은 그 대사를 수없이 반복하며 왕비의 주변을 맴돌았습니다.

 

불현듯 벌어진 어떤 초자연적 현상이 누군가를 악인으로 지목한다면 그게 신의 뜻이라며 믿어버리고 마는 것이 일반적인 사람들 심리입니다. 하물며 귀 얇은 라덴 뿌트라 국왕은 수닭이 외치는 소리를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왕비를 돌아보며 파랗게 질린 얼굴로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내가 잘못 판단하여 아무 잘못도 없는 내 진정한 왕비에게 오래 전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질렀구나. 바로 너야말로 목이 잘려야 할 사람이었구나!”

왕비의 얼굴이 더욱 하얗게 질려버리고 말았습니다. 국왕이 귀가 얇다는 사실을 그녀가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요. 역사상 처음으로 일국의 왕비가 수탉의 말빨을 이기지 못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라덴 뿌트라는 찐덜라라스를 껴안고 자신의 잘못을 사과했고 이후 재상, 신하들과 함께 숲으로 가서 유폐된 왕비를 극진한 예를 다해 다시 왕궁으로 모셔왔습니다.

 

후궁이었던 왕비가 폐위되고 당시의 모함에 가담했던 어의와 함께 목이 잘린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습니다.

이제 라덴 뿌트라 국왕과 다시 복권된 왕비, 그리고 찐덜라라스는 모두 함께 궁전에서 행복하게 살았고 라덴 뿌트라 국왕이 서거한 후 찐덜라라스가 왕위를 물려받아 왕국을 공정하고 지혜롭게 다스렸습니다.

 

찐덜라라스 아트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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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부인 국왕을 찾아가 어머니인 왕비의 누명을 벗기는 전개가 흥미롭지만 도성으로 가는 길에 쟁쟁한 투계도박꾼으로 거듭나는 찐덜라라스 왕자, 어의의 어설픈 모함에 홀라당 넘어가버리고 찐덜라라스와 장닭이 하는 말을 별다른 검증작업도 없이 단번에 믿어버리는 귀얇은 국왕이 등장하는 이 민화의 교훈은 과연 무엇일까 한참을 생각해야 했습니다. 이 민화의 주인공은 유일하게 정상적이고 합리적인 저 재상이어야 하는 거 아닐까요?

 

독수리가 가져온 달걀에서 나온 놈이 정말 닭이 맞는지 진상조사를 해야 한다? 국왕은 후궁을 처형한 것만으로 속죄를 마친 것일까? 숲속 오두막을 떠나 왕궁으로 돌아오던 왕비는 정말 기꺼운 마음이었을까? 이런 생각도 하게 되었고요.

 

처음 이 민화의 제목 ‘Cinderlaras’를 보고 신데랄라스….? 아, 신데렐라! 이러면서 인도네시아 민화라 해도 제목이 ‘신데렐라’니 그 내용도 같을 것이라 지레짐작했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