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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속과 괴담 사이(50)] 시끼당(Sikidang) 분화구 고수머리 전설

beautician 2022. 11. 13. 11:18

시끼당(Sikidang) 분화구 고사

 

시끼당 분화구

중부자바 디엥 (Dieng) 고원에 위치한 시끼당 분화구(Kawah Sikidang, ‘끼당’이란 녀석의 분화구)는 용암이 아니라 진흙과 가스를 뿜어냅니다. 흥미로운 고사도 이 곳에 엮여 있습니다. 디엥 고원에 분화구들이 여럿 있지만 많은 관광객들이 시끼당 분화구로 몰리는 건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것이죠

 

옛날옛적 신토 데위(Shinto Dewi)라는 아름다운 공주가 디엥 고원에 위치한 큰 왕국에서 웅장한 궁전을 짓고 살았습니다. 인근 왕국의 왕자들을 비롯해 많은 귀족들이 청혼하러 찾아왔지만 아무도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신토 데위 공주가 요구하는 지참금이 어마어마했기 때문입니다. 공주의 자존감이 너무 높았던 것인지, 돈 많은 왕자들 등을 치려는 것이었는지, 아니면 혼인하지 않으려는 마음에 턱없는 금액을 불렀던 것인지 몰라도 왕자들과 귀족 자제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두르며 물러났고 혼약은 좀처럼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끼당 가룽안(Kidang Garungan)이란 이름의 왕자가 수십 개 상자에 보물을 담아 사절단과 함께 보내며 신토 데위 공주에게 청혼을 넣었습니다. 그는 이미 그것으로 신토 데위 공주가 요구하는 지참금을 감당할 수 있음을 증명해 보인 것입니다.

“저희 끼당 가룽안 왕자님은 지참금을 충분하고도 넘치도록 지불할 것입니다.”

사절단 대표 역시 자랑스럽게 그리 말했습니다. 신토 데위 공주는 이 정도의 사절단을 꾸려 보낼 만한 부유하고 강성한 왕국의 왕자라면 반드시 잘 생기고 위엄있는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공주가 청혼을 받아들이자 이 소식을 들은 끼당 가룽안 왕자는 크게 기뻐하며 혼인 준비를 서둘렀습니다. 혼인식 날이 다가와 끼당 가룽안 왕자와 그 일행이 신토 데위 공주의 궁전에 도착했습니다. 그러자 공주는 기절초풍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끼당 가룽안 왕자가 사람 몸에 사슴 머리를 단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끼당의 분화구 아트 모음

 

인도네시아 민화에서는 콩깍지나 오이에서도 아기가 열리고 새우를 닮은 이라우랑(I Laurang)도 등장하고 꺼보이와 같은 거인도 태어나는데 사슴 머리를 한 왕자가 한 명 있다고 해서 그리 놀랄 일은 아닙니다. 언젠가 이야기하게 될 살라띠가(Salatiga) 도시의 생성고사에서는 뱀 머리와 염소 머리를 한 강도들도 등장합니다. 디엥 고원과 살라띠가는 같은 중부자바에 속한 지역으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인데 그 동네에 동물 머리를 하고 다니는 특별한 종족이 살고 있었던 게 아닌가도 싶습니다. 암튼 끼당 가룽안 왕자의 모습에 너무 놀라지 말라는 말씀을 일단 드립니다.

 

하지만 이런 당부가 신토 데위 공주에겐 통하지 않았습니다. 끼당 왕자의 모습에 온갖 정이 단번에 떨어진 공주는 어떻게 하면 이 혼인을 물릴까 궁리하며 머리를 짜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왕자가 절대로 해낼 수 없는 일을 해내라는 조건을 세우고 그걸 완수하지 못한 것을 빌미 삼아 파혼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습니다.

 

하지만 예전 반둥 본도워소 왕자와 결혼을 피하려고 라라 종그랑이 하루 밤 사이 천 개의 불탑을 지으라고 요구했던 것이나 다양숨비가 아들인 상꾸리앙의 청혼을 좌절시키려고 역시 하루 밤 사이 호수와 큰 배를 지으라는 조건을 내세웠다가 오히려 낭패를 보았던 선례를 데위 공주는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불가능한 일을 시키며 회심의 미소를 짓는 공주(여성)와 그 불가능한 일을 당연한 듯 가능하게 만들어 버리는 왕자(남성)의 조합은 인도네시아 민화에서 심심찮게 등장하는 흔한 클리셰인데 그걸 정작 당사자인 신토 데위 공주가 몰랐던 겁니다.

 

시끼당 분화구 위치

 

“왕자님, 나와 혼인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하나 더 충족시켜야 할 조건이 있습니다. 이곳 디엥고원에는 깨끗한 식수가 부족합니다. 그러니 왕자님께서 내일 날이 밝기 전까지 깨끗한 물이 샘솟는 우물을 하나 파주셔야 합니다. 누구의 손을 빌려서도 안되고 오직 왕자님 혼자 해내셔야 하는 일입니다. 그걸 할 수 없다면 이곳을 다스리는 저와 혼인할 자격을 가졌다고 인정할 수 없어요.””

신토 데위 공주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건 끼당 가룽안 왕자뿐 아니라 그 누구도 절대 할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으니까요. 이 이야기가 또 이렇게 흘러갑니다.

 

“좋소, 공주. 내 우물을 파 드리리다.”

하지만 왕자가 전혀 고민하거나 동요하는 기색 없이 흔쾌히 동의했으므로 공주는 살짝 불안해졌습니다. 평소 우물을 한 두 개 파본 게 아닌 우물 장인의 아우라가 끼당 왕자에게서 언뜻 비쳤기 때문입니다.

 

사실 끼당 가룽안 왕자의 왕국도 물이 부족한 구릉지대에 있었지만 지금은 곡창지대로 변모해 있었습니다. 끼당 왕자가 철들면서 백성들을 위해 수 백 개의 우물을 파주었기 때문이었죠. 그의 머리에 난 사슴뿔은 길고 단단하기 이를 데 없어 굴을 파고 바위도 깨뜨리는 강력한 굴삭기 같은 힘이 있었어요. 그는 백성들과 함께 우물만 판 것이 아니라 광산 갱도를 파는 일에도 앞장섰습니다. 그의 왕국 보물창고에 깊은 암반에서 캐낸 보석들이 그득 쌓여 큰 부를 이룬 것도 그런 연유였습니다. 그런 끼당 왕자가 우물을 하나 더 파는 것은 사실 하나도 어려운 일이 아니었던 것을 신토 데위 공주만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끼당 가룽안 왕자는 신토 데위 공주가 지정한 장소에서 우물을 파기 시작했는데 워낙 힘이 좋아 금방 큰 구멍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자정이 넘자 우물은 거대한 분지 형태를 띄며 점점 더 깊어지고 있었으므로 공주는 당황했습니다. 저렇게 쉽게, 그것도 혼자서 단단한 지반과 암석을 깨부수며 깊고 빠르게 땅을 파들어가는 사람을 이전엔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곳곳에 연기를 뿜어내는 분화구들이 즐비한 그곳에서 땅을 파 들어가면 지하수보다 용암을 먼저 만나기 쉬웠습니다. 공주는 왕자가 절대로 지하수맥을 만날 수 없을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물이 분수처럼 솟아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드디어 수맥이 터진 것입니다. 신토 데위 공주는 꿈에도 알 수 없었겠지만 끼당 왕자는 사슴코로 물냄새를 맡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우물을 팔 때 백발백중 성공하는 이유였습니다.

 

공주로서는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녀는 사슴 머리를 한 사람이라면 왕자가 아니라 대제국의 제후라 하더라도 혼인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반칙을 쓰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반둥 본도워소 왕자의 경우나 발리 바투르 호수의 거인 꺼보이와의 고사에서 이미 보았던 것처럼 우물을 판다는 것은 곧 생매장당하게 될 것이란 사망 플래그나 다름없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신토 데위 공주는 자기 경호부대를 불러 지금 끼당 가룽안 왕자가 파고 있는 우물을 메워버리라고 지시했습니다. 경호부대는 모든 병력을 동원해, 이미 깊이 파내려간 우물 입구에 잔뜩 쌓인 흙을 다시 퍼넣기 시작했습니다. 갑자기 머리 위에서 훍과 바위가 쏟아져 내려 우물 속에 갇히게 된 왕자는, 그러나 뛰어난 도력을 발휘해 지상으로 거의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이오?”

 

하지만 거기 겁먹을 신토 데위 공주가 아니었어요. 이왕 엎질러진 물! 그녀는 끼장 가룽안 왕자가 우물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아예 군대 전체를 동원해 창을 내질러 왕자를 우물 속으로 밀어 넣고 바위와 토사를 퍼부어 우물을 완전히 메우라 시켰습니다. 끼당 가룽안 왕자는 생매장되던 마지막 순간, 신토 데위 공주에게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인간의 대가리를 달고 있는 것만으로 정녕 인간이겠냐! 너희들은 내 저주를 받아 신토 데위 공주의 후손들 모두 떡진 고수머리(rambut gimbal)를 갖게 될 것이야!”

 

그 말을 마지막으로 끼당 가룽안 왕자는 군대가 퍼붓는 흙과 바위에 휩쓸려 우물 밑바닥으로 굴러 떨어져 생매장되었고 결국 빠져나오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그 우물은 나중에 끼당 가룽안 왕자의 울분과도 같은 뜨거운 증기를 뿜어내는 분화구가 되었고 사람들은 끼당 왕자가 그곳에 묻혔다하여 ‘시끼당의 분화구’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끼당 가룽안 왕자의 저주와 같이 디엥 고원 사람들 중엔 떡진 고수머리를 하고 있는 아이들이 지금도 적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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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엥고원의 떡진 고수머리 현상

 

만약 끼당 가룽안 왕자가 죽음의 궁지에서 너무 경황이 없지만 않았다면 모든 집안의 대가 끊어질 거라든가 다른 민족의 침략을 받아 왕국이 멸망할 거라는 등, 좀 더 제대로 된 저주를 내렸을 것 같습니다. 왜 하필 그 순간에 떡진 고수머리를 최후의 저주로 택했던 걸까요? 혹시 그 머리결은 저주가 아니라 사슴머리를 가지고 태어난 자신이 정말 갖고 싶었던 최고의 희망사항은 아니었을까요?

 

디엥고원의 고수머리 현상은 괘 특이합니다. 이 지역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3세에서 7세 사이에 발열을 동반한 열병을 앓으면서 원래 정상이었던 머리결이 푸석푸석해집니다. 아무리 머리를 잘 감고 영양제를 발라 주어도 한번 푸석푸석해진 머리결에 다시는 윤기가 흐르지 않고 떡진 고수머리가 되어버리는 것이죠. 정말 끼랑 가룽안 왕자의 저주 때문일까요? 아니면 시끼당 분화구에서 분출하고 있는 화산가스 속 모종의 입자가 일으키는 화학병리학적 현상일뿐일까요?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인간 굴삭기 끼당 가룽안 왕자가 저렇게 간단히 생매장되어 죽었으리라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는 신토 데위 공주의 살의가 진심인 것을 깨닫고 낙심한 후 그 우물에서 신속하게 다른 터널을 뚫어 그곳을 벗어났으리라 믿습니다. 우물과 갱도를 쉽게 파고 들어가던 그가 그곳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했을 리 없습니다. 그리하여 멀리 떨어진 곳에서 지상으로 올라온 그는 비로소 깨달았겠죠. 아까 너무 경황이 없어 저주를 잘못 걸었다는 것을요.

 

여담이지만 혹시라도 현지인 여성과 결혼하려는 분들 중 그 여성이 자기 마을에 우물을 하나 파달라고 하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곧바로 달아나실 것을 권합니다. (끝)

 

이 고수머리 아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