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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안감 관저 총격전 사망사건에 경찰수사 지지부진 본문
논란의 치안감 관저 총격전 사망사건으로 불붙은 경찰개혁 화두
남부 자카르타에서 벌어진 경찰관들 사이의 총격전이 낳은 사망사건 수사에서 여러가지 이상 징후들이 발견되면서 사건의 전모가 밝혀지기보다 오히려 의혹들만 불어나 수사 투명성와 경찰개혁을 요구하는 시민단체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지난 7월 초 자카르타에 소재한 당시 경찰 업무안보국장 페르디 삼보(Ferdy Sambo) 치안감 관저에서 그간 J 순경으로 알려진 노쁘란샤 요수아 후타바랏(Nopryansyah Yosua Hutabarat)이 E 이경으로 알려진 리차드 엘리저르 뿌디항 루미우(Richard Eliezer Pudihang Lumiu)와 벌인 총격전 중 사망했다는 매체 보도가 줄을 이었다. 요수아가 페르디 치안감 부인을 폭행하려다가 부인이 비명을 질르자 당황해 도주하던 과정에서 엘리저르가 갑자기 위층에서 나타나자 제 발이 저려 먼저 총을 쐈고 엘리저르가 응사했으므로 요수아의 죽음은 정당방위에 의한 것이란 요지였다.
두 사람은 모두 페르디 관저 입주 부관부에 파견된 경찰관들이었고 사건이 벌어진 것은 그들이 그날 페르디 치안감 가족을 중부 자바 마글랑에서 자카르타로 에스코트해 온 직후였다.
사건 당시 관저 내부의 CCTV 카메라들이 모두 고장난 상태였다거나 사건이 발생한 시점에 페르디 치안감의 행적이 불분명한 점 등 이 사건을 둘러싼 이상한 점들이 다수 발견되었고 경찰의 모호한 사건 설명이 경찰이 뭔가 진실을 감추려 한다는 대중의 의혹에 불을 붙였다.
전도양양한 경찰 한 명이 우범지대도 아닌, 가장 치안상태가 좋아야 할 투스타 치안감 관저에서 총에 맞아 죽었고 그 외에는 부상당한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는데 물적 증거는 하나도 없고 모든 증언은 마치 짜맞춘 듯 요수아가 스스로 잘못해 죽은 것이라고 모든 귀책사유를 죽은 자에게 돌란 것이다. 더욱이 요수아의 시신은 부검과 매장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고 유족들에게 시신을 제대로 살필 기회를 주지 않으려는 시도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관저 총격전 사망사건 직후 자카르타 경찰청장 파딜 임란(Fadil Imran) 치안정감이 페르디 치안감을 포옹하며 이마에 입을 맞추는 짧은 동영상이 공개되자 국제사면위원회 인도네시아 지부장 우스만 하미드(Usman Hamid)는 요수아 사건을 다루는 경찰의 수사 독립성에 의혹을 제기했다.
파딜 치안정감은 해당 동영상에 대해 자신이 형제처럼 여겨온 페르디 치안감에게 응원의 마음을 전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의미를 축소하려 했다. 그러나 문제는 해당 총격전 사망 사건에 대해 처음엔 자카르타 남부 경찰서가 수사에 착수했으나 며칠 후 파딜의 자카르타 경찰청이 나서 더 나은 수사장비와 경험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이 사건을 이첩해 간 것이다. 당연히 공정한 수사가 이루어지기 어려울 것이란 비난이 쏟아졌다.
이러한 비난을 의식한 듯 지난 7월 31일(일) 국가경찰청 범죄수사국(Bareskrim)이 수사효율성을 이유로 해당 사건을 파딜에게서 다시 이첩해 갔다.
시민단체연합체에 소속된 국제 사면위원회 인도네시아 지부는 경찰개혁의 필요성을 오래전부터 주장해 왔다. 이 단체는 요수아의 죽음과 이에 대한 수사진척이 지지부진한 상황에 대해 지금이야말로 경찰개혁이 절실한 시기임을 다시 한번 입증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경찰에 대한 국민적 신뢰수준은 지난 몇 해동안 지속적으로 하락했고 그간 시위진압과정에서 드러난 경찰의 폭력성이 자주 보도되면서 더욱 심화되었다. 작년 소셜미디어를 휩쓸었던 #경찰신고부질없음 (#PercumaLaporPolisi) 해시태그 운동은 책임감, 투명성, 인권문제 등에 있어 경찰에 대한 국민적 불신이 극에 달했음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군대 문화의 잔재
국제사면위원회의 우스만은 1998년 개혁시대 초창기에 경찰이 군에서 분리되면서 경찰이 좀 더 인권을 중시하는 기관으로 거듭났어야 했음을 지적했다. 경찰은 1998년 이전 군조직의 일부인 경찰군으로 취급되었고 독립한지 20여년이 지난 지금도 군과 비슷한 계급체계과 문화를 유지하고 있다.
이번에 일어난 치안감 관저 총격전 사건은 아직도 경찰 조직 내에 팽배한 군대식 문화의 심각성을 보여줄 뿐 아니라 관저 내에서 경찰관들이 누구의 제재도 받지 않고 자기 판단에 따라 서로 총을 뽑아 쏜 것은 화기관리규정을 포함한 경찰무력에 대한 관리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음을 시사한다.
경찰개혁을 요구하는 시민단체연합의 또 다른 회원단체인 실종자 및 폭력피해자 위원회(Kontras)는 2021년 6월부터 2022년 5월까지 민간인에게 경찰폭력이 가해진 사건이 31건을 기록했고 전년 같은 기간에는 651건이 발생해 13명의 사망자와 98명의 부상자를 냈다고 전했다.
이들 시민단체연합은 경찰폭력에 대한 경찰청의 사과나 행정조치는 미온적인 솜방망이 미봉책에 불과하므로 보다 확고한 조치와 보다 강력한 처벌규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당시 페르디 치안감의 행적
요수아 순경 사망사건을 독자적으로 조사하고 있는 인권국가위원회(Komnas HAM)는 아직도 사건 당시 페르디 치안감 행적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정보를 찾고 있으며 동시에 요수아가 어떻게 사망에 이르게 되었는지 사건의 전말을 재구성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해당 위원회는 엘리저르, 즉 E 이경과 그가 속한 치안감 부관부 소속 동료 여섯 명, 그리고 요수아의 1차 부검을 진행했던 포렌식 조사관들에 대한 신문을 진행했고 통신기록, 총격전 전후의 상황을 기록한 CCTV 카메라 영상 등 경찰이 확보한 증거들에 대한 조사도 마쳤다.
지난 7월 30일(토) 초이룰 아남(Choirul Anam) 위원장은 마글랑에서 자카르타로 돌아오던 차량에 페르디 치안감이 부인과 함께 동승했는지 여부가 아직도 불투명하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조사관들은 페르디의 차량이 총격적이 벌어진 관저에서 500미터 떨어진 자택에 먼저 도착했고 얼마 후 페르디의 부인과 요수아, 엘리저르가 함께 관저에 도착했다는 증거는 확보했다고 밝혔다. 요수아가 죽기 전 그들의 모습이 찍힌 동영상은 그것이 마지막이다.
요수아 순경의 유족 측 변호사는 요수아가 사망 당일 오후 4시 31분에 결혼을 약속한 여자친구에게 전화했다는 사실을 들어 총격전 발생 30분 전까지 요수아가 아직 살아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는 요수아가 사실은 마글랑에서 자카르타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살해당했을 수도 있다는 가설에 반하는 증거다.
비록 국가인권위원회의 조사는 구속력 있는 범죄수사는 아니지만 요수아 사망사건에 대해 혹시 경찰이 은폐하려 할 지도 모를 진실을 조명하는 기능을 할 것이며 그 조사결과는 이후 조코 위도도 대통령에게 직접 제출된다.
출처: 자카르타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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