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으로 살아 가기
정말 중요한 것은? 본문
연로한 엄마가 위독해 입원한 일로, 엄마보다 더 연로했음에도 10년도 넘게 독박 간병을 해온 아버지는 크게 상심한 사이 아들들이 병원비와 장례, 뒤에 남게 될 아버지를 어떻게 모셔야 할지 고민하면서 돈과 지혜를 모아야 할 상황이었는데 아버지에게 얼마간의 예금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걸 아버지 생활을 위해 아껴둘 생각은커녕 엄마 병원비로 충당할 계획을 세운 형과 동생이 내게는 그런 얘기를 일부러 하지 않고 병원비 충당을 위해 혼자 안달하게 만들고 결국 나 혼자 해외에서 병원비 송금을 하게 만든 작금의 상황.
엄마의 상태와 아버지 입장을 생각하면 난 당연히 내가 할 일을 한 셈이지만 내가 해외에 있어 현장 상황에 어두운 것을 틈타 형제들이 내게 한 짓은 사기이자 배신이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난 6월 한달 동안 아버지 생활비로 100만원, 병원비로 300만원(형과 동생이 300씩 내서 한달 병원비 900-1000만원을 맞추기로 한 약속에 따라) 그리고 수입이 없는 형을 위해 이런저런 명목을 달아 100만원, 그렇게 총 500만원을 서울로 송금했다. 내가 돈이 많거나 돈벌이가 잘 되어서가 아니다. 그건 당연한 의무였고 어차피 들어가야 할 돈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처음엔 25일간 1050만원 나왔다고 하던 병원비는 나중에 다시 형이 설명하기를 650만원까지 줄였다고 하니 이번 달 병원비를 나 혼자 내고 나머지를 아버지 통장에서 낸 셈. 결국 형과 동생은 립서비스만 날리며 돈 걱정에 안달하는 내가 그 돈 송금하는 걸 보며 호구 하나 집았다며 미소짓고 있었으리라. 나혼자 병원비를 낸 셈인데 형은 나한테 나머지를 자기가 다 냈다며 생색을 냈다.
그러니 나중에 내가 문제를 삼자 동생은 과거에 자긴 자기 몫을 다 해놓았다며 이번 병원비 분담 책임에선 분명히 발을 뺐다. 형들이 결정한것 따르지 않은 적 없다더니 그건 새빨간 거짓말. 그랬다면 300만원을 냈어야지. 하지만 동생을 그러지 않았고 오히려 예전 다른 일을 거론하며 그때 자기는 했는데 형들이 책임을 다하지 않은 거 아니냐며 엉뚱한 소리를 떠든다. 그런 일이 정말 있었을까? 설령 그런 일이 있었다 해도 그럼 왜 그때 얘기하지 않고 이제 와서 얘기하는 건가? 어차피 이번에 돈을 내지 않겠다는 핑계를 대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이라면 그러려니 했겠지만 그가 평생을 남들에게 이렇게 살라 저렇게 살라며 훈수를 두었던 군목 출신 목사라는 사실이 한심스럽다. 하나님의 인사기준이 정말 의심스럽다. 정말 그런 존재가 있다면 말이다. 목사는 최소한 일반 사회에서 10년 이상 굴러본 사람이 해야 하는 일이다. 그걸 신학교 막 나온 사람이 전도사님, 목사님 소리를 들으며 떠받들여 주니 인성 이상한 목사들이 한국사회에 넘쳐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역시 우선 생각해야 하는 것은 한달 넘게 산소호흡기에 목숨을 내걸고 있는 엄마의 마음이다.
의식은 돌아왔다지만 종일 눈을 감고 침대에 누워 있는 엄마는 오래전, 그러나 이미 늦은 나이에 근로일선에서 물러났다.그리고 곧바로 악화된 치매로 투병한 것이 15년도 넘었다. 나를 잊은 것도 7-8년 전이고 지금은 자신도 누군지도 알지 못한다. 긴 혼수상태 속에서 엄마는 어떤 세계를 지나며 누구의 꿈을 꿨을까? 엄마는 과연 이 세상의 삶에 일말의 미련을 가지고 있을까? 아니면 임박한 죽음 앞에서 공포에 떨고 있을까?
아버지는 엄마의 연명치료를 하지 않는 것으로 했다지만 인공호흡기를 다는 것은 거부하지 못했다. 사실상의 연명치료가 시작된 것이다. 현대의학으로는 아마도 그런 상태를 반영구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모양이다. 엄마는 생전에 그리던 하늘나라로 들어가려는데 이승에서 비자를 내주지 않는 꼴인지도 모른다.
엄마가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의 의지가 있다면 어떤 결심을 했을까? 살아있는 엄마의 생명이 빨리 소멸하기를 기다리는 건 용서받기 어려운 불효일지 모르나 극한으로 치닫은 육신의 고통 속에 엄마의 영혼을 붙들어 매두는 것은 과연 효도일까?
예전엔 풍요로운 삶을 향유하는 것이 자유의 최고봉이었다면 인간의 생명이 늘어나고 더욱 긴 시간 질병과 고통에 노출되게 된 오늘날은 내 의지에 의해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야말로 궁극의 지유를 달성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비참한 자살이 아니라 아직 스스로의 의식이 있고 아직 심신이 비교적건강한 상태에서 품위있는 방법으로 스스로의 삶을 마감하는 것. 나는 언젠가부터 그런 세상을 꿈꾸게 되었다.
지금 엄마는 무슨 꿈을 꾸고 있을까?
고작 병원비 문제로 형제들이 반목하는 동안 어쩌면 병상의 엄마는 궁극의 진실을 향해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너무 저차원적인 문제로 진흙탕 속에서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만은 분명한 일이다.
정말 신이 계시다면 이제 그 진실의 문 너머에서 엄마에게 손을 내밀어 엄마 손을 잡아 주실까?
동생 목사가 하는 꼴 보면 그럴 것 같진 않지만 그래도 엄마를 위해선 그러길 기도해 본다.
2022. 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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