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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영화사 (1926~2021) 본문
인도네시아 영화사
1950년 3월 30일 영화감독이자 제작자였던 우스마르 이스마일(Usmar Ismail)은<피와 기도(Darah dan Doa )>의 첫 촬영을 시작했다. 영문제목은 <The Long March(대장정)>인데 이 영화는 인도네시아 영화사의 큰 이정표가 되었다. 그로부터 12년 후인 1962년 10월 11일, 국가영화위원회(Dewan Film Nasional)는 그 첫 촬영일을 기려 3월 30일을 ‘국가 영화의 날’로 지정한 것이다. 사실 <피와 기도>는 ‘첫 인도네시아 영화’가 아니었지만 ‘진정한 인도네시아 영화’로서 첫 번째 작품으로 간주된다. 인도네시아인 감독이 만든 첫 번째 영화였고 첫 번째 인도네시아 영화제작사인 인도네시아 국립영화사(Perusahaan Film Nasional Indonesia-Perfini)의 첫 영화이기도 했다. 뻐르피니(Perfini) 설립자 중 한 명이 우스마르였고 이 회사는 인도네시아를 강점했던 네덜란드나 일본과 단 한 번도 손을 잡은 적이 없다.
<피와 기도> 전에도 네덜란드인이나 중국계가 이미 몇 차례 인도네시아에서 영화를 제작한 바 있었다. 그들이 만든 영화들까지 모두 포함시킨다면 1926년 작 무성영화 <루뚱 까사룽(Loetoeng Kasaroeng)>이 처음 인도네시아에서 제작된 영화라 할 것이다. 이 영화를 만든 L. 후벌도르프(L. Heuveldorp)는 네덜란드 출신 감독이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화교인 웡(Wong) 형제(넬슨, 조슈아, 오티니엘)이 할리문 필름(Halimoen Film)을 설립해 처음 만든 영화가 <자바에서 온 릴리(Lily van Java)>(1928)였다. 1920년대를 통틀어 인도네시아에서는 단 여섯 편의 영화가 만들어졌다.
1930년대엔 29편의 영화가 만들어졌다. 이때 만들어진 첫 유성영화는 테뗑춘(The Teng Chun) 감독이 만든 <찌끔빵의 장미꽃(Boenga Roos dari Tjikembang )>(1931)이었다. 아이러니컬 하게도 기자이자 산디와라 연극 극작가였던 안자르 아스마라(Andjar Asmara)는 퀴떽화이(Kwee Tek Hoay)의 연작 작품을 기반으로 만든 이 첫 유성영화에 사운드시스템이 나쁘다는 비평을 내놓았다.
1940년에서 1941년 사이 인도네시아 영화인들의 생산성이 크게 올라 불과 2년 사이 42편의 영화가 제작되었다. 그러나 1942년 일본군이 진주하면서 전국 상영관들은 일본의 선전영화들로 넘쳐났고 인도네시아 영화산업은 그 최저점을 향해 곤두박질쳤다. 1942-1944년 기간엔 매년 고작 세 편의 영화가 제작되었을 뿐이다.
1945년 인도네시아는 독립선언을 했지만 1947년까지 단 한 편의 영화도 제작되지 않았다. 인도네시아는 연합군의 일원으로 인도네시아에 돌아와 다시 식민지를 삼으려는 네덜란드로부터 주권 수호를 위한 전쟁에 전력을 다했고 온 국토는 폐허가 되어 있었다.
인도네시아 영화제(FFI)의 탄생
인도네시아의 영화산업은 1950년 <피와 기도>로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우스마르 이스마일은 1954년에 또 다른 전설적인 영화 <자정을 지나(Lewat Djam Malam)>을 내놓았다. 이 영화는 조국이 압제자로부터 독립을 쟁취한 후 독립전쟁 전사가 겪게 되는 불운을 그렸다. 이 영화는 원래 그 해 토쿄에서 열린 제1회 아시아-태평양 영화제(Asia Pacific Film Festival)에 출품할 목적으로 제작되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인도네시아 정부는 우스마일과 제작자 자마루딘 말릭(Djamaludin Malik)이 <자정을 지나>를 영화제에 출품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일본과의 전쟁배상협상이 아직 합의에 이르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토쿄에 가지 못하게 된 울분을 풀 목적으로 자마루딘은 1955년 제1회 인도네시아 영화제(Festival Film Indonesia)를 개최했다. 이 영화제에서 <자정을 지나>는 최우수작품상을 받은 것을 비롯해 다른 많은 부문을 영화 <따르미나(Tarmina)>와 나누어 가졌다.
1960년대에 다시 암흑의 시대가 찾아왔고 영화산업도 예외 없이 그 영향을 받았다. 9.30 공산당 쿠데타로 시작된 정치적 격변이 수카르노의 구질서 시대에서 수하르토의 신질서 시대로 바뀌면서 찾아온 경제위기는 영화산업 침체로 이어졌다. 1950년대에 총 396편의 영화가 제작된 것에 비해 1960-1969년 기간 중에는 불과 206편이 제작되었고 특히 1962~1967년 기간엔 매년 십 수 편의 영화가 개봉되는 정도에 그쳤다. 하지만 1968년과 1969년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각각 여덟 편의 영화가 제작되어 개봉되었다.
인도네시아 영화 부흥기
1970년대는 인도네시아 영화의 부흥기였다. 그 기간 동안 618편의 영화가 제작되었고 그 중 몇 편은 사회현상을 일으킬 정도로 센세이셔널 했다. 그런 영화들 중에는 <청소년 신부(Pengantin Remadja)> (1971), <버타위 사람 둘(Si Doel Anak Betawi)> (1973), <첫사랑(Cinta Pertama)> (1973), <푸른 캠퍼스의 연인(Cintaku di Kampus Biru)> (1976), <폭풍은 일과성(Badai Pasti Berlalu)> (1977), <섹시한 하녀 이넴(Inem Pelayan Sexy)> (1977), <고교시절 연인 기타(Gita Cinta dari SMA)> (1979) 등이 있다.
이러한 영화들이 낳은 라노 카르노(Rano Karno), 벤야민 S(Benyamin S), 소판 소피안-위디야와티(Sophan Sopian-Widyawati) 콤비, 슬라멧 라하르죠(Slamet Rahardjo), 크리스틴 하킴(Christine Hakim), 로이 마르텐(Roy Marten), 도리스 칼레보떼(Doris Callebaute), 야티 옥타피아(Yati Octavia) 같은 걸출한 배우들이 1970년대를 풍미했다.
이들 영화들은 코미디 장르인 <섹시한 하녀 이넴>을 빼고는 드라마 장르가 압도적이었다. 실제로 1926년 이래 줄곧 인도네시아 영화들은 드라마 장르가 주종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다른 장르들도 시도되기 시작했다. 1980년대에 제작된 로컬 영화들은 723편이었으나 이제 드라마 장르는 50%를 넘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45.5% 였다. 서사극, 코미디, 호러 장르들이 대거 제작되기 시작한 시기였다.
코미디 장르의 영화들이 많아진 것은 와르꼽 DKI 그룹(kelompok Warkop DKI)의 성공에 힘입은 바가 크다. 와휴 사르도노(Wahyu Sardono –이하 ‘도노’), 까시노 하디위보워(Kasino Hadiwibowo-이하 까시노), 인드로조요 꾸수모느고로(Indrojoyo Kusumonegoro-이하 인드로) 이렇게 세 명으로 이루어진 와르꼽 DKI 그룹은 <어디를 지킬지(Mana Tahan)>(1979)부터 <여기저기 찔러보기(Pencet Sana Pencet Sini)>(1994)에 이르기까지 총 34편의 영화를 제작했다. 여기서 와르꼽(Warkop)이란 와룽꼬삐(Warung Kopi) 즉 ‘작은 커피점’을 뜻하므로 와르꼽 DKI는 ‘자카르타의 작은 커피숍’이란 뜻이다.
정권의 프로파겐다 프로젝트
1984년 작 <9월 30일 공산당의 반역 척결(PenumpasanPengkhianatan G 30 S PKI)>은 인도네시아 역사상 가장 야심차게 만들어진 영화로 아리핀 C 누르(Arifin C. Noer) 감독 작품이다. 이 영화는 인도네시아 공산당의 잔혹성을 부각시키려 한 신질서 정권 차원의 선전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제작되었다. 따라서 영화가 잔혹한 장면들을 포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학생들을 포함한 모든 국민들이 의무적으로 이 영화를 관람하도록 강제했다. 그 덕에 이 영화가 당시 최다 관객기록을 갱신한 것은 그리 놀랄 일도 아니었다. 1984년 자카르타에서만 70만 명이 관람할 정도로 흥행에도 크게 성공했다. 그 이후 이 영화는 1997년까지 매년 9월 30일이면 TV를 통해 방영되거나 영화관에서 상영되었다.
1998년 5월 수하르토 대통령이 하야한 후 그해 9월 유누스 요스피아(Yunus Yosfiah) 당시 공보부 장관은 이 영화의 역사 조작과 수하르토 숭배 기조로 인해 더 이상 유통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비로서 인도네시아 국민들은 이 영화를 강제로 보지 않아도 되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많은 호평을 받기도 했는데 신세대 감독 중 한 명인 하눙 브라만티요 감독은 캄캄한 상영관에서 사람들의 입과 담배 피우는 모습이 스크린에 크게 클로즈업되는 모습은 매우 인상적이었다고 평가했다. 몬티 지와(Monty Tiwa)는 D.I 빤자이탄 장군이 살해되는 장면에 대해 그런 드라마틱한 장면을 이전에 본 적이 없어 온갖 감정이 뒤섞여 흐르는 느낌을 받았다고 회상했다.
관능과 섹슈얼리티에 빠지다
1990년대에 인도네시아 영화산업은 다시 암울한 시대로 접어들면서 국산영화 제작편수가 332편으로 줄어들었다. 1993년엔 18편 만이 제작되었고 동남아 외환위기와 수하르토 하야 등의 사건들에 따른 사회 불안이 심하던 시절인 1998년과 1999년 기간 동안 불과 여덟 편만 제작되었다. 1990년대 영화 퀄리티도 변화를 겪었는데 섹스 테마의 영화들이 흥행수위에 오른 것이다.
경제위기와 신질서정권의 몰락을 영화산업 침체의 가장 큰 이유로 꼽을 수 있지만 민영 TV 들이 속속 전파송출을 시작하면서 영화관 방문을 못지 않은 대체제들의 등장도 무시할 수 없다.
이 시기에 수입영화들이 로컬 영화들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1994년엔 로컬 영화가 22편 제작된 것에 비해 유럽, 아시아, 미국, 비중국어권 국가 등에서 들여온 수입영화들은 160편에 달했다.
<사랑이 뭐라고? (Ada Apa Dengan Cinta?)>
2000년 대에 인도네시아 영화는 다시 발전 일로에 들어섰는데 그 서문을 연 것은 <사랑이 뭐길래(Ada Apa Dengan Cinta?)>(2002) 였다. 디안 사스트로와르도요(Dian Sastrowardoyo)와 니콜라스 사뿌트라(Nicholas Saputra)가 공연한 이 영화는 210만 명의 관객을 들이면서 신기록을 썼다.
그러나 이 기록은 6년 후<무지개 분대(Laskar Pelangi)>(2008)가 460만 명 관객을 들이면서 깨졌고 이 기록은 2016년 재결성한 와르꼽 DKI의 <장끄릭 보스 1부(Warkop DKI Reborn: Jangkrik Boss! part 1)>가 680만 명을 들이기까지 8년간 최다관객 영화의 자리를 지켰다.
이외에도 <사랑의 조건(Ayat-ayat Cinta)>(2008)이 460만 명, <사랑으로 신께 영광(Ketika Cinta Bertasbih)>(2009)이 350만 명, <내 사랑 에펠탑(Eiffel I'm in Love)>(2003) 200만 명, <사랑으로 신께 영광 2>(2009) 200만 명, <꿈꾸는 소년(Sang Pemimpi)>(2009) 170만 명 등 100만 관객을 넘는 영화들이 다수 나왔다.
2000대 영화들은 드라마, 사랑, 종교 장르가 압도적이었지만 1980-1990년대의 유산도 여전히 살아남아 섹스와 여성의 신체를 내세워 관객들을 유혹하는 호러, 코미디 장르들도 많이 쏟아져 나왔다.
밝은 미래
2010~2015년 기간 동안 781편의 로컬 영화가 제작되었다. 6년 동안 1980년대에 제작된 국산영화 총량을 넘어선 것이다.
1926~2015년 기간을 돌아보면 3,595편이 제작되었다. 이후 2016~2019년 기간 동안 매년 100~120편 정도가 제작되고 코로나 팬데믹이 덮친 2020~2021년 기간에는 제작이나 개봉된 영화가 미미한 것을 감안하면 현재까지 대략 4200편 정도의 영화가 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2014년 인도네시아는 128편을 제작한 반면 미국은 615편, 인도가 1,966편을 제작한 것에 크게 못미치는 수치이지만 꾸준한 증가추세에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출처: 로카다타 Indra Rosalia 30/03/2016 16:49 WIB
https://lokadata.id/artikel/tantangan-menghadirkan-era-90-an-dalam-film-mau-jadi-a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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