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서와 소설 사이, 그 어디쯤

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매일의 삶

기적 만들기

beautician 2020. 11. 12. 11:45

 

 

 

오랜만에 거의 불가능한 일에 도전해 보았습니다.

물론 애당초 그게 처음부터 불가능할 것 같았으면 손대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매우 빡빡하면서도 어떻게든 해낼 수 있을 듯 보였습니다.

 

어느 한 회사의 현지인 직원들 건의서 500매 정도를 주말 포함해 8일간 한국어로 번역하는 일이었습니다

회사의 생리를 잘 아는 사람 입장에서 현지인 직원들에게서도 회사발전을 위한 건의를 받는다는 것, 그것도 코로나 팬데믹 와중에 번역비를 들여서까지 그들의 목소리를 한국 본사의 오너가 듣겠다는 건 대단한 결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관리하는 한국인들이 한둘도 아닌데 그들이 번역하면 될 것을 왜 외주를 내냐며 비용을 우선 생각하는 것 역시 당연한 수순입니다. 그 번역비가 문제입니다.

 

한국사람, 그것도 회사의 오너가 읽어야 하니 한국어 마무리가 어색한 한국어 전공 인도네시아인에게 번역을 맡기긴 분명 곤란합니다. 어색한 번역을 500장씩이나 읽으려면 아무래도 혈압이 오를 테니까요. 그렇다고 한국인이 하려면 번역비는 하늘을 찌릅니다.

 

내 번역비는 200자 원고지 한장에 15000원 수준입니다.

물론 늘 그리 받는 건 아니죠. 평균 10,000원을 받는 경우가 많고 인세를 약속받은 서적 번역의 경우에는 4,000원까지 내려가기도 합니다. 그러니 일단 10,000원을 놓고 보면 A4 한장은 맑은 고딕, 폰트 사이즈 11, 줄간격 1.5로 놓고 보면 200자 원고지 5~6장 정도가 들어갑니다. 쉽게 다섯 장, 50,000원 입니다. 그 가겨에 500장을 번역하면 번역비는 2,500만원이 됩니다. 직원 건의서를 2,500만원 들여 번역할 회사는 절대 없지 싶습니다.

 

현지 유학생 출신 30대 한국인들은 논문 번역에 25~30만 루피아 정도, 일반 회사서류도 15~25만 루피아 정도입니다.

그래서 장당 20만 루피아를 놓으면 500장 번역료는 1억 루피아가 됩니다. 약 870만원 정도. 법인장이 큰 마음 먹고 서명하기엔 역시 매우 부담스러울 게 뻔합니다. UI 대학교 한국어학과를 나와 그라메디아에 프리랜서 번역가로 일하는 20대 후반의 한 여성은 자기 전공은 한국어를 인니어로 번역하는 것인데 그 반대방향의 번역에 15만 루피아를 달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못해도 그 정도 가격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실 이 건의 번역비는 10만 루피아 (약 8700원 전후)로 처음부터 결정되어 있던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단지 그걸 기술적, 시간적으로 어떻게 맞추어 가느냐. 그래서 시간과 퀄리티를 적정선으로 유지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었던 것이죠. 이 건을 소개받고서 계약하기 전 난 대충 머리 속에 방법을 디자인하고 팀을 짜기 시작했습니다. 일을 디자인 하려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분명히 선을 그으면서 큰 그림을 그려나가야 합니다.

 

1. 나 혼자 500장을 8일간 번역하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 (<판데르 베익호의 침몰> 번역은 문학적인 프리미엄으로 당연히 시간이 더 걸리는 작업이었지만 아무튼 밤을 새며 노력해 두 달이 걸렸다. 저 500장은 문학작품만큼의 노력을 들이진 않더라고 혼자서 한다면 족히 한달은 걸릴 작업이다. 더욱이 작가가 충분히 생각하고 계산한 끝에 쓴 딱 떨어지는 문장을 번역하는 것은 나름 맥락이나 의미 면에서 분명한 뜻을 따라갈 수 있지만 문장력이나 논리력이 그 분야와는 거리가 먼 이들의 글은 오히려 내용파악이 더 힘들 수 있고 그건 번역을 더 힘들게 만드는 요소가 된다. 한달도 무리일 수 있다.)

 

2. 그러니 조력자를 구해야 하지만 한국인 번역사들은 10만 루피아를 다 줘도 받아줄 리 없고 그들이라고 그걸 8일만에 끝낼 수 있을 리도 없다. 결국 복수의 한국인 번역사들을 연계해 일을 나누어 하는 것은 예산면에서도 시간면에서도 불가능하다.

 

3. 현지인 번역사들을 동원해도 한국어로의 완벽한 번역은 절대 불가능하다. 반드시 한국인이 붙어서 읽히는 문장으로 다음어 주어야 한다. 다른 번역사를 붙일 수 없으니 글을 다듬어서 읽힐 수 있는 완전한 한국어로 만드는 일은 내가 할 수 밖에 없다. 그럼 최소한 의미만 분명하게 번역하면 나머지는 내가 어떻게든 할 수 있다.  그 정도 번역이라면 현지인 번역사에가 2~3만 루피아 정도를 할애할 수 있다. 하지만 시간이 부족한 것은 그들도 매한가지이니 5만 루피아까지 주자. 반씩 노력하고 반씩 나누어 일하는 거다.

 

4. 하지만 500장을 하려면 10명 정도 번역사들에게 50장씩 나누어 주는 것이 가장 유력한 방법이다. 그래야 그들이번역 끝내는 물량을 매일 내가 넘겨받아 정리하는 식으로 가는 거다. 그 친구들이 50장을 다 끝낸 후 내가 넘겨 받으면 난 그걸 다듬어 납품할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게 된다. 내가 아는 현지 출판사들, 대학 한국학과들에 부탁해 이 일에 동원할 수 있는 번역사들을 소개 받아야 하는데 10명이 안되면 5명이라도 구해야 한다.

 

5. 그래서 10월 30일까지 건의서 원본을 모두 받아 최소 5명이 하루 15~20장 씩 소화해 한 명이 100장 정도를 커버해 주면 난 그렇게 매일 5명에게서 넘겨받는 75~100장 물량을 처리해 약속된 11월 8일까지 충분히 읽히는 한국어로 가다듬어 납품하면 일단 끝. 받는 번역료의 반을 현지 번역사들에게 나누지만 나 역시 수입이 생기고 발주처 회사에도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럼 모두 윈윈하는 상황.......

 

 

 

은 개뿔. 

 

아무튼 번역사 5명을 빨리 구한 건 다행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더욱이 코로나 상황은 번역사가 물리적으로 먼 거리에 있어도 팀에 넣는 것에 별다른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했습니다. 내 아들이 자카르타에 있는 동안 줌 면접으로 싱가폴 회사에 입사하고서 하늘길이 열리지 않아 7개월 넘게 자카르타에서 재택근무했던 것처럼.  그래서  5명 중 한 명만 자카르타에 있고 세 명은 발리, 나머지 한 명은 족자에 있는 친구들로 팀을 꾸렸습니다. 이 친구들을 카카오톡 단톡방에 불러 들여 일을 나누고 지시하고 관리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죠.

 

그런데 우선 당면한 문제는 원고가 10월 30일까지 모두 들어온 게 아니라 늦게 보낸 사람들 중엔 11월 4일에 보낸 사람도 있다는 거였어요.  11월 8일 납품인데 말이죠.

 

 

또 다른 문제는 내가 그 사이에 꼭 해야 하는 다른 일이 있었다는 겁니다. 우선 내가 관리하고 있던 노동연구원 한국기업 운영실태 설문조사가 이미 2주차를 지나고 있었고 11월 5일은 한국영화진흥위원회에 10월 인도네시아 영화산업 동향보고서를 내야 하는 마감이었어요. 그 원고를 준비하는 기간 동안 현지인 번역사들이 매일 보내준 번역물들을 제대로 챙겨보지 못한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영진위 보고서를 제출한 후 이제 번역물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는데, 당연한 일이지만 이들 다섯 명의 한국어 실력차이가 서로 크게 난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자카르타의 번역사는 한국어를 독학한 후 한양대학교 언어코스를 1년간 유학했던 친구이고 나머지는 모두 명성높은 족자의 가자마다 대학교(UGM)의 한국어과 92, 93학번 졸업생들이었어요. 족자의 앙기와 발리의 산티카는 당초 내가 생각했던 취지대로 나름 최선을 다해 번역한 원고에 내가 맥락과 톳씨를 고치는 정도의 수정을 하는 것으로 번역이 완성되었습니다. 자카르타의 페페는 내가 <판데르 베익호의 침몰>을 번역할 때 내 조수로 두 달간 번역을 도왔고 설문조사에도 참여하고 있는 친구인데 그 친구 번역도 그럭저럭 성의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발리의 또 다른 두 명의 번역사 아니사와 테니샤가 거의 대부분을 구글번역기를 돌려 그 결과물을 그대로 썼다는 것입니다. 몽땅 다 그런 것은 아니어서 이 친구들이 나름 정성껏 번역한 것들은 어느 정도 봐줄만 했지만 90% 정도의 분량은 실로 '쓰레기'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는, 그래서 결국 전체적으로 원문 원고와 비교하며 수정하고 때로는 처음부터 재번역하는 식으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건 내가 이 방식으로 추구했던 '시간절약'과 완전히 반대방향으로 가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누굴 원망하겠어요. 

일이 잘못된다면 그건 그 일을 디자인한 사람의 잘못, 그 조직을 관리하는 사람의 잘못, 발주처와 계약한 사람이 책임져야 하는 것인데 그게 전부 나였으니까요.

 

총 109명의 건의서를 납품일인 11월 8일 며칠간 겨우 35개 정도밖에 완료하지 못했습니다. 한 시간에 한 명 분을 끝내는 정도의 속도. 남은 70여개를 마저하려면 물리적으로 70시간이 필요한데 나흘 밤을 더 새도 될까말까한 상황이었습니다. 명색이 전업작가에 프로 번역사인데 이런 실수를 해서는 안되는 일입니다. 특히 기업에서 받은 일감인 만큼 그 오더를 준 법인장도 한국 본사와 약속한 시한이 있을 텐데 내가 시간예측을 잘못해 법인장 입장을 매우 곤란하게 할 상황.....더 나아가 어쩌면 내가 위약금을 물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에 처한 것입니다.

 

법인장은 납기를 36시간, 하루 반나절 정도 연장해 주었습니다. 이틀도 아니고 하루 반나절. 법인장도 그 이상 늦출 수 없다는 무언의 압박이었습니다.

 

도움을 청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었는데 머리에 떠오르는 사람이 몇 없었습니다. 이 일을 도우려면 우선 당장 오늘 하루를 완전히 비울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문장력이 있어야 읽히는 문장으로 윤문이 가능할 것이고 인니어도 곧잘 해야 필요하면 원문과 비교해 오역을 피할 수 있을 테니까요. 더욱이 발주처가 속한 산업이나 그들이 하는 일을 대충 이해하는 사람이라야 저 직원들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알 것이고 그래야 말이 되는 번역을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장당 5만 루피아 남은 예산으로 도와줄 용의가 있는 사람이어야 했고요. 무엇보다도 몇 시간 남지 않은 납기까지 나 못지 않은 책임감으로 번역에 전적으로 달라붙어 주지 않으면 안됩니다.

 

적임자는 딱 한 명 뿐이었습니다. 

내 블로그에 단골로 댓글을 다는 명랑쾌활. 그는 저 위의 모든 조건을 대략 충족시켰습니다. 11월 9일 그에게 우선 10개 정도를 넘겼고 마지막 날인 11월 10일에는 24개를 더 넘겨 명랑쾌활이 34개를 해주었습니다. 150쪽 이상을 해준 것이죠. 나 이상으로 시간과 몸부림치며 싸운 끝에 마감 직전에 마지막 원고를 넘겨 준 그는 명랑쾌활이란 아이디에 어울리지 않는 우울처절 모드가 되어 병석에 누웠고(^^ 죄송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감 오후 두 시를 넘긴 오후 네 시가 되어서야 109개 중 106개를 납품하면서 발주처의 양해를 구할 수 있었습니다. 나머지 3개가 조금 더 시간을 끌었던 것은 분량도 적지 않은 그 건의서 내용이 대략 경영학개론을 긁어온 작성자가 잘난척 하며 법인장과 본사 회장님을 가르치려 드는 것이었기 때문에 짜증도 났을 뿐 아니라 맥락도 없고 논리도 없이 자기가 굉장한 지식이 있다고 뻐기는 내용에 사흘 이상 밤을 샌 내 머리 속에서 mental breakdown이 시작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자기도 다른 일에 쫓기면서 남몰래 가장 어려운 마지막 순간에 건의서 다섯 부를 가져가 깔끔하게 번역정리해 준 와담리 산채 영복 영미작가의 도움이 없었다면 절대 끝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차마 도와달라 말하지 못하고 있던 차에 스스로 나서서 꽤 많은 분량을 도와주고서 원고비도 받지 않겠다고 하니 내가 이 분 업고 다녀야 하는 상황이 자꾸 생깁니다.

 

그렇게 한 바탕 기적을 일구어 냈습니다.

 

결과적으로 421장.

현지인 번역사 5명 초벌 번역

한국인 번역사 3명 재번역 및 정리

8일+하루 반나절

 

그래도 내가 어려울 때 손 내밀어 주는 좋은 친구 두 명을 인도네시아에서 사귀었다는 게 이 일을 진행하면서 느낀 가장 뿌듯한 부분이었습니다.

 

그리고 발리와 족자에서 발견한 성실한 현지인 번역사 두 명의 발견도 큰 성과였습니다. 성실한 사람들이니 당연한 일이지만 그 두 사람은 번역팀들 중 낮에는 회사에 출근하는 친구들이었어요. 특히 발리의 산티카는 틈나면 수제 봉제인형을 주문받아 납품하는 친구더군요.

 

산티카의 작품

 

만약 이런 번역오더가 또 있다면 이번엔 그리 선뜻 받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2020. 1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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