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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근대사

[히스토리아] 또바 호수를 본 네덜란드군의 오만한 저주와 욕설

beautician 2020. 8. 12. 11:34

또바 호수를 본 네덜란드군의  오만한 저주와 욕설

마틴 시똠뿔

 

 

1905 년 경 사모시르(Samosir) 지역 빵운구란 마을(Kampung Pangunguran)에서 바라본 또바 강 전경 (출처: Historia / KITLV)

 

 

네덜란드 총독부는 동인도 열도 전체를 통일해 손아귀에 넣기 위해 바딱족들의 땅을 향해 진군했다. 식민지를 통합하는 이 작전의 이름을 Pax Nederlandica, 네덜란드의 영광이라 불렀다. 이 군사원정대는 기독교를 전파하는 선교사들 보호를 또 하나의 목표로 하고 있었다. 이에 바딱족의 왕 시싱아망아라자 12(Sisingamangaraja XII)는 군대를 보내 맞섰다.

 

발터르 보아르 시자밧(Walter Boar Sidjabat)은 싱아망아라자 전기(Ahu Si Singamangaraja)에서 187712월부터 싱아망아라자 왕이 아쩨 군대와 함께 잔군해 유럽인들과 기독교도들을 죽일 것이란 풍문이 돌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것은 네덜란드에게 군대를 보낼 좋은 빌미가 되었다.

 

187831일 부지사 보일(Boyle)은 시볼가(Sibolga)에서 250명의 병력을 또바 호수 방면으로 진출시켰고 3 20일에는 네덜란드군이 름바 실린둥(Lembah Silindung) 지역에 들어가 몇 개의 마을을 불살랐다. 그 결과 빵아로안(Pangaloan), 시곰뿔론(Sigompulon), 실린둥(Silindung) 지역이 네덜란드의 손에 떨어졌다.

 

이 원정대에는 루트비히 잉거르 노멘센(Ludwig Inger Nommensen)이라는 선교사가 종군하고 있었다. 그는 독일 부퍼탈-바르먼(Wupertal-Barmen) 선교회(Missionsgesellschaft-RMG) 소속 선교사였다. 노멘센은 이 전쟁에서 통역관의 임무와 발생한 상황을 신중히 기록하는 기록관의 임무를 맡았다. 누가 봐도 정복군의 앞잡이이자 협력자에 불과하지만 그는, 그리고 당시 동인도 땅을 밟은 선교사들은 스스로 평화의 사절이라 여겼다.

 

또바 호수

 

네덜란드군의 잔혹함

사방을 둘러봐도 마을들은 초토화되어 타고 남은 재만 흩날리고 있었다. 주민들은 산속 골짜기마다 피해 숨어 있다가 누가 다가가기만 해도 곧바로 달아나기 바빴다.” 울리 코족(Uli Kozok)이 쓴 전쟁 속의 평화사절: 또바 전쟁 중 선교사의 역할이라는 저서에서 노멘센이 라인 선교회(RMG Berichte der Rheinischen Missionsgesellchaft-BRMG)1878년 발행한 주간지에 이런 기록을 보내왔다고 말한다. 1878430일 네덜란드군은 바카라 숲의 시싱아망아라자의 군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노멘센은 그들이 절벽 가까이에 다다랐을 때 아름다운 바카라 골짜기가 앞에 펼쳐져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골짜기 밑으로 나 있는 550~600미터의 좁은 길을 내려다보는 것만으로 그 아름다움에 전율이 온 몸에 퍼졌다. 하지만 그곳에서 피비릿내 나는 전투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노멘센의 기록에 따르면 네덜란드군은 마을마다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다. 성벽을 오르던 군인들은 쏟아지는 돌을 맞고 고꾸라져 굴렀고 남녀노소의 비명과 울음소리가 골짜기를 가득 매웠다.

 

작은 마을의 군주들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항복했다. 그러나 구르구르(Gurgur)지역의 간장 숲(Huta Ganjang)에서 네덜란드군은 바딱족 군대의 공격을 받았다. 구르구르로 가는 길은 다시 550~600미터 정도 올라가는 험한 경사였다. 여기서 네덜란드은 두 명이 전사하고 12명이 부상당하는 큰 손실을 입었다.

 

발리게(Balige)로 가는 길목에는 슬픈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토바 호수의 아름다운 자연경광이 전쟁의 잔혹함과 겹쳐져 있었던 것이다. 어느 마을이나 모두 불살라져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주민들은 산속 벼랑 밑에 숨어 있다가 누가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지면 뿔뿔이 달아났다.

 

평화사절로 참여한 우리들로선 가장 참혹한 순간이었고 이제 우린 주민들이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는 모습을 목도해만 했다노멘센은 보고서에서 그러한 감상을 적었다.

 

네덜란드군이 발리게에 진주하자 발리게의 왕도 결국 항복을 선언했다. 보일 부지사가 발리게를 시찰하러 왔을 때 날씨는 무덥기 이를 데 없었으므로 반시간 후 기진맥진 도착한 군인들은 곧바로 호숫가로 뛰어들었다. 그들 중 많은 수가 고요한 또바호수 수면에 비친 선명한 창공에 감탄했다. 그러나 물론 그 모습에 욕설을 뱉는 이들도 있었다.

 

더러운 이교도들이 이토록 아름다운 지방을 지배하고 있었다니!” 군인들의 이런 오만한 발언들조차 노멘센은 모두 기록했다.

 

1차 또바 전쟁이라고 알려진 이 원정은 18785월까지 계속되었다. 학자 우지 꼬족에 따르면 이 원정은 네덜란드 정부에 매우 중요하고 전략적인 의미를 가진다. 바딱 지역과 또바 호수 인근은 아쩨와 미낭까바우 사이의행식 지역으로 간주되고 있었다. 따라서 바탁 지역은 이슬람 영향력을 차단하는 완충지대로 만들려 했다. 그렇게 하여 당시 경제특구로 개발 중이던 델리(Deli)의 지속적 안전을 보장하려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100년도 넘은 1996310일 네덜란드 왕자인 리퍼비스터펠트의 베른하르트(Bernhard of Lippe-Biesterfeld)가 북부 수마트라를 방문했다. 그가 또바 호수를 들르는 것을 빠뜨리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당시 베를하르트 왕자의 나이는 85세였다. (사진: 레인하르트 네덜란드 왕자)

 

베른하르트 왕자의 활동을 보도하던 대중 매체들은 또바 호수의 아름다운 경관에 대한 찬사를 숨기지 않았으므로 이를 읽은 베른하르트 왕자도 또바 호수의 아름다움을 만끽하고 싶었던 것이다. 베른하르트 왕자는 나중에 또바가 마치 자기 고향과도 같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1996312일자 일간 꼼파스는 베른하르트 왕자가 자신의 이름이 또바에 영원히 남기를 원했다고 보도했다. 베른하르트 스스로 그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이 오렌지 국가의 왕자는 과거 네덜란드 병사들이 자행한 파괴와 그들이 내뱉은 저주의 욕설들을 애써 모른 척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출처: 히스토리아

https://historia.id/militer/articles/umpatan-serdadu-belanda-di-danau-toba-Db2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