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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근대사

불굴의 여인, 니 아긍 세랑(Nyi Ageng Serang)

beautician 2018. 9. 27. 10:00

불굴의 여인, 아긍 세랑(Nyi Ageng Serang)

 

  


1752년에서 1838년까지의 시기를 불꽃처럼 살았던 니아긍세랑(Nyi Ageng Serang) 본명은 라덴 아젱 꾸스티야 울라닝시 렛노 에디(Raden Ajeng Kustiyah Wulaningish Retno Edhi)입니다.

 

아궁세랑은 솔로 북쪽 40킬로미터쯤에 있는 세랑(Serang)에서 1752 태어났습니다. 그녀가 태어난 세랑은 반뜬주의 세랑이 아니라 중부와 동부자바 경계지역을 말합니다. 기얀띠 전쟁에서 망꾸부미 왕자의 우호세력이자 그녀의 아버지인 뻐늠바한 나타쁘라야 군대의 본진이 자리잡으면서 유명해진 곳이죠. 녀의 아버지는 나타쁘라야 왕자(Pangeran Natapraja) 뻐늠바한 세랑으로도 알려진 세랑의 영주였고 망꾸부미 왕자의 전쟁사령관이기도 했죠. 그는 세랑 지역, 지금의 뿌르워다디-스라겐의 경계까지를 지배했습니다. 그들에겐 수난 깔리자가 (Sunan Kalijaga) 혈통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망꾸부미 왕자가 네덜란드를 등에 업은 빠꾸부워노 1세와 전쟁을 벌일 당시 오빠가 전사하자 몸소 전쟁을 지휘하면서 용맹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다른 여성 영웅들과 달리 병장기와 군대를 전쟁에서 익숙하게 다루었다는 점입니다. 그녀는 어릴 적부터 군사훈련에  참여해 남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고  날카로운 안목과 시력을 가진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그녀는 지휘관이 병사들이 전쟁에 익숙해지도록 반복 훈련시켜 강병을 만들었습나다

 

그녀가 니아궁세랑이란 칭호를 받게 것은 병으로 몸져 누운 아버지의 자리를 그녀가 물려받고부터입니다. 전쟁이 한창이던 때였죠. 그녀는 아버지를 도와 네덜란드 식민정부와 싸우고 있었습니다. 1755 기얀티 조약이 서명된 후 까르타수라 왕국이 빠꾸부워노 3세의 수라카르타 수난국과 하멩꾸부워노 1세의 족자 술탄국으로 분리되었지만 네덜란드군은  그후에도 군대를 유지하고 있던 족자 술탄국을 협정위반으로 걸어 공격해 왔던 것입니다.

 

네덜란드군은 나타쁘라야와 자녀들이 지키는 방어선의 관문들을 향해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처들어왔습니다. 이때 연로한 나타쁘라야 대신 니아긍세랑과 다른 남자 형제가 군사령권을 맡아 군대를 지휘하고 있었습니다. 네덜란드 공격부대에 비해 크게 부족한 병력이었지만 세랑의 부대는 죽기를 각오하고 적과 맞섰습니다. 치열한 전투에서 오빠가 먼저 전사하자 이제 세랑부대의 사령권은 니아긍세랑이 전적으로 도맡게 되었죠. 그녀는 최선을 다했지만 적군의 군세는 워낙 컸고 아군인 망꾸부미 왕자의 부대는 기얀티 조약에 묶여 이상 전투에 원조를 보낼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세랑부대의 전세가 기울며 많은 이들이 전사하고 이상 전투를 지속할 없게 되면서 니아긍세랑 역시 네덜란드군에게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그녀는 포로가 되어 족자로 압송되었고 그 소식을 들은 고령의 뻐늠바한 나타쁘라은 충격을 받아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녀는 하멩꾸부워노 2세의 즉위하면서 사면, 복권됩니다. 괄괄한 하멩꾸부워노 2세는 네덜란드과 극단의 대립각을 세운 인물이니 여전사 니아긍세랑을 존경하는 마음이 지극했을 터입니다. 하지만 네덜란드 감옥에 갇힌 니아긍세랑을 풀어줄 있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시기는 처음 즉위했던 1792년이 아니라, 영국이 네덜란드를 물리치고 자바섬을 침탈하면서 일찌기 네덜란드의 덴덜스 총독에게 폐위당했던 하멩꾸부워노 2세가 다시 복권해 왕위를 되찾은 1811년의 일일 것입니다. 그녀가 사로잡힌 정확한 연도는 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지만 기얀티 조약이 1755년의 일이고 그녀는 1752 생이니 대략 1775 전후 , 그녀가 23-24 경일 것이라 추정됩니다. 그렇다면 1811년까지 37 전후의 세월을 네덜란드군의 감옥에서 자유를 잃은 살았던 것이라 추정할 있습니다. 인고의 세월을 겪고 돌아온 그녀에겐  이상 젊음이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끄라톤 궁의 성대한 환영을 받으며 명예를 되찾았고 하멩꾸부워노 2세는 빠늠바한 나타쁘라야와 니아긍세랑의 헌신을 크게 치하했습니다.

  

족자 술탄국이 여러 우여곡절을 겪은 1825 디포네고로 전쟁이 시작되자 75세의 니아궁세랑은 다시 군대를 거느리고 나서 디포네고로를 도와 전선에서 네덜란드와 싸웠습니다. 전쟁 내내 그녀의 사위 라덴마스 빡빡(Raden Mas Pak-pak) 군사고문으로 곁을 지켰죠. 라덴마스 빡빡은 그녀가 이상 전선에 나설 없게 되었을 때에도 장모의 뜻에 따라 전투를 속행했습니다. 그녀는 뿌르워다디(Purwodadi), 드막, 스마랑, 주와나(Juwana), 꾸두스(Kudus), 렘방(Rembang) 등에서 전투를 벌였고 쁘람바난 지역을 네덜란드군으로부터 방어하는 임무를 수행하기도 했죠. 기본적으로 그로보간(Grobogan)에서 스라겐(Sragen) 경계에 이르는 옛 마타람 영토를 호령했습니다. 그녀는 룸부(Lumbu – 녹색 타로잎)으로 위장하는 전술을 곧잘 사용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룸부를 기둥에 연결해 군대 전체가 마치 타로 과수원처럼 보이도록 위장하는 기술을 발휘했다고 합니다.

 

이상한 일도 있었죠. 1830 디포네고로 전쟁은 결국 막을 내린 후의 일입니다. 네덜란드 측은 무슨 원칙 또는 변덕 때문이었는지1833년부터 그녀에게 100굴덴의 연금을 지급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뒤늦게나마 니아긍세랑의 마음을 돌리기 위한 노력이었을까요?

 

그녀는 1838 족자에서 세상을 떠났고 족자 꿀론쁘로고(Kulon Progo) 버꾸(Beku) 묻혔습니다.  오늘날 그녀의 무덤은 꿀론쁘로고의 깔리바왕(Kalibawang)에 있습니다.

 

그녀는 1974 10 13 대통령령으로 인도네시아 국가영웅으로 선정되었고 라수나 사이드 거리엔 그녀의 이름을 문화 박물관 담당 관공서 건물이 있습니다. 이곳은 오늘날 웨스틴 호텔 건너편, 또는 DKI 자카르타 통합민원실(PTSP) 건물 바로 옆인데 매우 낡은 건물의 2층엔 Women’s International Club(국제부인회-WIC)이라는 국제자선단체가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대통령 영부인을 회장으로 하고 각국 대사관들을 자동적 정회원으로 단체에 가입하려는 인도네시아 귀부인들을 오래 기다려야만 가입이 가능하고 외국인들에게도 국가별도 회원 쿼터가 배정되어 한국 부인들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인도네시아 교육의 아버지로 불리며 역시 국가영웅으로도 선정된 끼하자르 데완타라(Ki Hadjar Dewantara)는 니아긍세랑의 손자입니다. 그의 본명은 수와르디 수르자닝랏(Soewardi Soerjaningrat)이었어요.

 

니아긍세랑은R.A 까르티니나 쭛냑디엔(Cut Nyak Dhien) 등 다른 여성 영웅들에 가려져 그다지 부각되지 않은 측면이 있으나 국가에 분명한 큰 기여를 한 여성임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꿀론쁘로고의 민중들은 그녀를 기려 와떼스시(Kota Wates) 한 가운데에 말을 타고 긴 창을 휘두르는 니아긍세랑의 동상을 세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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