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으로 살아 가기
선교지에 묻히려 돌아온 말기암 선교사 본문
서만수 목사가 처음 자카르타에 들어온 것은 1971년 12월 31일의 일이다. 그는 대한예수교장로회의 선교사 신분이었으나 하나님의 병사로서 각오를 세웠다. ‘작전지에 투입된 게릴라는 감독관이 없다. 오직 임무수행의 명령만 있을 뿐이다. 살고 죽는 것이 오직 거기 있을 뿐이다.’ 1994년 출간한 저서 <남방의 심는 노래>에서 그는 이렇게 회고했다.
1939년 평양에서 출생해 6.25전쟁 중 월남한 서만수 목사는 1970년 9월 대구서현교회에서 개최된 제55회 총회에서 인도네시아 선교사로 파송받았다. ‘주님을 위하여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다 죽어라. 너는 죽고 인도네시아는 살아야 한다.’ 총회장 김창인 목사가 이 자리에서 서만수 선교사 부부에게 당부한 이 비장한 명령은 이후 그의 선교일생을 관통하는 모토가 된다.
그가 처음 술라웨시 토라자 지역 마마사에 도착한 후 안내자와 함께 말과 당나귀를 타고 밀림 속 골짜기 구석구석 마을들을 순회하며 시작한 선교사역은 1972년 자카르타에 한인연합교회를 설립한 후에도 계속되었다. 오랜 기간 인도네시아 한인 개신교의 구심점이었고 지금도 한인사회에서 가장 큰 교세를 떨치고 있는 자카르타한인연합교회(이하 연합교회)는 서만수 목사 평생 현지 선교의 동역자가 되었다.
3천 개의 지교회 설립을 목표로 했던 그는 1974년 첫 결실을 맺은 이후 384개의 지교회를 개척했다. 이들 개척교회에 파송할 사역자들의 양성과 교육은 서목사 선교사역의 또 하나의 축이었다. 그는 말루꾸 소재 인도네시아 기독대학교(Indonesian Christian University of Molucas – UKIM, 1985년 9월 23일 개교)와 스틴신학교(Sekolah Tinggi Teologi Immanuel Nusantara Jakarta – STTIN, 1991년 8월 28일 개교)의 설립과 운영에 간여했고 특히 그의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던 1990년 이후 스틴신학교는 연합교회와 함께 오지교회 개척사역의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2018년 개교한 자카르타국제대학교(Jakarta International University-JIU) 역시 그의 필생의 목표 중 하나였다. 2006년 서목사는 연합교회와 함께 인도네시아 두란노 교육재단을 설립하고 2008년 6월 자카르타 근교 델타마스에 5만 평방미터의 캠퍼스 부지를 구입하여 현지인들을 위한 종합대학설립을 꿈꾸었다. 그의 유지는 몽골국제대학교 교수와 부총장을 역임한 이용규 선교사가 이어받아 마침내 결실을 맺었다.
1977년 대통령 표창과 1990년 제1회 한국기독교 선교대상을 받으면서 인도네시아 한인선교사의 프로토타입처럼 여겨졌던 서목사도 간혹 예상치 않았던 부분에서 인간적인 면모를 비췄다. 그는 중학교 입학기념으로 어머니에게 카메라를 선물받은 이래 사진찍기를 즐겼고 독서는 평생의 취미였다. 그렇게 쌓인 그의 문학적 소양은 수핍집 <남방에 심는 노래>, 시집 <둥개야>, <남방에 피는 꽃> 등의 저서에서 묻어난다. “제가 어떠한 상황에서라도 또는 누구에게라도 사랑으로 대하지 못하고 화를 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제 잘못입니다.” 가끔 선교사답지 않게 터져 나오곤 하던 다혈질의 성격은 그래서 더욱 인간적이었고 인니 법무성에서 국적 취득 통지가 왔을 때 국적이 바뀐다는 사실에 인간적 감정을 누르지 못해 눈물을 흘렸다는 일화는 깊은 공감을 자아낸다.
하나님의 종도 인간인지라 선교지에서 나이가 들며 여기저기 고장나기 시작했고 2009년 급기아 폐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얼마 남지 않는 인생의 마지막 나날들을 고향에서 정리하는 대신 서목사는 7월 22일 아산병원에서 몸을 일으켜 다시 자신의 선교지를 향했다.
“나는 다시 자카르타로 향하여 간다. 태어나서 자란 이곳을 다시 한번 떠난다. 아무도, 아는 사람도, 오라는 사람도 없는 그곳에 말씀을 받아 파송된 지 어언 40년을 바라보면서, 나는 또다시 새로운 힘과 각오로 떠난다. 1997년 7월, 신장 하나를 떼어버리고 돌아갔던 그 때처럼, 2004년 4월, 43일간의 혼수상태를 떨쳐버리고 회생하여 아무도 붙들지 않고 막지 않았던 길을 떠나던 그때처럼, 나는 다시 떠난다. 다음에 또 무슨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하더라도 그곳, 아무래도 이곳보다는 영적으로 어두운 그곳을 향해 나는 떠나야 하는 것이다.”
선교생활 40년, 그래서 인생의 마지막에 선 순간 그는 오히려 초심에 더욱 가까이 가 있었다.
공교롭게도 2009년 8월 25일 총회세계선교회는 월문리 선교센터에서 서만수 목사의 성역 40주년을 기념해 원로선교사로 추대했다. 그러나 병마와 싸우며 이미 거동할 수 없었던 그를 대신해 사모 정소라 선교사가 추대패를 수여했다.
슬하에 자녀들 두지 않았던 서만수 선교사는 9월 16일 오후 2시 부인만을 남기고 자카르타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향년 70세였다. 하늘나라에 가면 영원히 안식할 테니 이 땅에서 안식년이란 이름으로 쉴 필요 없다던 그는 그렇게 영면에 들었고 마지막까지 추진하던 종합대학교 부지, 지금의 자카르타 국제대학교 바로 곁 따만 끄낭안 레스타리 공원묘지(Taman Kenagan Lestari)에 묻혔다. 정소라 선교사도 2016년 4월 22일 남편의 뒤를 따랐다.
2010년 9월 27일 그의 소천 1주년을 기념해 한인연합교회에 ‘서만수 목사 기념관’이 개관했다. 예의 어머니께 선물받은 사진기를 비롯해 타자기, 예배용 예복, 논문, 표창, 상패들은 물론 선교 초창기 술라웨시 토라자 지역에서 시작했던 선교활동의 역사가 전시되었다. 이 전시관은 자카르타 국제대학교가 완공되면서 2018년 이전했다.
‘나는 목회자이기보다 선교사’라고 스스로 자리매김하며 처음과 끝이 한결같았던 서만수 목사의 일생은 인도네시아 한인사회는 물론 한국 개신교 사회에 큰 울림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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