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문학·웹소설 넘나드는 정무늬 작가
웹소설을 쓰면서 ‘독자들의 취향’으로 글쓰기 방식 달라져
아무도 읽지 않는 글은 일기에 불과…작가와 문단도 변해야
미소년 세자와 내관(내시)이 사랑에 빠진다(알고 보니 출생의 비밀을 가진 여자아이). 엄청난 ‘스펙’을 가진 미남과 사랑에 빠진다(알고 보니 도깨비이거나 외계인). 현실의 게임(게임도 현실이 아니지만)에선 상상도 못할 능력치와 배경을 가진 캐릭터가 되기도 한다.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에게 통쾌한 해방감을 선사하기 때문일까. 상상력의 경계가 어디까지인가 싶은 흥미로운 웹소설들이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인기 드라마, 웹툰, 영화가 ‘알고 보니’ 웹소설이었다는 것은 더 이상 놀라운 일이 아니다. 온라인 플랫폼에서 연재되는 다양한 장르의 소설을 통칭하는 웹소설. 이제 콘텐츠 산업에선 대세가 됐다.
2018년 한국콘텐츠진흥원이 발표한 조사 결과에 다르면 국내 웹소설 시장은 2013년 100억원에서 2018년 4000억원 규모로 5년 만에 40배 이상 커졌다. <성균관 스캔들> <구르미 그린 달빛> <김비서가 왜 그럴까?> <저스티스> 등 인기 드라마의 원작도 웹소설이었다. 웹툰의 시장 규모(약 7000억원)보다는 작지만, 새롭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찾는 독자들이 몰리면서 성장세를 타고 있다.
■ 쉽고, 빠르게, 재밌게
다음과 네이버 등 대형 포털사이트나 ‘조아라’ ‘문피아’ 등 웹소설을 전문으로 하는 플랫폼도 자리를 잡았다. 남성 독자들이 좋아하는 판타지나 무협 장르 웹소설이 많은 문피아는 전체 이용자가 지난해 11월 90만명을 넘어섰다. 작가 수는 5만3000여명, 매월 약 900명의 신인들이 웹소설 작가에 도전하고 있다. 연재된 작품만 7만5000여종, 180만여편에 이른다. 매월 인기 상위 10개 유료작품의 경우 한 편당 평균 1만5000명이 구독한다. 2013년 유료화한 문피아는 2015년 매출이 100억원을 넘지 못했지만, 지난해에는 430억원에 달했다.
웹소설은 스마트폰을 이용한 ‘스낵컬처’가 보편화되면서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출퇴근길이나 화장실에 앉아 있는 3~5분 남짓하는 짧은 시간 동안 쉽고 빠르고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콘텐츠를 사람들이 찾으면서 웹소설도 인기가 늘었다. 웹소설은 2000년대 초반 등장한 ‘인터넷 소설’의 계보를 잇는다. 작가 귀여니는 10~20대가 쓰는 인터넷 용어와 그들의 문화, 상상력을 가득 담아 빠르게 진행되는 로맨스 스토리를 엮어냈다. <늑대의 유혹> <그놈은 멋있었다> 등 인터넷에서 공개한 소설은 큰 인기를 얻었고, 정식으로 출간돼 영화로도 제작됐다.
2000년대 ‘인터넷 소설’ 계보 이어
스마트폰 이용 ‘스낵컬처’ 보편화에
2018년 4000억원 규모로 급속 성장
활자 기반으로 인간의 상상력 자극
시각적 표현 힘든 상황도 구현 가능
인기 드라마·웹툰의 원작이 되기도
순문학처럼 예술성 추구하기보다
짧은 문장과 대사로 몰입 이끌어내
독자를 만족시키는 글쓰기에 방점
로맨스 소설뿐만 아니라 무협, 판타지, SF 등 인터넷을 통해 자유롭게 읽히던 장르소설들이 ‘웹소설’이라는 카테고리로 묶여 유통되면서 하나의 영역으로 자리를 잡았다. 과거 인터넷 소설로 불렸을 때는 소수의 마니아들이 모이는 웹사이트에서만 읽히거나 값싸게 출간돼 ‘도서대여점’에 공급됐던 것과 달리, 이제는 누구나 스마트폰을 통해 자유롭게 읽고 즐긴다는 점이 다르다.
웹소설은 그림이나 영상 등 시각화 콘텐츠인 웹툰·드라마·영화와 달리 활자를 기반으로 인간의 상상력을 자극한다는 것이 가장 큰 매력으로 꼽힌다. 시각적으로 표현하기 힘든 다양한 상황도 비교적 자유롭게 써내려갈 수 있고, 누구나 한번쯤 상상해볼 법한 일들을 이야기의 형태로 구현해냈다는 점이 인기 비결이다.
콘텐츠 소비 방식의 변화도 웹소설 인기의 요인 중 하나다. 과거엔 돈을 내고 음악을 다운로드해 듣는 디지털 음원 방식이 생소해 ‘불법 다운로드’ 문제가 불거졌지만, 최근에는 스마트 결제 시스템 등 지불 방식이 간편해졌고, 스트리밍 서비스 등을 통해 제값을 내고 콘텐츠를 소비하는 방식이 자리를 잡았다. 웹소설도 이런 소비문화와 맞물리면서 편당 100원 정도의 부담스럽지 않은 가격으로 손쉽게 돈을 내고 볼 수 있는 콘텐츠로 인식됐다.
■ 즐겁게 보고 즐기는 창작물, 웹소설
지난 2일 경기 평택의 한 카페에서 만난 정무늬 작가는 전날 세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터널, 왈라의 노래’로 당선돼 ‘등단’했다. 당선 소감문 말미엔 출생연도와 출신, 학력 등 이력과 함께 ‘웹소설 작가’라는 직업이 함께 적혔다. 지난 10년간 순문학을 쓰며 습작 기간을 거친 정 작가는 2016년 웹소설 공모전에 당선됐다. 정 작가는 웹소설을 쓰게 된 계기를 팟캐스트 방송을 들으면서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소설로 밥벌이하는 작가는 열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는데 그게 직업으로서 의미가 있느냐는 이야기를 듣고 뒤통수를 세게 맞은 것 같았다”는 것이다. 웹소설을 읽어본 적 없이 데뷔에 이른 정 작가는 “운 좋은” 편에 속한다. 데뷔작 <세자빈의 발칙한 비밀>은 초능력 소유자인 여자 주인공이 남장을 하며 겪는 사극 로맨스 소설이다.
웹소설은 스마트폰으로 짧은 시간 집중해 읽는 콘텐츠인 만큼 스토리 진행이 빠르고 자극적일 수밖에 없다. 상황을 묘사하는 장황한 글보다는 짧은 문장과 대사를 통해 몰입을 이끌어야 한다는 뜻이다. 독자는 조금만 흥미가 떨어져도 ‘뒤로 가기’를 눌러 읽기를 포기한다. 그래서 정 작가가 꼽는 웹소설의 경쟁 상대는 “소설책이 아니라 웹툰이나 유튜브”다. 정 작가는 “웹소설을 ‘어린 학생들 돈 뺏어 먹는다’ ‘수준이 낮다’ ‘뻔하다’는 식으로 얕잡아 보는 사람도 많다”고 말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문장이 좋거나 기발하고 매력적인 캐릭터를 잘 만들어내는 능력 있는 작가들이 많습니다. 순문학처럼 ‘예술성’과 닿아 있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이 보고 즐기는 창작물을 만들어내는 ‘크리에이터’로서의 기량이 대단한 작가도 많고요.”
정 작가가 생각하는 웹소설과 순문학의 차이는 누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쓰느냐에 따라 갈린다. 순문학은 작가 자신의 정체성과 개성, 예술성, 사상 등을 표현하는 것이 핵심이라면 웹소설은 독자들이 보고 즐기는, ‘읽히는 글’에 방점이 찍힌다. 그래서 소재나 문장 모두 독자들의 취향을 따른다. 웹소설을 쓰면서 작가로서의 글쓰는 방식도 많이 달라졌다고 했다. 문장이 짧아지고 대사가 늘었다.
가장 큰 변화는 독자를 생각하게 된 점이다. 정 작가는 “아무도 읽지 않는 글은 일기에 지나지 않는다”며 “책을 읽어줄 독자들은 유튜브를 보고 웹툰을 보면서 빠르게 변화했는데, 글을 쓰는 작가와 문단만 변하지 않으면 점점 격차가 벌어질 수밖에 없다”고 짚었다.
■ 끊임없는 스토리 생산자
웹소설 작가가 되려면 정 작가처럼 공모전에 당선되거나, 무료연재 또는 출판사에 작품을 투고하는 방식으로 도전할 수 있다. 직업을 갖고 있으면서 웹소설을 쓰는 겸업 작가도 있지만, 웹소설 시장이 커지며 안정적인 수입을 올리면서 전업 작가로 나서는 이들도 늘고 있다. 인기 작가들은 작품당 계약금이 수천만원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등단과 같은 높은 허들은 없지만 일단 발을 들여놓으면 인기의 척도가 바로바로 집계되는 냉혹한 경쟁 시스템에 놓인다. 정 작가는 “하루에 2만~3만자 정도는 꾸준히 쉬지 않고 써야 하고, 연재가 끝나면 새 작품 구상이나 계약도 쉬지 않고 해야 한다”며 “순문학을 써야 할 때와는 소재나 문장, 집필 방식도 달라져 완전히 다른 뇌가 필요했다”고 말했다. 고정적인 수입을 얻으려면 ‘업데이트’를 위해 꾸준히 집필 활동을 해야 한다. 이 때문에 웹소설 작가들은 “끊임없이 스스로를 착취한다”는 푸념을 하기도 한다. 정 작가는 “이렇게 공들여 쓴 작품이 트렌드에 뒤처지거나 인기를 끌지 못하면 쉽게 잊혀지기 때문에 지난 작품이 성공했거나 이름을 어느 정도 알린 작가라도 반드시 성공을 보장할 수 없다”고 웹소설 업계의 현실을 이야기했다.
국내 1세대 무협소설 작가 출신인 김환철 문피아 대표는 “웹소설을 기반으로 한 드라마·영화·게임 등 2차 콘텐츠 제작이 활발해지는 만큼 웹소설 시장의 성장세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고 했다. 스마트폰 보급과 인터넷 환경 발달 등 모바일을 통해 주로 유통되는 웹소설이 활발하게 소비될 수 있는 환경은 이미 조성됐다는 얘기다. 웹소설 작가를 꿈꾸는 이들에게 문 대표는 “다른 사람의 성공을 보고 조급해하지 말 것, 글쓰기는 오랜 시간 투자해야 하는 마라톤이라 치열하게 노력하는 작가들이 늘 좋은 결과를 낸다는 점을 기억할 것”을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