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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등뒤에 다가오는 칼든 그림자

등뒤에 다가오는 칼 든 그림자

beautician 2020. 1. 1. 10:00

 

등뒤에 다가오는 칼 든 그림자

 

 

 

 

 

 

 

 

 

 

1.

 

양프로를 처음 만난 것은 골프샵을 막 시작하던 시기였어요그의 미션은 한국 모 골프협회의 인도네시아 지부를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지부설립계획서를 올리고 지부의 사무국장을 맡는 조건이었지만 당장 월급이나 해외근무수당이 나오는 것도 아니었으므로 스스로 먹고 살 자생적 수익 모델이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의 기본적인 아이디어는 현지 프로협회와 연계해서 회원교환제도를 만들어 모종의 교환회원권 또는 라이센스를 발급하도록 하고, 협회회원들이 이 국제 라이센스를 신청토록 하여 별도의 회비수입을 창출하면서 이 회원들이 인도네시아에서 대폭 할인된 가격으로 골프를 칠 수도 있는 여건도 마련해 준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인도네시아 프로골프협회와의 제휴가 필수적이었지만 당시 자카르타의 모든 것이 낯선 그로서는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엄두도 낼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당시 그가 당면한 문제는 그것뿐이 아니었어요.

인도네시아로에서 전혀 의사소통이 안된다는 것도 못지 않은 문제였습니다현지 교민지의 광고, 인터넷 웹포스팅을 통해 현지 포스트는 현지에서 차량렌트업 하는 김사장이라는 사람의 도움을 받게 되었습니다. 양프로는 협회 사업이 시작되기 전 최소한의 고정수입을 확보하기 위해 김사장 조언에 따라 미화 2만불을 보내 이수즈(Isuzu)에서 생산한 펜더(Penther) 밴 두 대를 사서 김사장 렌터카 사업에 지입합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양프로 자신도 인도네시아로 날아와 김사장이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에 묵으며 지부 설립업무를 시작했지요.

 

그러나 불과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양프로는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징후를 여기저기서 느끼게 됩니다. 김사장이 중고차를 새로 샀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었습니다. 김사장은 아직 할부도 끝나지 않은 자기 중고차를 양프로에게 신차 가격에 팔아 폭리를 취한 것입니다. 그나마 모든 명의가 김사장 앞으로 되어 있어 양프로는 2만불을 완전히 떼일 상황에 처했습니다. 설상가상 인도네시아 비밀경찰 대장이 자기 양아버지라고 주장하고 급기야 소장하고 있는 권총을 꺼내 보이며 위협하는 김사장을 상대로 한참을 싸워야 했던 양프로는 결국 우여곡절 끝에 그 두 대의 차량 중 한 대만, 그나마도 아직 할부가 1년 이상 남아 있는 차를 끌고 하숙집을 나오지만 투자금 대부분을 건지지 못했습니다. 결국 인도네시아에 첫 발을 내딛자마자 어퍼컷 한 방을 제대로 맞은 것이죠

 

양프로는 원래 전도유망한 태권도 선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다리가 부러지는 사고, 방황, 현대 자동차 영업사원, 핸드폰 가게 사업 등을 거쳐 골프에 입문했다가 프로자격증까지 따게 되었고 골프에 미친 사업가들에게 늘 일어나는 일이지만 사업은 그가 골프에 미쳐있는 동안 급전직하 무너져 내려 인도네시아에 올 당시에는 유산으로 받은 얼마간의 부동산과 그간 모은 돈으로 직접 건축한 다세대주택 한 채가 재산의 전부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인도네시아에 도착하자마자 렌터카 김사장에게 눈탱이를 맞은 것입니다.

 

그로부터 한 두 달 사이에 인도네시아 프로골프협회(PGPI : Persatuan Golf Professional Indonesia)의 사무국장 아구스씨를 시작하여 부총재 누르살람씨를 거쳐 당시 PPP(Partai Patriot Pancasilla : 빤짜실라 애국당)의 총재이자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유명한 정치가 얍또 수조수마르노 회장에게 선을 대며 한국 협회와의 제휴방안을 조율하던 양프로는 다른 한편으로는 동부 자카르타의 한 골프연습장에 다른 한국인 프로와 의기투합하여 작은 골프 아카데미를 설립합니다.

 

장소 임대와 사무실 부분의 건축 등 대부분의 비용을 한화 수백만 원 가량 양프로가 부담했지만 그의 동업자는 아카데미 설립을 하면서 양프로의 명의는 전적으로 배제하고 자신과 부인의 명의를 사용하고서  몇 달 후 한화 십수만원에 불과한 백몇십만 루피아를 비용을 제한 투자원금이라며 쥐어주면서 양프로를 아카데미에서 쫓아냅니다. 그게 두 번 째 맞은 어퍼컷이었습니다. 그는 이제 다리까지 풀렸습니다.

 

그러나 그 일이 있기 전, 양프로가 한국에서 온지 불과 3개월 만에 한국 협회와 인도네시아 프로골프협회는 자카르타의 중심가인 수디르만 거리의 르메르디안 호텔에서 회원 및 라이센스 교류를 위한 양해각서에 전격 서명합니다. 북부 수마트라 아쩨(Aceh) 지역의 25만명을 비롯, 동남아 전역에서 40여만명의 사망자를 냈던 초대형 쯔나미가 몰려온 지 채 몇 주 지나지 않았던 시점이었어요. 한국에서 방회장과 여전무를 비롯한 몇몇 임원진이 함께 날아오고 인도네시아 측에서는 얍또 회장을 포함한 임원 전원이 참석한 성대한 모임이었습니다물론 양측의 이해가 그림처럼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당시 신생 사단법인이었던 한국측 골프협회로서는 국제프로골프협회 정회원국가인 인도네시아의 명실상부한 정규 프로협회인 인도네시아 프로골프협회와의 제휴로 위상을 한껏 높일 수 있었고 한편 인도네시아 프로골프협회의 입장에서는 총상금 15천만 루피아( 15천불)의 대회를 열어주겠다는 조건을 걸고 제휴의 손길을 내미는 한국측 협회를 거절할 아무런 이유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조인식 행사를 위해 인도네시아 지부의 임원진을 구성하던 양프로는 계속 난관에 부딪혔어요. 인도네시아 측은 얍또 회장을 포함한 임원진 모두가 최소한 파(par)를 치는 실력자들이었던 반면 지부임원들은 주말 골퍼 정도의 핸디를 놓고 있었습니다. 그나마 명색이 골프 프로인 양프로와 당시 시내 골프연습장에서 아카데미를 운영하던 신프로가 체면을 세울만한 골프실력을 가지고 있었어요. 이 행사에 지부 감사 자격으로 참석한 신프로는, 그러나 양프로와는 대체로 적대적인 관계였죠신프로 역시 한국을 다녀 갈 때마다 골프협회들을 기웃거리며 지부 설립을 타진했고 신프로의 포부를 들은 한국측 협회가 신프로와 양프로 두 사람 모두에게 거의 비슷한 시기에 똑 같은 제안을 수락한 것입니다. 한국측 협회로서는 양손의 떡이었겠지만 그걸 모르는 신, 양 두 사람은 서로 치열한 물밑 경쟁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한국 측 협회는 평생 운동만 한 이 우직한 사람들을 저울질하며 장난을 친 것입니다.

 

결국 현지 협회와의 제휴를 양프로가 성사시키면서 두 사람의 대결은 양프로의 완승으로 끝났지만 한국 협회에서는 신프로를 지부 감사로 임명하라는 결정이 내려옵니다. 아마 앞으로도 신프로를 통해 양프로를 견제하려는 의도였겠지만 이미 심기가 비틀린 신프로는 썩 내키는 표정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르메르디안 호텔에서 있었던 양해각서 체결식은 그 성대함에도 불구하고 모두들 양복을 빼 입고 잔뜩 멋을 낸 가운데 신프로 혼자만 마치 반항이라도 하듯 새빨간 티셔츠를 입고서 나타나고 기념사진 속의 두 프로는 서로 쭈뼛쭈뼛한 포즈를 취하게 됩니다.

 

 

2.

방회장 일행의 이 첫 방문에서는 웃지 못할 일들이 많은 벌어지지만 그 중 압권은 체결식 다음 날 마또아 골프장(Matoa National Colf Club)에서 있었던 골프회동에서였죠.

 

얍또 수조수마르노 당시 인도네시아 프로골프협회 총재

당시 인도네시아 초행길이었던 방회장은 인도네시아나 현지 프로골프협회, 특히 얍또 회장에 대해 잘못된 인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얍또 회장은 이 기회에 서로 얼굴 익혀야 한다며 갤러리를 빼고도 6명이나 되는 인원 전부를 한 팀으로 묶어 라운딩을 시작합니다. 상식을 살짝 벗어난 이런 결정에 캐디는 물론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한 이유는 얍또 회장의 무시무시한 정치적, 사회적 배경 때문만이 아니라 그가 마또아 골프장의 공동소유주 중 한 명이기도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저 자식, 골프 치면서 웬 전화를 저렇게 해 대?”

 

그런 사실을 전혀 알 리 없는 방회장은 첫 홀에서 버디를 잡은 뒤, 라운딩 시작부터 그린에 이를 때까지 전화기를 거의 놓지 못하는 얍또 회장의 등뒤에서 계속 그렇게 구시렁거립니다. 얍또 회장이 전화하는 내용은 바로 몇 주 전 수마트라 북단의 아쩨(Aceh) 지역을 강타한 쯔나미 후속조치에 대한 지시들입니다. 골프를 치고 있던 시점은 2005년 1월. 2004년 12월 26일 인도양에서 발생한 해저지진으로 발생한 쯔나미가 아쩨는 물론 동남아 여러 곳에 대형 쯔나미를 일으켜 40만 명 가량이 사망한 사건이 벌어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직도 아쩨에서는 시신 수습과 재해 복구가 이루어지면 많은 구호물자와 인력이 들어가고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압또 회장에게 빗발치는 전화의 내용들은 구호품 트럭들이 출발을 보고하고, 당시에도 속속 도착하고 있는 외국인 자원봉사단체들의 현지 진입을 조정하고, 친지가 행방불명된 아주머니가 생사확인을 부탁해 오는 등 모두 그 쯔나미 후속대책에 관련된 일이었습니다.  거기서 통역을 하던 나는 얍또 회장이 PPP 당의 현직 총재이며 현지의 대단한 거물이라는 것과 아쩨에서 발생한 쯔나미 때문에 전화통화하고 있음을 다시 한번 방회장에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 휘하에 뻐무다 빤짜실라(Pemuda Pancasila)라는 전국단위의 청년 전위대 조직을 거느린 얍또 회장이 내로라 하는 조폭들에게조차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실력자라는 사실 역시 방회장은 절대 알 리가 없습니다.

 

지가 인도네시아 대통령이야?”

 

그는 여전히 불만스러운 표정입니다. 이런 골프협회 관련된 일이 아니라면 그 자리에 참석한 한국사람 그 누가 아무리 선을 대려 애써도 평생 한 번 만나 보기 힘든 사람과 지금 라운딩을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는 전혀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방회장은 얍또 회장이 인도네시아의 막강한 실력을 가진 정치가에 골프장 주인에 프로골프협회 회장에 마피아 대부 할아버지라 하더라도 한국과 인도네시아의 경제력의 차이만큼이나 얍또 회장을 한참 아래로 얕잡아 보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기어이 결례를 저지르고 맙니다.

 

이거 내가 이번에 올 때 공항에서 사서 한번 밖에 안 쓴 건데 당신 한번 써 봐, 잘 어울리겠네.”

 

방회장은 뜬금없이 자신이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벗어 얍또 회장에게 받으라고 강요하다시피 합니다. 그리고 다음 홀에서 이번에는 골프백에 꾸깃꾸깃 넣어 두었던 골프 티셔츠를 하나 꺼내 마치 적선하듯이 입어 보라고 합니다. 얍또 회장은 야릇한 미소를 흘리고 있을 뿐이지만 난 방회장의 방약무인한 태도에 식은 땀이 나기 시작합니다.

 

하늘이 도왔는지(?) 세 번 째 홀에서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당분간은 라운딩 속개가 어려운 상황. 그러자 얍또 회장은 기다렸다는 듯이 거기서 라운딩을 중단하고  자기 집으로 모두를 초대하겠다고 합니다. 방회장은 아마도 다 찌그러져 가는 빈민촌을 떠올렸는지 미간을 찡그리지만 상대 협회 회장의 공식적인 초청을 단칼에 거절할 수는 없는 일이었죠. 모두들 옷을 갈아 입고 차에 올랐을 때에도 아직 장대비가 쏟아 붓는 중이었고 빨간색 오프로드용 찝차 운전석에 앉은 얍또 회장은 방회장과 나를 태우고 마치 밀림 속을 헤쳐 나가듯 무서운 기세로 차를 몰기 시작했습니다.  20분쯤 달려 도착한 그의 저택 정문이 열리자 방회장의 입이 쩌~억 벌어집니다.

 

전에는 여기 악어도 키웠는데 말이지.”

 

이렇게 말하며 가리키는 1미터는 훨씬 넘을 듯한 넓은 폭의 도랑이 마치 요새의 해자처럼 담장 안을 둘러가며 나 있는데 주차장까지 약 200미터 정도 진입로 좌우로 설치되어 있는 맹수용 철창우리들이 그의 말을 강력히 뒷받침해주고 있고 몇몇 우리 안에는 정말로 원숭이들과 진귀한 새들이 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얍또 회장의 저택은 그 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호랑이도 네 마리 있었는데 수마트라의 동물원에 기증했어요. 그 놈들 정말 볼만 했는데.”

 

맹수를 집에서 키우는 건 일반인에게 쉽게 나오는 허가가 아닙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얘기하는 얍또 회장은 주차장을 지나 저택 앞에 차를 세우는데 막 지나쳐온 거대한 철재 지붕의 주차장은 그 넓이가 대략 300평은 넘을 듯 했고 그곳엔 오프로드용 찝차들을 위시해서 고가의 차량 20여대가 모두 ‘234’가 적힌 번호판을 달고 주차해 있어 이미 쩍 벌어져 있던 방회장의 입이 닫힐 줄을 모릅니다. 뒤따라 도착한 양프로와, 여전무를 포함한 한국측 임원들 역시 마찬가지였고요.

 

그러나 현관 문을 열고 저택 안으로 들어가자 더욱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200평은 족히 될 거실에는 사자며 곰이며 늑대며 순록이며 열대, 극지를 가리지 않고 수백 마리의 야생동물들이 마치 아직 살아 있는 듯 역동적인 모습으로 박제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케냐에 코끼리 사냥 갔다가 딸 결혼식에 늦을 뻔 했어요. 매복하면서 며칠 밤을 새운 끝에야 간신히 잡았죠. 부랴부랴 간신히 시간을 맞춰 돌아 올 수 있었어요.”

그 코끼리는 가져 왔나요?”

워낙 큰 놈이었거든. 몸무게가 7~8톤쯤. 그래서 머리만 가져왔지만 머리 무게만도 1톤은 족히 되더군요.:

그 놈은 어디에…?”

당신들 머리 위에 있잖소?”

 

뒤돌아 본 우리는 비명을 지를 뻔 했습니다. 긴 코를 늘어뜨린 박제된 코끼리의 머리가 길다란 상아를 치켜 세운 채 우리가 들어온 현관 위의 높은 벽에 걸려 우리를 내려다 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머리의 높이만도 웬만한 사람 키를 훌쩍 넘었으므로 마치 그 코끼리가 박치기로 벽을 부수고 들어와 집안을 휘둘러 보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습니다.

 

얍또 회장은 골프장에서 방회장에게 당한 모욕을 그런 식으로 부드럽게, 그러나 톡톡히 갚아 주고 있었습니다. 방회장 일행은 얍또 회장이란 사람의 위상과 그가 가진 부의 정도가 자신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것임을 이제 절실히 깨닫고 있었죠. 그러나 얍또 회장은 거기에 쐐기를 박습니다.

 

, 이 분들 2층에 좀 안내해 주거라.”

 

그가 불러 안내를 부탁하는 젊은이는 마치 일꾼처럼 반바지에 칼라 없는 목 늘어진 티셔츠를 아무렇게나 입고 있었는데 손님이 올 줄을 꿈에도 모르고 있던 막내 아들이랍니다. 그가 보여준 2층의 큰 방은 100평쯤 되는 공간 모두가 보석과 공예품, 골동품, 그리고 얍또 회장 가문의 가계보, 문장, 깃발과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는 소형 박물관 같은 곳이었습니다. 그곳에서 그가 솔로 지역 왕족의 피를 이은 귀족출신이라는 것과 그의 아버지가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었는지, 그리고 얍또 회장 자신이 인도네시아 사회와 정가에 어떤 자리매김을 하고 있는 사람인지를 알 수 있었죠. 그의 서구적인 외모가 유태계 네덜란드인인 어머니에게서 물려 받았다는 것과 누이들이 가수와 배우로 활약했다는 것도요. 그 방을 나서면서 방회장 일행은 이미 얍또 회장의 열렬한 추종자가 되어 있었고 그 후 골프장에서의 거들먹거리던 태도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어떻게 해서든 이 사람과 줄을 데려고 엎어지기 시작했습니다.

 

 

3.

이 놈들…”

 

한국협회가 후원하는 역사적인 인도네시아 상금대회를 마치고 한달 쯤 지난 어느 날 신프로가 우리 골프샵에서 그렇게 이를 갈고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양프로와 신프로 두 사람을 어떻게 저울질하며 서로 견제시켰는지 그 사이 백일하에 드러난 상태였으므로 두 사람은 마침내 그간의 앙금을 털어내고 화해한 지 오래였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약속한 상금경기를 준비하고 진행하는 과정에서 협회와 양프로 사이의 문제가 곪을 대로 곪아 이제 터지기 직전인 상태가 되어 있었습니다. 

 

대회에 앞서 방문한 방회장 일행의 상금 전달식은 여러 현지 TV들과 신문 매체 기자들을 불러 모아 골프장 클럽하우스에서 기자회견 형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그땐 한국 협회 회원들 30여명에게 인도네시아 골프협회와의 교환 라이센스가 이미 발급된 상태였고 한국 협회가 이번 상금대회의 상금을 준비해 줄 뿐 아니라 10여명의 티칭프로 선수들을 공식 참가시키기로 했으므로 현지 골프계에서도 뉴스가 되고 있었지요. 그러나 막상 열린 이틀 간의 대회 결과는 한국협회로서는 민망할 정도였습니다.

 

인도네시아 프로들이 아무리 형편없는 환경에서 골프를 치고 있고 그들의 폼이 우리가 한국의 골프 아카데미에서 배우는 균형이나 우아함과는 한참 거리가 먼 것이라 해도 티칭프로란 이름을 단 비프로와 정규 PGA 프로와의 분명한 수준차이를 보였던 것입니다. 골프대회 우승과 상금획득을 목표로 칼을 가는 투어프로들과 경쟁보다는 레슨에 안주하고 있던 티칭프로들은 실전에서 실력차이가 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게 너무 지나쳤습니다. 한국 측 프로들이 초반에 줄줄이 모두 탈락해 버리고 만 것입니다. 풀리지 않은 여독과 익숙치 않은 골프장 환경을 탓하기엔 너무 큰 차이가 났습니다. 그 와중에 자신의 우승을 점치면 대회 전부터 기염을 토하던 한 한국인 프로는 정작 경기 초반부터 죽을 쑤다가 경기 중 걸려온 전화를 받더니 집에 무슨 컨테이너가 도착해서 빨리 가봐야 한다며 함께 라운딩하던 인도네시아 측 선수의 양해나 경기 진행관의 허락도 없이 무단으로 경기장을 이탈해 버리는 해프닝을 벌이기까지 했습니다. 그 말도 안되는 행동에 인도네시아 협회 측은 기가 차다는 반응이었고 양프로를 비롯한 한국측 경기위원들은 얼굴을 들 수가 없었죠. 결국 그 프로는 대회가 끝난 후 징계위원회 회부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됩니다.

 

그러나 협회와 양프로의 불화를 증폭시키는 문제는 이 경기의 상금 재원을 마련하는 과정에서부터 벌어집니다.

당시 현지 프로골퍼들이 현지 협회에 내는 연회비는 10만 루피아(한화 1만원 정도), 신규가입비까지 포함해도 25만 루피아(25천원) 정도의 금액이었습니다. 그리고 교환회원증을 발급받는 한국 협회 회원에게는 그 10배인 100만 루피아(한화 약 10만원)를 받는다는 것이 인도네시아 협회 측이 마련한 회비 정책이었어요. 한국 협회에서는 이를 토대로 수수료 5만원을 포함해 그 8배가 넘는 85만원을 라이선스 비용으로 공지해 팔았고 그 결과 한화 2천만원이 넘는 수익이 발생했지요. 이 라이센스 교환사업은 애당초 인도네시아 지부가 계획했던 수익사업이었으므로 최소한 한국 협회가 인도네시아 지부와 그 수익을 나누어야 한다는 게 양프로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한국 협회 측은 공금에서 정식 지급하겠다던 대회 상금을 이렇게 발생한 수익금에서 대체해 인니 협회에 전달했고 나머지 금액은 그들의 대회 출장비로 모두 사용했으므로 이 모든 것들을 성사시키기 위해 그토록 노력했던 양프로는 그 수익금에서 수고비는커녕 공식적으로 지출한 경비조차 단 한 푼도 보전 받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방회장의 심복인 여전무는 양프로에게 이런 저런 명목으로 상당한 액수의 가짜 영수증을 만들어 달라는 요청을 해왔다고 합니다. 명색이 사단법인인데 그런 사실이 들통나면 조용히 넘어갈 일이 아닐 것이었으므로 양프로의 고민은 다시 시작되었고 석사장이나 신프로에게 조언을 구한 끝에 결국 그 요구를 거절하면서 양프로는 협회의 눈밖에 나기 시작합니다. 인도네시아 협회와의 제휴를 성공시킨 공로로 표창장이라도 받아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말이죠. 여전무는 계속 전화를 걸어 영수증을 독촉해 왔고 나중에 법적으로 불이익을 당하게 될 것을 두려워한 양프로는 여전무와의 전화통화를 인터넷폰으로 유도해 컴퓨터에 모두 녹음하기에 이릅니다.

 

골프샵에서 모두 둘러 앉아 녹음된 전화내용을 들으며 신프로가 이를 가는 이유는 협회가 빼먹지 않고 자기 욕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도네시아 지부 설립 이후 양프로와 대립각을 세우던 과정에서 계속 밉보였던 신프로의 목 밑까지 협회의 칼날이 다가와 있었습니다. 실제로 상금전달 행사 후 클럽하우스의 밀실에서 방회장은 누르살람 부총재에게 신프로가 양 협회 제휴관계를 의도적으로 방해하며 명예를 훼손하고 있으니 인도네시아에서 강제추방 할 수 있느냐며 격앙된 어조로 물어 보았고 수위를 넘은 발언에 곤란해 하면서도 누르살람씨는 정말 그렇게 원하신다면 가능은 하다는 취지의 대답을 했었죠. 당시 아카데미를 하고 있던 신프로의 밥줄이 끊길 것을 걱정한 양프로가 방회장을 극구 만류하여 그 요청은 취소되었지만 나중에 그 얘기를 전해 들은 신프로로서는 당연히 격노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방회장을 잡고 싶어? 내 잘 들어. 이렇게 하면 돼.”

 

양프로와 협회의 갈등이 막판까지 치닫고 있을 즈음 석사장은 두 프로에게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말문을 열곤 했습니다. 당시 석사장은 두 사람에게 큰 형님처럼 행동하며 술을 사기도 했고 협회에 맞설 계략을 알려주기도 했습니다. 이 세 사람에게 있어 한국 측 협회는 어느새 공동의 적이 되어 있었고 당시 협회 내에서도 반란의 조짐마저 있어 세를 결집한 일부 이사들이 돈문제로 구설수에 오른 방회장을 횡령혐의로 고소한 상태였으므로 석사장은 이 기회에 방회장을 떨어뜨리고 다른 회장이 추대되도록 하려면 양프로와 신프로가 어떤 정보와 자료를 누구에게 언제 보내고 어느 시점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얘기했습니다. 석사장은 스스로 모사가, 지략가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협회 회장을 갈아 치우는 것만이 그 당시 이미 성립된 인도네시아 프로협회와의 제휴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양프로는 물론 지부 임원들의 지위를 지키고 나아가 관련된 이권들을 유리하게 도모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죠.

 

그러나 방회장은 그렇게 간단히 무너질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지연책과 회유책을 번갈아 쓰며 고소인단을 농락한 방회장 등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반란을 벌였던 이사들을 모두 쫒아 내고 다시 협회 전면에 복귀하여 건재를 과시했으므로 방회장을 무너뜨리려고 배후 공작을 꾸몄던 석사장과 두 프로는 헛물을 켜고 말았습니다.

 

난 돈 벌 길을 찾아야죠. 협회는 더 이상 희망도 없는데…”

 

내가 석사장의 골프샵을 그만두고 나와 내 사무실을 준비하고 있을 때 양프로는 맥빠진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인도네시아 생활은 이미 1년을 거의 꽉 채워가고 있었지만 그간 경주해온 모든 노력이 헛수고였음을 비로소 깨달은 것이죠. 한국 측 협회에 밉보인 지부는 더 이상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고 지부장 이하 모든 임원들마저 활력을 잃으면서 일부 귀국까지 해버리자 지부의 존재 자체가 흐지부지 되어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양프로는 이제 협회와는 전혀 관계없는 일을 찾아야만 했습니다.

 

예기치 않은 사태로 인해 내키진 않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는 방향전환해외 생활, 특히 독립군생활을 하다 보면 간혹 겪게 되는 일이지요.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고난과 방황의 길고 긴 가시밭길이 시작되는 입구가 되기도 합니다. 양프로는 이제 바로 그 입구에 서 있었습니다. 

 

한국에서부터 날아온 이 세 번 째 라이트 스트레이트는 카운터 블로우가 되어 양프로를 철저히 링바닥에 눕혀 버리고 말았죠. 그러나 양프로는 코피를 쏟으면서도 휘청거리며 다시 일어납니다.

 

4.

마침 한국에서는 가을이 깊어가면서 전지훈련의 계절이 다가오고 있었어요.

 

나는 양프로와 함께 분찟(Buncit) 거리에 사무실을 내고 내 미용사업과 양프로의 골프사업을 함께 하기로 했죠마침 인도네시아 프로골프협회의 부총재 누르살람씨가 합작요청을 한 우리 손을 흔쾌히 잡아 주었습니다. 누르살람씨 역시 협회의 명예직 외에 생업을 위한 자신의 사업체를 가지고 있었는데 현지 이동통신업체인 텔콤셀(Telkomsel)의 옥내 안테나를 설치하는 것이 본업이었으니 전지훈련사업을 위한 티칭프로와 통신업체사장, 미용사업가의 조합은 좀 기이한 구조였죠. 아무튼 인도네시아 정.재계와 군에서조차 무시하지 못하는 얍또 회장과 돈독한 관계를 가진 누르살람씨의 참여가 우리가 하려던 일에 큰 힘이 되었습니다.

 

우리들은 골프전지훈련을 위한 별도의 회사를 세우고 장소를 물색하던 중 싱가폴이 바다건너로 보이는 수마트라 리아우(Riau)주 바탐(Batam)섬의 팜스프링스 골프장에 캠프를 설치키로 하고 누르살람씨는 골프장, 현지프로들과의 전반적인 조율을, 양프로는 한국의 타 협회나 지인들을 통한 전지훈련팀의 유치, 나는 골프장과의 세부 조율 및 계약 등 제반 서류작업을 담당하게 되지요. 예기치 않았던 사업의 급진전을 기뻐하며 큰 형님인 석사장에게 보고하러 갔던 양프로는, 그러나 거기서 날벼락을 맞습니다.

 

그게 니 생각이었어? 내가 그렇게 해 보라고 했던 거잖아? 니들이 누르살람을 만날 생각이나 했었어? 내가 만나 보라고 해서 만나 거 아냐? 니들 그렇게 파렴치한 놈들이었어? 남의 아이디어나 훔쳐서 몰래 회사 만들어 놓고 이제 와서 뭐? 일이 잘 됐다고??”

 

그는 양프로가 자신을 그 회사의 사장으로 추대했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었습니다.

양프로는 처음부터 그를 회사의 고문으로 영입해 수익을 나누어 줄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석사장은 양프로가 제대로 말을 끝내기도 전부터 전지훈련사업에 자신을 정규 파트너로 끼워주지 않은 것에 불같이 화를 내고 있었죠. 그는 자신이 그 사업의 주인이라고 강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앞에서도 언급했던 것처럼 아카데미를 세우고, 현지 프로협회와 손잡고, 수익사업을 개발하는 것은 인도네시아에서 골프계통에 몸담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꿈꾸며 계획하던 것이었으므로 어느 개인의 아이디어라고 얘기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석사장은 그것이 자신만의 독창적인 아이디어였다고 끝까지 우기면서 양프로를 윽박질렀습니다.

 

양프로 저 자식은 인간성이 돼먹지 못했어. 뜯지도 않은 담배를 한 곽 고스란히 자기 주머니 속에 숨겨 놓고 남의 담배만 피워 대. 그것만 봐도 그 자식 인간성을 충분히 알 수 있잖아?”

 

석사장은 양프로를 나에게서 떼어 놓기 위해 이간질 하는 것이지만 그 방법이나 예가 너무 유치합니다.

 

내가 저 놈 데리고 있는 동안 한 푼도 이익을 못봤어. 가게도 하나 제대로 못보는 놈이 전지훈련사업을 어떻게 제대로 해? 딴 놈 찾아. 저 놈은 안돼. 지난 번 장비 컨테이너 들어올 때도 도와 준다더니 창고에서 내가 직접 새벽 두 시까지 혼자 물건 내렸어! 그런 예의 없는 자식을…!”

 

한편 양프로에게는 그렇게 말하며 나를 비난합니다. 그러나 그가 골프샵에서 돈을 벌지 못하는 이유는 사치의 극을 달리는 따만 앙그렉 아파트의 둘째 처 때문이라는 것을 나도, 양프로도 이미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의 장비 컨테이너는 내가 그의 샵을 그만 두고 나온 후에도 선적에서 통관까지 일일이 진행해 주었던 것인데 송사장은 그런 도움을 고마워 하기는커녕 그 컨테이너가 이상 없이 창고에 도착했을 때 내가 웃통 벗고 함께 물건을 내려 주러 오지 않았다고 이를 갈았던 것입니다. 자기 물건을 자기 손으로 옮긴 것이 그로서는 그토록 억울했던 겁니다.

 

신프로도 너희 같은 놈들 다시는 얼굴 안본다고 그러더라. 이제부터 니들은 니들데로 살아. 니들은 더 이상 내 동생 아니다.”

 

석사장의 회유와 이간질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전혀 흔들리지 않자 그는 우리 두 사람에게 그렇게 최후통첩을 해 왔습니다. 한동안 양프로와 살갑게 지내던 신프로는 그 며칠 사이에 갑자기 쌀쌀맞게 변해 시선에서부터 찬바람이 쌩쌩 불고 있었어요. 석사장이 신프로에게는 어떤 말로 이간질 했는지 모르지만 그는 한국 협회에게 그렇게 당하고 나서도 이번엔 또 석사장의 말에 놀아나고 있는 게 틀림없었습니다. 운동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단순합니다.

 

그가 나와 양프로를 번갈아 불러 내며 나에겐 이런 얘기로, 양프로에겐 저런 얘기로 이간질 하려 애썼음에도 우리가 굳건히 서로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기본적인 신뢰도 있었지만 놀랍게 발전한 현대 정보수집장치의 덕도 있었습니다. 양프로와 나는 석사장에게 불려 갈 때마다 그가 그 자리에 없는 사람을 사정없이 짓뭉개는 비난과 욕설을 모두 핸드폰과 펜형 녹음기에 몰래 담아와 컴퓨터에 옮겨 함께 들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는 체념하는 듯 했으므로 우린 그제서야 비로소 방해 받지 않고 우리 일을 시작할 수 있었지요. 그러나 같은 자카르타 하늘 아래 그렇게 노골적으로 우리에게 악의를 표출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마음 편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방회장을 끌어 내리려 하던 당시 석사장이 스스로 모사이자 지략가라고 자부하고 있는 점이 줄곧 마음에 걸렸어요.

 

그리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누르살람과의 합작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사람들은 한번도 가보지 않았던 새로운 장소를 기피했고 중국에서 초저가 전지훈련캠프가 속속 개장되면서 태국보다도, 필리핀보다도, 말레이시아보다도, 한국에서는 훨씬 더 멀고 비용도 비쌌던 인도네시아는 전지훈련팀을 유치하는데 실패하고 만 것이죠. 또 다시 1년 후의 겨울을 기다리며 준비하기에는 자본과 시간이 너무나도 한정되어 있던 우리들은 다시 원래의 업무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나는 미용으로.  양프로는 골프레슨으로. 

 

그 좌절이 양프로에게는 안면에 터진 레프트 잽사기를 당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과정에서 사람의 욕심이 어떻게 인간관계를 파괴하는지 새삼 깨닫게 한 가슴 시린 경험이 되었습니다.

 

 

5.

양프로는 한국에서 몇 명의 골프 꿈나무를 받아 자카르타 위성도시인 리포 카라와치(Lippo Karawaci)에 내려가 캠프를 만들고 따만사리 골프연습장과 임페리얼 골프장을 무대로 그들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인도네시아 생활 2년차에 접어 든 양프로는 나름대로 경험도 생기고 친구들도 생기면서 조금씩 자신감을 회복하는 중이었지요. 그런데 거기서 또 사건이 터집니다.  방회장 일행이 다시 자카르타에 날아 왔고 그 며칠 전부터 예의 여전무가 양프로에게 만나자고 연락을 해온 것입니다. 양프로를 공금횡령으로 고소하겠다는 거였습니다.

 

협회가 돈 한 푼 받지 못한 양프로를 횡령으로 고소하겠다는 이유는 바로 신프로의 교환회원증 때문이었죠. 10만원짜리 라이센스를 한국측 회원들에게 85만원에 파는 노나는 장사는 그 해에도 계속되고 있었는데 지난 해 해당 라이선스를 만들었던 회원들이 기간연장을 할 때 작년 신청자 명단에도 없던 신프로도 연장신청을 낸 것입니다. 협회에서는 양프로가 작년에 신프로 라이선스를 몰래 해주면서 돈을 떼어 먹었다며 기염을 토하기 시작했지요.

 

하지만 사실은 이런 거였습니다. 현지 프로들이나 현지 협회의 교환 라이선스를 가진 한국 측 임원들들은 인도네시아에 산재한 수많은 골프장 대부분에서 그린피를 면제받거나 상당한 디스카운트를 받는 등 여러가지 혜택을 누렸습니다. 라운딩이 잦은 티칭프로들에게는 더더욱 필요한 아이템이었습니다. 그런데 작년 라이선스 발급 당시 신프로는 협회의 미움을 받아 블랙리스트에 오른 상태였습니다. 신프로의 교환회원증 신청은 당연히 한국 협회에서 묵살당했고 이것을 측은히 여긴 양프로가 지부 사무국장의 직권으로 현지 협회의 협조를 얻어 실비로 만들어 주었던 것이었는데 그걸 고마워해야 마당할 신프로가 이제 오히려 그것을 흔들면서 양프로를 공금횡령으로 몰아 붙이고 있는 것입니다. 참 줏대도 없죠. 그러나 신프로의 우직한 성격상 그를 그렇게 얍사하게 행동하도록 부추긴 배후의 인물이 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방회장 일행이 자카르타에 온다는 사실을 나와 양프로는 그보다 조금 더 일찍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며칠 전 현지 협회 사무국장 아구스씨의 연락을 받고 얍또 회장 자택을 두 번 째 방문했던 때였습니다. 현지 정치거물에게 개인적 호출은 받은 일은 그때가 처음이어서 무슨 얘기를 하려는 것인지 잔뜩 긴장했었죠. 모처럼 한가해 보였던 얍또 회장이 한국 협회와 양프로의 근황을 물어 왔을 때엔 좀 곤혹스러웠지요. 그 사이 한국 협회에서 계속 교류를 했다면 현재 완전히 금이 간 한국 협회와 양프로의 관계를 현지 협회에서 모를 리 없었고 얍또 회장이 그런 것도 사전에 보고받지 못한 채 나를 불러 들였을 리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상했던 대로 그는 이미 한국으로부터 방회장 일행의 방문일정을 통지 받은 상태였어요. 그런데 이번 해에 좀 더 많은 상금대회와 한국과의 보다 긴밀한 관계를 위해 현지 협회에 들어와 일을 돕지 않겠냐는 제의를 해왔을 때는 정말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런 거물의 면전에서 ‘NO’ 라고 대답하는 게 쉽지 않았지만 내가 양프로의 등을 칠 순 없었어요. 그날 얍또 회장이 그런 말을 하면서 정말 나를 쓰려고 했었는지 아니면 실제로는 다른 의도가 있어 나를 떠보는 것이었는지는 아직도 알 수 없습니다.

 

한국협회에서 양프로를 고소한다는데 어떻게 된 일이요?”

 

얍또 회장 저택을 나설 때 현관 앞에서 누르살람씨가 그렇게 물었습니다. 그 얘기는 그때 처음 듣는 것이었으므로 나는 황당한 표정으로 그럴 리 없다고 대답했었지요. 그리고 이틀 후부터 여전무가 양프로에게 빗발치듯 전화를 해오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다혈질인 양프로는 흥분하고 분을 삭히지 못해 어쩔 줄 몰라 했고 그가 여전무의 말을 받아 칠 때 한 번 붙어 보자는 결의를 이미 굳힌 것으로 보였습니다.

 

여전무님! 횡령이라니요? 횡령은 협회에서 회장님이랑 여전무님이 한 거 아닌가요? 라이선스 수익금으로 현지 협회에 상금 주고 다시 협회에서 정식으로 돈 빼갔다면서요? 그게 횡령 아닌가요? 그리고 나한테 가라 영수증 만들라고 한 게 여전무님이었죠? 그럼 여전무님도 고소 당하셔야 되겠네요! 내가 여전무님하고 통화한 거 다 녹음했다는 애기, 신프로한테 들으셨죠? 그럼 한 번 고소해 봐요!”

 

그렇게 소리지르며 전화를 끊는 양프로는 참담한 표정이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석사장에게서 전화가 옵니다.

 

이봐, 양프로. 얘기 들었는데 그게 어디 화내고 맞고소 한다고 될 일인가? 내가 마침 이 분들 만나고 있으니 페닌술라 호텔로 오게. 내가 도와줄 테니까. 그 컴퓨터하고 자료 다 들고 와. 방에 다 같이 둘러 앉아서 자료 보여주고 찬찬히 얘기하면 다 알아듣지 않겠나? 그리고 미용쟁이 그 자식은 빼고 당신만 혼자 와. 그 자식 오면 말 많아서 복잡해 지니까.”

 

양프로의 미간이 더욱 찡그려집니다. 그리고 이번엔 전에 영구 귀국했던 전 인니지부 경기위원장 이사장의 전화가 걸려 옵니다.

 

~ 양프로! 나 왔어. 보고 싶었지? 방회장님이 같이 가자고 해서 말이야. 바빠서 싫다고 해도 워낙 우기시는 거야. 양프로 요즘 협회랑 뭐 문제 있어? 분위기 좋지 않아 보이는데 여기 와서 술 한잔 하면서 풀자고. 얼른 넘어 와. 문제 있으면 내가 도와 줄게.”

 

양프로의 얼굴은 이미 술 한잔 걸치기라도 한 듯 새빨갛게 달아 오릅니다. 이 시나리오는 방회장 일행이 도착하기 전에 이미 예상했던 것이었지만 너무나도 예상대로 진행되는 상황이 오히려 어이없기도 하고 화가 치밀기도 해서 입니다. 석사장은 자카르타에서 방회장을 만난 것이 아니라 이미 한국에서부터 만나 인도네시아 지부장 자리를 꿰어 차고 함께 비행기 타고 날아 온 것임을 우리들은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엔 비밀이란 없고 아직도 한국 협회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속속들이 양프로에게 알려주는 사람들이 있었죠. 석사장은 양프로와 호형호제하던 시절 양프로가 찾아가 토로했던 속 얘기들과 고민들을 모두 들고 쪼르륵 한국 협회에 들어가 방회장과 딜을 한 것입니다.

 

양프로 이 자식 위험한 놈입니다. 전화통화 다 녹음해 놓고 그걸 무기로 협회에 반항하고  이거 이대로 두고 볼 건가요? 이렇게 된 이상 양프로 입막음은 내가 할 테니 그 대신 인도네시아 지부는 날 주세요. 신프로요? 걘 내 말이면 껌뻑 죽죠. 게다가 요즘 양프로랑은 다시 철천지원수가 되어 있는데 그래서 이번 라이선스 건 문제 삼도록 한 것도 시킨 대로 잘 했잖아요?  양프로 이놈이 그 동안 방회장님이나 여전무님 두고 뭐라고 했는지 알아요? 들으시면 열 받으실 텐데….  마침 일산 이사장님도 함께 갈 수 있다니 일단 자카르타 가서 양프로 불러 내서 컴퓨터 뺏든가 부수어 버리면 간단한 일입니다. 반항해 봐야 저 혼자니 다구리라도 치면 되고

 

어떻게 된 일인지는 불을 보듯 뻔한 것이었습니다.

신프로의 교환회원증을 두고 고소하느니 마느니 하는 것은 양프로를 열받게 해서 스스로 뛰어 나오게 하려는 미끼였고 실제로는 양프로가 녹음한 통화내용들과 경리관련 자료들을 정말 컴퓨터에 모두 보관하고 있는지 확인하려는 수작이었던 것이죠. 석사장은 스스로를 일산 조폭 출신이라고 소개하던 이사장을 끌어들여 완력을 강화한 후 양프로를 불러 내 박살내는 것을 방회장 일행 앞에서 보여 주고 싶었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신임 인도네시아 지부장의 위치를 공고히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는 한국에서의 딜을 통해 양프로가 공들여 만든 지부는 물론 현지 협회와의 제휴관계까지 이미 가로채 버린 상태였습니다. 몇 개월 전 누르살람과의 전지훈련사업에 끼워주지 않았던 원한을 그는 그렇게 복수하고 있었습니다.

 

그날 밤 페닌술라 호텔로 뛰쳐 나가려는 양프로를 만류하려고 무척 애를 먹었어요. 그 역시 혼자 호텔방에 도착해 그 사람들에게 둘러 쌓이면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전혀 짐작 못하는 것은 아니었겠죠. 그러나 그는 명색이 태권도 선수출신이었으니 어떻게든 자신을 방어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을 것이고 무엇보다도 송사장이 정말 그토록 비열하게 자기 뒤통수를 친 것인지, 협회가 정말 그토록 악랄하게 자신을 매장하려 드는 것인지를, 비록 속이 뒤집어질지언정 자기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을 겁니다.

 

그러나 양프로가 알고 싶어했던 진실은 호텔까지 찾아가지 않아도 곧 눈 앞에 펼쳐지고 말았습니다. 다음 날 저녁 송사장과 이사장이 카라와치의 임페리얼 호텔에 나타나 양프로를 불러낸 것입니다. 그들은 내가 없는 시간을 노렸지만 나는 양프로를 기다리도록 하고 최대속도로 카라와치까지 내달렸지요. 그래서 임페리얼 호텔의 로비 라운지에서 그들을 함께 만난 것이 오후 8시쯤이었습니다.

 

넌 니가 뭘 잘못했는지 알아?” 도와 주겠다던 석사장이 본색을 드러냅니다.

넌 책임도 못질 짓을 한 거야. 지부 만든다며 사람들 임원 맡기고 회비 내라고 하고서 지부는 이 지경이 돼버리고 임원들 병신 만들어 버린 거라구. 여기 이사장님도 니가 한 짓의 피해자 중 한 분이시지. 넌 이 분한테 무릎 꿇고 빌어야 돼, 이 자식아!. 그래서 보다 못해 내가 지부장 하기로 했다. 불만 있어? 그러니 컴퓨터 꺼내 놓고 지부 자료 다 넘겨. 그 잘난 녹음한 것도 다 넘겨. 너 협박하는 게 취미야? 테러리스트야? 너 미친 놈 아니야?”

 

옆에서 듣고 있는 일산 조폭 이사장님도 참 우직하신 분입니다. 석사장이 자기를 추켜 세우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를 방패 삼아 양프로를 얼르고 뺨치려는 수작인데 그는 석사장의 말에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있습니다.

 

자료 다 넘겨 주면 확인해 본 다음에 이상 없으면 내가 방회장님께 잘 말씀 드려서 고소 취하해줄 테니까. 그것도 다 옛정을 생각해서 그렇게까지 해주는 거야. 여기 이사장님만 안계셨어도 이렇게 말로만 끝내진 않았을 거다.”

 

양프로는 거의 헉헉거릴 정도로 분에 받혀 있었고 그래서 말 한 마디 대꾸도 제대로 못합니다. 이런다고 해서 여기 있습니다하고 순순히 컴퓨터를 내 줄 양프로가 아닌데 이렇게까지 그를 도발하는 석사장의 저의는 무엇일까요?

 

이 자식이…, 너 뭘 잘했다고 씩씩거려?”

이사장이 이 대목에서 으르렁거리며 치고 나서는 것은 어쩌면 사전에 약속된 각본인지도 모릅니다. 예전엔 그렇게나 가깝게 지냈던 이사장의 험상궂은 말투에 양프로 눈에 불똥이 튑니다. 그리고 그렁그렁 눈물로 함께 맺히더군요.

 

잠깐만요, 이사장님,”

이젠 내가 치고 나가야 하는 대목입니다. 그러나 말도 꺼내기 전 이사장에게 다짜고짜 멱살을 잡히고 맙니다.

뭐야, 이 새끼는?”

 

라운지는 순식간에 난장판이 됩니다. 네 명 모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면서 의자들을 그 기세에 요란한 소리를 내며 아무렇게나 구석에 처박히고 양프로는 내 멱살을 잡고 있는 이사장 손을 쳐 내며 금방이라도 돌려차기를 날릴 기세입니다. 라운지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우리를 돌아 보고요. 나는 급히 양프로 앞을 가로 막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나 역시 흥분하고 있었어요.

 

“석사장님, 이게 뭡니까? 싸우러 오셨어요? 양프로한테 지부 뺏어 가고도 뭐가 모자라서 이 난리를 죽이는 겁니까? 그냥 지부장 하세요! 그 잘 난 지부장 잘 하시라고요!!”

 

이사장의 주먹이 내 얼굴로 날아 들지만 양프로가 전광석화처럼 나서며 주먹을 쳐내고 급기야 몸싸움으로 치닫는 이 소란은 호텔 경비원들과 직원들이 뛰어 들면서 매우 모양 빠지게 마무리됩니다. 예전에 상금대회 치르느라 몇 번 신문에 났었는데 이번엔 액션활극의 주인공으로 신문에 날 뻔 했습니다. 그러나 자리를 뜨던 석사장은 여전히 양프로에게 눈을 부릅뜨고 위협하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너 그 녹음한 거 있다고 함부로 굴고 문제 만들면, 내가 그땐 정말 가만히 안둔다.”

 

그리고 나서 자카르타의 호텔로 돌아간 석사장 일행은 방회장에게 뭐라고 보고했을까요? 모든 일 이 다 잘 처리되었으니 염려 놓으시라고? 얘기가 잘 안 통하는데 나중에 다시 손 보겠다고?  정답은 아마도 전자였겠죠. 거의 다 꿰어 찬 인니 지부장 자리가 위태롭게시리 양프로 하나 제대로 처리 못했다고 방회장에게 곧이곧대로 보고할 송사장이 아닙니다.

 

다음날 양프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학생들을 데리고 연습장으로, 필드로 나가며 일상의 생활로 돌아갔지만 그에게 있어 세상은 그 전날까지와 같을 수 없었을 겁니다. 나 역시 며칠 동안 그 일을 생각하면 분해서 두 손이 부들부들 떨려 왔지요.

 

그것이 양프로가 맞은 결정타였습니다. 그것으로 인도네시아에서만 네 번 째  양프로는 내색하지 않으려 했지만 그때 그는 완전히 넉다운 되었던 것 같습니다. 다시 일어나려 애를 쓰지만 등에 칼을 맞은 깊은 상처는, 더욱이 그것이 믿었던 사람에게 당한 것이라면 좀처럼 낫지도 않고 통증은 더 심한 법이거든요.

 

그 후 시간이 더욱 흐르면서 양프로는 더 많은 다른 사건들에 또 휘말리게 되지만 당시 한동안은 안정을 찾는 듯 했습니다. 신임 인도네시아 지부장을 맞은 한국 협회와 인도네시아 프로골프협회와의 교류는 머지않아 어쩌면 당연하게도 결국 중단되어 버렸죠. 그 후에도 협회는 협회대로 돌아가고 협회 인니지부 라는 간판을 자랑스럽게 달아 놓은 석사장의 가게는 가게대로 번창하고 양프로는 연습장을 떠돌고 나는 다시 자카르타와 지방을 오가며 판매망을 구축하고 관리하는 본업으로 돌아가게 되었고요. 사족이지만 송사장 가게의 그 지부 간판이 얼마 후 홀연히 사라진 것으로 보아 그렇게 야합했던 송사장과 한국 협회와의 인연도 곧 다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그 당시 석사장이 한국 협회에서 자카르타로 날아 오기 전 양프로를 치기 위해 사람들을 모아 놓고 이렇게 얘기했을 장면을 떠올리면 지금도 소름이 오싹 돋습니다.

 

양프로를 잡고 싶죠? 내 말 잘 들어요. 이렇게 하자구요. ”

 

그보다 훨씬 전부터, 어쩌면 실현도 되지 않은 누르살람씨와의 합작이 결정되었던 그날부터 석사장은 날카롭게 갈고 또 갈아 새파랗게 날 선 비수를 들고 양프로의 등으로 살금살금 다가왔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는 이미 상처투성이인 양프로의 등을 향해 있는 힘껏 칼을 꽂은 것이죠.

 

그 후에도 양프로의 등에는 새로운 상처가 끊이지 않았지만 어쩌면 그날의 상처가 가장 깊이 새겨져 있을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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