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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으로 살아가기

기록

장윤원 후손 대사관저 오찬회동

beautician 2019. 9. 18. 10:00


장윤원 후손 대사관저 오찬회동

2019. 9. 15 () 12:00~14:00

 

 

1. 경과

- 11:35~11:45 사이 대사관 및 편찬위 참석자 전원 도착

- 장윤원 후손들은 장순일씨 자녀들 중 인드라씨 가족, 누이, 어머니(장순일씨 부인)과 부양인 알렉스 순으로 도착

- 홀에서 환담하며 채인숙 작가가 장윤원 선생 약력과 조사된 인생에 대해 설명.

- 12:20부터 오찬

- 14:00경 기념촬영 후 해산. 기념촬영 직전 대사관 측에서 장윤원 후손들에게 기념품 나누어 주었고 1940년대 말~1950년대 초 네덜란드를 유학하며 미술을 공부한 장윤원 며느리는 직접 그린 그림을 대사관에 선물함.

 

 

2. 참석자 명단

1) 장윤원 후손 (이하 인드라씨 측’)

- Mrs. Kho Siok Pwan – 장윤원씨 며느리, 장순일씨 처 (2)

- Mr. Agustinus Indraputra – 호칭 인드라. 장순일씨 아들 (3)

- Mrs. Emilianan – 인드라씨 처, 장순일씨 며느리(3)

- Mr. Radyan – 인드라씨 아들. (4)

- Mrs. Bonita – 장순일씨 딸 (3)

- Mr. Alex – 장순일씨 셋째 딸의 남편 현재 장윤원 며느리 부양인 (3)

 

2) 대사관측: 김창범 대사, 류완수 영사, 여직원 2(통역, 그간 아트마자야 대학 통해 장윤원 후손들과 연락했던 직원)

 

3) 편찬위측: 정선 한인포스트 대표, 채인숙 작가, 배동선 작가

 

 

3. 회합 성격

굳이 공표하진 않았으나 내년 한인사 100년을 맞아 장윤원 후손들에게 한인사 편찬의 의의를 설명하고 한인 100년사 편찬위원들과 장윤원 후손들의 상견례와 자료 수집 협조를 주선하는 성격이 강함.

 

4. 환담 주요 내용

- 대사님은 아트마자야에서 3월에 인드라씨와 어머니(장윤원 어머니) 만난 후 두 번째 만남.


- 인드라씨측은 답사 형식으로 자신들 뿌리를 찾으려는 한인사회 노력 감사하며 그러나 자신들은 알고 있는 바가 적다고 함


- 대사님은 장윤원씨가 한인사회의 중요인물로서 사실상 한인 100년사의 시발점임을 강조함. 장윤원 선생이나 장순일씨가 남긴 사진, 메모, 자료 등은 한인 100년사를 쓰기 위한 중요한 사료가 될 것이므로 협조요청.


- 장윤원씨나 장순일씨가 네덜란드 총독부 근무시절이나 일제강점기 이야기 거의 하지 않아 후손들이 선대의 일들을 잘 모르고 있음.


- 류완수 영사는 921일 장윤원 선생 묘소가 있는 Tanah Kusir 공동묘지를 포함해 그 발자취를 따라가는 문화탐방이 있음을 설명했고 현재 폴초관(Gedung Paul Cho)로 되어 있는 아트마자야 대학교의 해당 건물에 한국어 이름을 병기하는 방안에 대해 인드라씨 측은 그건 아트마자야 대학교 역사의 한 부분이라며 곤란한 듯한 입장 시사.


- 정선 한인포스트 대표는 대체로 인드라씨 측에 장윤원 선생 일대기와 의의에 대해 설명하며 내년도 대통령 훈포상을 거론.


- 이와 관련해 장윤원 선생의 네덜란드 총독부 근무기록, 일본군에 의한 투옥, 수감기록 등을 일본이나 네덜란드 국가기록원에서 찾아보는 문제에 대해 대사님은 편찬위가 네덜란드 한인회에 협조 구해볼 것을 제안함.


- 채인숙 작사는 장윤원 선생이 일제강점기 초창기에 잘나가던 집안 사람으로서 부귀영화를 버리고 독립운동을 돕다가 바타비아까지 오게 된 자랑스러운 인물인 만큼 사료 수배에 후손들이 적극적으로 협조해 줄 것을 부탁함.


- 배동선 작가는 장윤원씨 한 명이 100년 전에 도착한 인도네시아에 이제 25,000~30,000명의 한국인들이 살게 된 점에서 현재 교민들도 문화적, 기술적으로는 장윤원씨 후예라 할 수 있는 만큼 장윤원 가족사가 한인사 만큼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하며 대체로 네덜란드 측에 있었고 화교사회에 속했던 장윤원 후손들이 1949년 네덜란드로부터의 주권이양 후, 1965년 공산당 쿠데타 이후 인도네시아 대학살 당시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물음 이에 대해 장윤원 며느리는 1949년 당시 아직 네덜란드 유학 중이어서 관련 경험이 없고 1965년 당시에는 마치 1998년 자카르타 폭동 당시 한국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저 조신하게 처신했다고만 답함.


- 대사님은 한인 100년사 첫 부분을 어떻게 시작해야 하느냐 방향을 정함에 있어 이날 회동을 통해 결과적으로 한인사 편찬위에 도움을 주어 감사하다는 말로 오찬을 마침.

 

 

5. 새롭게 알게 된 내용

 

1) 장윤원 선생 처 황항아씨 유언에 따라 가족 전원 카톨릭에 입교함.

2) <적도에 뿌리내린 한국인의 혼>에 아트마자야 대학교 설립자로 기재된 장순일, 프란스 세다 두 명은 올바르나 마지막 한 사람이 빵 라이 킴이라고 적힌 것은 잘못된 정보이며 실제 공동설립자 이름은 딴 디엔 셍(Tan Dien Seng)보니타씨 발언 --> 이것은 보니타씨가 잘 모르고 한 발언으로 밝혀짐. 실제 따 디엔 셍이 설립자에 포함되었는지는 확인 필요한 부분이나 빵 라이 킴은 아트마마자 대학교 홈페이지에 분명히 설립자 중 한 명이라고 명기되어 있음 (김문환 선생님 재확인)

3) 장윤원씨 장남 장남해씨는 5명의 자녀를 두었지만 모터사이클 레이서였던 아들만 남기고 현재 모두 세상을 떠난 상태. 그 레이서 아들은 배드민턴 선수출신 처를 둠.

4) 장윤원씨가 바타비아에서 산 첫 집 주소는 jl. Gondangdia Kecil, No. 12 . --> 이것도 김문환 선생님이 이미 알고 있던 자료로 확인됨

 

 

 

6. 사진

 

왼쪽부터 류완수 영사, 에밀리아, 라디안, 인드라, 김창범 대사

 


코 시옥 판 여사가 직접 그린 그림 전달


그림 뒷면 장순일씨와 함께 찍은 부부 사진

 


단체사진


코 시옥 판 여사와 한인사 편찬위 위원들

 

 

(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