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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감을 지킨다는 것

beautician 2019. 9. 4. 11:00


마감을 지킨다는 것





8월 한 달은 바쁘다는 게 뭔지 새삼 깨닫는 시간이었습니다. 


생업을 위한 이런저런 일들이 많았지만 퇴근과 동시에 작가모드 스위치를 올리면 처리하고 팔로업해야 하는 일이 산더미같았습니다. 우선 사람들 앞에 서서 행사를 치러야 하는 일이 두 개 있었으므로 부득이 월차를 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8월 10일(토)의 <막스하벨라르> 출판기념회와 8월 16일(금)의 인도네시아 국립대학에서 있었던 히스토리카 양칠성 세미나 발제는 모두 사전에 뭔가 잔뜩 준비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공동번역자로서 사회까지 봐야했던 출판기념회는 한국외대동문회의 전폭적 지원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허겁지겁한 느낌이었고 발제 당일 오전 10시에야 발표원고 번역을 모두 끝낼 수 있었던 세미나는 원고량 조절에 실패해 임기응변으로 발표와 질의응답을 간신히 마쳤습니다. 큰 실수를 하지 않았다는 점에 의의를 둡니다.


2~3개월 사전작업을 했던 한인 100년 편찬위원회 정식출범식, 위촉장 전달식, 주간 회의들도 있었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뜻과 시간을 모아 진행해야 하는 일을 조직하고 조율하는 게 얼마나 손이 많이 가는 일인지 새삼 느꼈습니다. 판을 흔들 것이 분명한 사람, 다른 이들과는 다른 특별대우를 원하는 사람까지 모두 보듬고 가야 하는 일에 참여하는 건 사뭇 껄끄러운 일이지만 능력있고 친화력 뛰어난 이들이 역시 대거 각 부문 위원장 쯤의 직책을 맡아 상임위원으로 포진하고 있어 나름 든든한 것도 사실입니다. 단지 적잖은 시간을 할애해야하는데 다른 일정들과 심각하게 부딪힌다는 게 문제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고민을 줄여주는 것은 충분한 보상, 즉 페이가 되겠지만 그게 어떻게 될지는 뚜껑을 열어봐야 알 듯 합니다. 그렇습니다. 평탄하기만 하다면 그게 내 인생일 리 없습니다. 


밀린 일들 중 가장 마음을 짓누르던 것은 충청도 음성의 순박한 만화가 이태수 작가와 협업하는 인도네시아 호러만화입니다. 

얼떨결에 넘겨받은 그라메디아와의 교신이나 만화 컷의 말풍선을 번역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나 100개 가까이 만화용 에피소드를 인니인 10세 아동 눈높이에 맞춰 만드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만화 여섯 페이지 안에 반전있는 스토리와 메시지를 담아내는 것은 장편소설작가를 지향하는 사람에겐 육식동물에게 민들레 뜯어 먹으라는 것만큼 어려운 것이니까요.


아시아투데이에 기사를 보내는 것과 영화진흥위원회에 인도네시아 영화산업 조사보고서를 내는 것은 시장조사와 보고서 작성에 특화된 나에겐 딱 맞는 일이면서도 현지 기사와 자료를 지속적으로 검색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적잖은 시간을 잡아먹습니다. 


이런 일들을 8월 한 달동안 했습니다. 

대부분 근근히 시간을 맞췄지만 영진위 리포트는 행사와 미팅에 밀려 마감시간보다 하루 더 지나 제출하게.되었습니다. 지난 3년 간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마감일이 그토록 무겁게 다가오고 마감보다 하루, 실제로 14시간 정도 늦었다는 것이 스스로 그토록 충격적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글 쓰는 사람들에게 마감이라는 것은 하나의 로망이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천근만근 짓눌러오는 지옥이기도 합니다. 마감일 있는 글을 쓴다는 것이 프로 문필가의 자격증 같은 것이기도 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니 프로인 만큼 마감일을 넘기면 프로답게 계약 위반에 따른 응분의 불이익을 감수해야만 하는 것이죠. 그래서 절대 마감시간에 대지 못하는 경우 없도록 최선을 다했음에도 8월엔 결과적으로 실수하고 만 것입니다. 사실 막판에 몸살로 며칠 고생한 탓이기도 하지만 그런 걸 이유로 대며 양해를 구하려 하는 건 프로의 자세가 아닙니다. 프로선수들이 타율과 승율, 골로 말하듯 글 쓰는 프로들도 글의 퀄리티는 물론 마감일을 맞추는 것으로 자신의 의미를 증명합니다. 


마감에 시달리는 작가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한번이라도 마감에 시달려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 있었습니다. 

그게 얼마나 순진한 생각이었음을 깨닫습니다. 


이제 앞으로 더욱 마감에 시달리게 되겠죠. 

물론 그게 행복하지 않다는 말은 아닙니다.

글이 팔리는 작가가 되면 일은 더욱 바빠질 것이고 맞춰야 할 마감은 더욱 많아지고 더욱 임박해지는 법입니다. 


그러니 마감을 지킨다는 것은 약속을 지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는 것이죠.



2019. 9.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