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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칼럼

묘지의 벌판, 카사블랑카

beautician 2018. 5. 1. 12:22

묘지의 벌판, 카사블랑카

 


영화 카사블랑카

 

카사블랑카는 원래 북부 아프리카 모로코의 항구도시 이름입니다. 1942년작 영화 <카사블랑카>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아프리카에서 벌어지던 전쟁을 피해 필사적으로 미국으로 가려던 사람들의 경유지였던 카사블랑카를, 위험하면서도 우수에 가득 찬 낭만적인 곳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 함락되자 프랑스 식민지였던 모로코도 나치의 괴뢰정권인 프랑스 비시 정부의 영향력 아래 놓였으니 탈출자에게 호의적일 리 없었죠. 그 일촉즉발의 팽팽한 긴장 속에서 주인공 험프리 보카드와 잉그릿 버그만의 애절한 사랑이 전개됩니다.

 

자카르타에서 처음 카사블랑카 거리를 만났을 때 떠오른 것도 당연히 그 영화였습니다. 거리와 건물들이 아직도 식민지 시대의 잔재를 적잖이 보듬고 있던 인도네시아였으니 어쩌면 네덜란드 총독부가 붙인 거리 이름이 오늘날까지 살아 남은 거라 생각한 건 자연스러운 사고의 매커니즘입니다. 하지만 네덜란드가 왜 프랑스 식민지였던 도시이름을 자카르타 한복판에 붙여 놓았을까 한참동안 궁리하다가 마침내 나름대로 생각의 매듭을 지었습니다. 그렇게 갖다 써 붙인 사람 마음을 내가 어찌 알겠냐고 말입니다.

 

그런데 뿌리 카사블랑카 아파트 고층에서 내려다보면 대규모 묘지들이 그 지역 일대를 뒤덮고 있는 모습이 한 눈에 들어옵니다. 국가기념탑 모나스 인근 국립박물관 뒤편 네덜란드 묘지공원 따만 쁘라사스티(Taman Prasasti)만큼 호젓하진 않지만 정비가 잘 된 멘뗑뿔로 네덜란드 묘역엔 인도네시아 독립전쟁 거의 전 기간에 걸쳐 네덜란드 동인도군 총사령관이었던 시몬 헨드릭 스폴 장군을 비롯해 현지에서 전사한 네덜란드군 장사병들이 묻혀 있습니다. 예의 영화에서처럼 미국에 가지 못한 사람들 상당수가 카사블랑카에 주저 앉았던 것을 기억한 당시 네덜란드인들이 결국 고향에 묻히지 못한 동포들을 위해 그런 거리 이름을 붙인 것인지도 모릅니다.

 

멘뗑뿔로 묘지와 시몬 헨드릭 스폴 장군

 

그곳은 예나 지금이나 동부나 북부 자카르타에서 시내 중심가로 들어가는 중요한 진입로 중 하나입니다. 최근 코따 카사블랑카 몰이 세워지면서 출퇴근 시간이면 더욱 인산인해를 이루는 차량들로 매일 몸살을 치르는 그곳은, 거기서 시작해 라수나 사이드 거리와 수디르만 거리를 횡단하는 긴 고가도로가 건설되기 전에도 파크레인 호텔 앞 인도에 가판을 벌이고 있던 바소(Bakso)집이 고질적인 교통체증에 일조하고 있었습니다. 주먹만한 대형 미트볼 한 개와 작은 바소 세 개를, 실타래같이 가는 국수 비훈과 야채, 볶은 마늘과 함께 구수한 고기국물에 푸짐하게 담아 1만 루피아도 안되는 파격적인 가격에 팔던 그곳엔 늘 오토바이 수십 대가 인도 대부분과 차도 일부를 점유하고서 퇴근길 정체를 부추겼으니까요. 나도 그곳 바깥 차선에 차를 반쯤 걸쳐 대놓고 퇴근 길의 바소 한 망꼭(Mangkok)을 즐기던 사람들 중 하나였습니다. 플라스틱을 씹는 듯한 맛도 났지만 그곳은 값싼 길거리 음식으로 저녁식사를 때우려는 사람들로 매일 저녁 성황을 이루었죠.

 

공짜 손님들에게 수십 그릇씩 내줘야 하지만 그래도 장사가 잘되니 감사하게 생각해요.”

 

인도 안쪽의 건물 경비원들은 물론 인근 파출소 경찰관들이 끼니때가 되면 당연하다는 듯 돈도 안내고 양손 가득 바소를 싸들고 가는 모습을 매번 보았는데 손수레 같은 그로박(grobak)으로 좁은 인도에 좌판을 벌린 채 어차피 도로교통법을 위반하고 있던 바소집 젊은 주인부부는 어쩔 수 없다며 혀를 찼습니다. 하지만 단속이 강화되고 고가도로와 건물들이 더 많이 들어서면서 그 길거리 명소도 오래 전 문을 닫고 말았습니다. 도시의 발전이 모든 사람들에게 꼭 행복을 가져오는 것만은 아닙니다.

 

그런 말 하지 마세요. 그렇지 않아도 비오는 날이면 으스스해요.”

 

해가 져야 문을 열던 그 집에서, 혹시 밤에 무섭지 않냐고 묻자 그런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카사블랑카 도로 좌우엔 끝이 보이지 않는 대형 묘지들이 펼쳐져 있었는데 그게 꼭 네덜란드 묘역처럼 잘 정비되어 있는 것만은 아니었으니까요. 실제로 카사블랑카 지역과 현재 롯데쇼핑애비뉴가 서 있는 사트리오 거리(Jl. Dr. Satrio)까지 아우르는 까렛(Karet) 지역 전체가 옛날엔 거대한 공동묘지였다고 하며, 결국 어쩔 수 없는 일이었겠지만 그 일대가 개발되면서 지금의 아파트와 건물들 대부분이 그 묘지들을 갈아엎고서 그 위에 세워진 것들입니다. 인근 목적지에 가려면 끝도 없이 이어질 것 같은 묘역 사이 샛길을 지나는 것이 빠른 그곳엔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면 지금도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모락모락 피어 오르니 꾼띨아낙이나 순델볼롱, 뽀쭁 같은 귀신 이야기가 넘쳐나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입니다. 실제로 카사블랑카 거리와 사트리오 거리를 연결하는 길지 않은 지하도로는 요즘도 비만 오면 쉽게 물에 잠기곤 하는데 빨간 옷을 입은 여자귀신이 출몰한다는 도시전설로도 유명합니다. 이상하게도 사고가 자주 일어나는 이 지하도로를 밤늦게 지나는 운전자들 사이에는, 그래서 진입 전 클락슨은 세 차례 눌러 그 안 어스름 속에 깃든 망령들의 양해를 미리 구하라는 이야기도 돌고 있습니다.

 

 

뜬금없게도 카사블랑카의 이름이 KAmpung melayu SAmpai BeLAkaNG KAret’, 까렛 뒷동네까지 이어지는 깜뿡 멀라유 지역이라는 말의 축약이라고도 합니다. 뭐든 갖다 붙여 말 만들기 좋아하는 호사가들의 입에서 나온 것이겠지만 기왕이면 술라웨시 떵가라의 주도 끈다리(Kendari)처럼 Karena Anda Ada, Aku Datang Kemari’(그대 있기에 나 여기 왔노라)라는 시적 문구를 줄인 것이라는 정도의 재치가 아쉬운 부분이죠.

 

그래서 난, 클락슨 세 번 울리고 들어선 지하도를 지나면 황량한 묘지의 자욱한 안개 속에서 예의 젊은 부부가 바소 그로박을 끌고 나타나, 붕붕 떠다니는, 잉그릿 버그만 닮은 예쁜 빨간 옷 꾼띨아낙들과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 네덜란드군 망령들에게 커다란 미트볼 스프를 팔고 있는 카사블랑카 벌판에 들어서는 장면을 떠올리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