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서와 소설 사이, 그 어디쯤

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매일의 삶

D여고 황선생님 앞

beautician 2016. 8. 25. 01:01

황선생님,

 

안녕하세요?

자카르타의 뷰티션이에요.

마지막 연락하고 2년쯤 되었으니 이젠 교감 쯤 되셨나요?

제 ROTC 동기 중에도 별을 달고 장군이 된 친구도 있는데 이제 우리 나이도 만만찮게 되었네요.

 

2014년부터 시도해 보았던 베트남 원정은 결국 실패로 끝났어요.

김사장이랑 잘 해보고 싶었지만 서로 못보는 사이 서로간의 거리가 워낙 멀어져 있었던 모양입니다.

2015년 6월 더 이상 방법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다시 자카르타로 돌아왔어요.

1년 3개월 가량 베트남에 시간을 투자했어요.

실패의 원인이 여러가지 있겠지만 가장 결정적인 문제는 언어였던 것 같아요.

어느 나라에 가도 언어가 통하지 않아 뭔가 하지 못했던 적이 없었는데 1년 3개월을 파고 들어도 베트남어는 간단한 회화조차 안되더군요.

나는 문법에 맞춰 발음과 성조까지 나름 최선을 다하는데 저 놈들이 못알아 듣는 거에요.

뭐, 언어신동인 줄 알았던 자신에게 크게 실망하고 깨끗히 접고 돌아왔어요.

큰 돈을 들고 간 것도 아닌데 언어까지 통하지 않으면 사업을 하긴 커녕 버티기도 힘들거든요.

 

자카르타 돌아와서 일보다는 좀 이상한 작업을 쭉 했습니다.

인도네시아 무속과 귀신에 대해 연구해서 인터넷 교민사이트에 A4 300 페이지 정도를 연재했고

인도네시아 독립전쟁과 현대사를 연구해서 A4 4백 페이지 정도 만들어 출판 준비까지 마쳤어요. 

물론 찍어주겠다는 출판사는 아직 만나지 못했어요.

그게 딱 1년 걸렸네요. 베트남에서 돌아오고서부터.

 

애당초 베트남에 갔던 게 자카르타 쪽 일이 잘 풀리지 않아서였기 때문이었죠.

돌아왔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어 있진 않더군요.

그 이후 지금까지 인도네시아 경제전반은 썩 좋지 않고 특히 외국인에 대한 비자법이나 세금문제, 사업환경 같은 것이 점점 열악해져서 떠나는 사람들이 많아 교민사회 규모가 많이 줄어들고 남은 사람들도 많이들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모양이네요.

나 역시 뾰족한 수가 없으니 그걸 버텨 내는데 저런 이상한 글들을 써서 스트레스를 풀었어요.

내가 봐도 참 골때리는 스트레스 해소법이라 생각해요. 근데 진짜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이 돼요.

게다가 스트레스의 결과물도 꽤 건설적이고요.

 

언제쯤 황언니한테 나도 좋은 소식 전할까 싶었어요.

2-3년에 한번 이메일 보낼 때마다 하소연이니 말이죠.

내가 황언니한테 하소연 하는 건 솔직히 황언니한테도 책임 있다는 거 아셔야 돼요.

그 하소연 다 받아주고 다독거려주니 말이죠.

그러니 난 옛 제자들 포함 황언니한테 하소연하러 찾아오는 수백명 중 하나 아닐까 싶네요.

 

그런데 소 뒷걸음 치다가 쥐잡는 사건도 벌어졌어요.

재외동포재단이라는 곳이 있는데 연말이면 각 신문사에서 신춘문예 하는 것처럼 이 재단도 재외국민들을 대상으로 재외동포문학상이라는 걸 매년 열어요.

얼마 전까지는 수상자들을 한국으로 초청해 한국에서 수상 행사를 했던 모양인데 그게 벌써 올해로 18회째를 맞았데요.

지난 5월에 마감이었고 7월에 입선자 발표한다 하던데 8월 초가 되어야 이메일이 하나 날아 왔어요.

 

재외동포문학상 심사결과를 알려드립니다.

 

이메일 제목이 이랬어요. 보통 이런 제목이면 내용은 보나마나죠. 응모해 준 건 고마운데 이번엔 물먹었으니 다음 기회에 다시 한번 블라 블라 블라.

확 지워 버리려다가 그래도 한번 열어봤더니 첫 줄에 이렇게 씌어 있었어요.

 

재외동포문학상 소설부문 대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제일 먼저 한 일은 그 이메일 아래 어딘가에 '그러니 아래 구좌로 몇십만원을 입금하시면 본인확인을 통해 어쩌고 저쩌고' 하는 문구가 있는지 찾아 본 거에요. 

이게 말이 돼요?

스팸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잖아요.

근데 암만 봐도 정말 재외동포재단에서 온 이메일 같았어요. 그리고 지난 5월 마감 전에 소설 하나를 써서 보낸 것도 사실이거든요.

 

그러다가 지난 주에 재단 홈페이지 www.korean.net 에 보도자료가 떴어요.

왜 그런지 그 페이지 링크가 잘 안되니 여기 자카르타 교민신문에서 받아 쓴 것을 첨부할게요.

 

http://www.pagi.co.id/bbs/board.php?bo_table=korean_news&wr_id=2048

 

싱가폴에 비자 내러 갔다 지난 주말에 돌아오니 교민신문들, 한인회, 대사관에서 전화가 빗발쳤어요.

29개국에서 응모했던 모양인데 인도네시아에서 소설뿐 아니라 수필, 시, 다 포함해서 좌우간 대상을 받은 역사가 없었는데 이번이 처음이라고 난리들이 났어요.

물론 전체 교민들 중 95%는 황언니처럼 이런 게 있었는지도 아직 전혀 모르고 있고요^^

 

암튼 이런 사고를 쳤으니 이제부턴 배작가라고 불러줘요.

이런 소식 으스대면서 전할 친구가 있어서 참 좋네요.

 

 

하지만 배작가가 되도 장사가 바닥을 기는 점조직 독립군 사업가라는 건 여전히 변치 않는 사실이라서 임박한 결재비용 만들려고 내일부터는 다시 어딘가 돈을 빌리든 누구 등을 치러 나가야 돼요. 참 인생 팍팍해요.

 

내 근황은 대충 이래요.

우리 황선생님도 건강하게 지내고 계시길 바래요.

시간 되시면 어떻게 지내시는지 근황 알려주세요.

 

올해 10월이나 11월 사이 그야말로 5년만에 한국 갈 일이 있을 것 같아요.

그때 동명여고에 꽃다발 들고 찾아 갈게요.

 

 

2016. 8.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