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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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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언론진흥재단 원고납품 계약 종료

beautician 2023. 6. 17. 03:31

한국언론진흥재단 계약종료

 

 

한국언론진흥재단이 발행하는 월간지 ‘신문과방송’에 처음 글을 보낸 게 2021년 5월호용이었느니 2년 조금 더 전의 일이었다.

 

이번 주에 계약을 만료한다는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걸어온 사람은 그렇게 대놓고 말하진 않았지만 그 친절한 목소리와 말투는 그런 내용을 담고 있었다.

 

지난 2년간, 내 생계 포트폴리오의 한 부분을 맡고 있던 부분이 사라지는 것이라 쌍수 들고 환영할 일은 절대 아니었지만 내가 그간 매우 부담스럽게 느끼던 일이었던 만큼 그렇게 아쉽거나 섭섭하진 않았다. 그간 그 원고를 쓸 때 그토록 부담이 컸던 이유는 관련 자료를 구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글쓰기였기 때문이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을 위해 내가 쓴 글들은 인도네시아 언론동향에 대한 이야기를 수치나 데이터 또는 사례를 들어 A4 6장 정도의 원고를 두 달에 한 번 써서 보내는 것이었다. 이미 오래 전부터 하고 있던 영화진흥위원회와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보고서들은 인도네시아에서 해당 산업동향을 조사하여 보고서를 쓰는 일이었으므로 다소 난이도와 물량의 차이는 있지만 신문과 문헌들을 뒤지면 원고를 쓰기 위한 자료를 구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고 그나마 안되면 업계 관련인사들을 인터뷰하거나 설문조사를 할 수 있었다. 자료가 갖춰지면 원고를 쓰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다. 글 쓰는 건 작가의 기본이니까.

 

하지만 인도네시아 언론동향과 추이에 대한 자료는 특별한 경우 아니면 필요할 때마다 매번 나와 있는 게 아니니 대개는 수많은 기사들과 문헌들을 통해 스스로 분석해서 자료부터 생산해야 하는 일이다. 그건 가성비를 악화시키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 원고를 쓸 수 있느냐 없느냐를 좌우했다. 인도네시아는 미국이나 서구처럼 다른 사람들이나 관련 기관들이 만들어 놓은 그런 분석자료나 논문들을 얼마든지 쉽게 구할 수 있는 나라도 아니고 설령 있다 한들 그 신빙성에 대한 검증조차 쉽지 않다.

 

그래서 그냥 수필이라면 한 시간 정도 걸릴 A4 여섯 장짜리 원고를 매번 2-3주씩 고민해야 했는데 이제 더 이상 그런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되게 된 것이다. 물론 그만큼 수입은 줄어들게 된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계약종료가 별로 스트레스를 주지 않은 이유는 전화를 걸어온 사람 때문이기도 했다.

2년 전 처음 한국언론진흥재단과 일을 시작할 때부터 나를 담당해 주던 여성 과장이 전화해 주었다. 잘 아는 사이라 할 수는 없지만 늘 일과 관련해 연락해 왔고 서로 지켜야 할 예의의 선을 넘거나 중대한 실수를 한 적도 없었다. 한 두 차례 접촉에서 제대로 처신하는 것은 어려운 일 아니지만 2년 내내 일관된 모습을 보이는 건 사실 범상치 않은 일이다. 그게 아무리 단순한 업무라 하더라도 업무처리와 이메일 문구에는 그 사람의 인성이 묻어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이 전화를 해 설명을 하고 양해를 구한 건 불쾌하지 않은 경험이었다. 2년간 내 시각이 담긴 원고를 받았으니 이젠 다른 사람의 견해를 들어볼 필요가 있다는 내부회의결과가 있었다는 설명도 충분히 납득할 수 있었다. 오히려 내 후임이 나와 같은 고민과 수고를 하게 될 것이 조금 미안하게 생각되기도 했다.

 

누가 어떻게 얘기하느냐가 중요한 것 같다.

그리고 그런 말을 내게 하는 게 그 여과장에게 있어서 즐거운 일이었을 리 없다. 해야 할 일이니 전화한 것이고 성공적으로 상대방 기분 상하지 않는 선에서 원하는 결과를 얻어낸 것이다. 이메일로 한 줄 써서 통보할 일이 아니어서 굳이 전화를 했다고 했다. 2년 간 소통하면서 처음 목소리를 들은 날이다.

 

내가 충분히 납득했으니 그녀는 수완도 있는 셈이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 사실 많지 않다고 생각한다.

 

예전에 한국에서 다른 일을 할 때 거래 상대방이 구매계약을 중단한다며 자기 회사로 들어오라 했던 기억이 있다. 그게 어떤 건이었는지 이젠 잘 기억도 나지 않지만 토막토막은 분명히 기억난다. 그쪽에서도 똑같은 얘기를 했다. 전화나 문자로 할 만한 얘기는 아니니 만나서 얘기하는 게 좋겠다고.

 

그쪽에선 나한테 예의가 아니라며 얼굴 보고 얘기하자고 말했지만 10분 미팅을 하면서 이미 무슨 얘기일지 대략 짐작하고 있는 내용을 듣기 위해 막히는 길을 뚫고 두 시간 걸려 찾아가야만 했다. 그렇게 찾아간 자리에서 그쪽에서는 계약을 끝내는 마당에 자기들에겐 계약종료의 귀책사유가 없다는 얘기만 끝없이 되풀이했었다. 내 책임이란 뜻이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는데 말이다.

 

그들은 수완도 없었고 난 기분만 잡쳤다. 갑질하는 상대를 만나면 대개 그렇게 된다. 또는 내가 매달리는 입장에 있거나.

 

아무튼 그랬다.

하지만 이번 한국언론진흥재단과는 비록 갑자기 받은 통보지만, 누구도 감정 다치지 않고 원만히 계약을 종료한 것이 다행스럽다.

 

2021년 초, 당시 한국일보 특파원이었던 고찬유 기자가 자기에게 온 일을 나한테 토스해 주었던 것이다. 어쩌면 처음부터 나한테 맞지 않는 옷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걸 만 2년 해온 나 스스로가 조금은 대견스럽다. 그 A4 여섯 장을 쓰려고 며칠 밤을 세웠는지 모른다. 그 기록이 신문과방송 홈페이지에 고스란히 PDF 파일로 남았으니 나름 보람도 있고 좋은 추억이 되었다.

 

늘 느끼는 건, 처음엔 누구나 다 큰 포부와 기대를 가지고 시작하지만 모든 건 반드시 끝이 있고 그 끝을 어떻게 맺느냐가, 어떻게 시작하는냐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계약 하나 끝내면서 감상이 좀 거했다.

 

2023. 6.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