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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스크랩] 우위영 음반출시

beautician 2019. 1. 13. 10:30

[원희복의 인물탐구]첫 독집음반 낸 민중가수 우위영 “민중가요를 대중적으로 재해석했다”

글 원희복 선임기자 wonhb@kyunghyang.com·사진 우철훈 선임기자 photowoo@kyunghyang.com
가수 우위영

가수 우위영

그는 가수다. 초등학교 때부터 독창·합창대회를 휩쓸고, 대학 시절에는 가요제 대상을 받았다. 1990년대 LP판으로 나온 그의 음반은 무려 20만장이 나갔을 정도다. 그런 그가 지난해 12월 14일 처음으로 독집 음반 <아무도 슬프지 않도록>을 냈다. 그러나 그의 음반 발매 소식을 전하는 음악매체는 한 곳도 없었다. 30년 만에 나온 첫 독집 음반이지만 그의 노래는 한 번도 공중파를 타지 못하고 있다.

80~90년대 민중가요 등 14곡 담아

그는 가수 우위영(53)이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민중가수다. 김민기·양희은이 70년대 민중가수라면 안치환·우위영은 80·90년대 민중가수다. 그가 이번에 첫 독집 음반을 냈다. 타이틀곡은 정호승 시인의 시 ‘아무도 슬프지 않도록’에 백창우가 곡을 붙였다. 또 ‘고목’(김남주 시/박태승 곡), ‘노동자의 길’(안치환 글/곡), ‘파랑새’(박종화 시/곡) ‘백두산’(윤민석 글/곡), ‘동지를 위하여’(문대현 글/곡) 등 80·90년대 민중가요와 그가 직접 만든 노래 14곡이 담겨 있다.

-타이틀곡으로 정호승 시인의 ‘아무도 슬프지 않도록’을 실은 이유가 있나.

“정호승 시인의 가사말이 나에게 위로가 됐다. 그냥 가사 느낌이 너무 좋다. 어쩌면 나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 아니 소외받는 우리 시대 모두에게 위로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이번에 겁 없이 독집 음반을 만들었다. 그동안 음악을 안해 음악성과 실력이 부족하다. 그래도 음반을 낸 것은 ‘앞으로 나는 음악을 할 거다’, ‘이런 노래를 할 거다’라는 선포이자, 선언이다.”

-이번 음반은 민중가요를 현대적 서정과 대중적 감성으로 재해석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는 과거의 투쟁적이고 비감한 민중가요 분위기에서 가벼운 위로 혹은 성숙을 의미하나.

“디렉터 정은주씨가 민중음악을 현대적·대중적으로 해석하는 시도를 했다. 사실 나는 정 감독에게 내 의견을 얘기한 적이 없다. ‘백두산’ ‘파랑새’에서 아이리시 휘슬이라는 악기를 사용했는데 느낌이 굉장히 좋다. 30년 전 윤민석의 ‘백두산’은 결단을 내리고 목숨 걸고 가는 느낌이라면, 이번 노래는 그냥 문재인 대통령이 오르던 것처럼 가볍게 소풍 가듯이 오르는 백두산이다.”

-감옥에서 만든 노래가 ‘은행나무’ ‘별들아’ ‘오랜 가뭄 끝에 비’ 세 곡이다. 어떤 내용인가.

“직접 만든 곡을 이번에 처음 발표했다. ‘은행나무’는 감옥에 있을 때 동생이 보내준 자작시에 곡을 붙였다. 박근혜 정권 하에서 절망을 스스로 위로하는 내용이다. ‘별들아’는 감옥생활의 절망과 외로운 시간을 그대로 표현했다. ‘오랜 가뭄 끝에 비’는 그 감옥을 이겨내는 노래다.”

-출시한 지 보름이 지났는데 반응은 어떤가. 음반이 많이 팔렸나.

“반응이 별로 안 잡힌다. (웃음) 일단 홍보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 거의 수작업으로 만들고 나 혼자 홍보하는데, 고전하고 있다. 음반을 만들 때는 제작비는 회수해야지 하는 생각도 있었지만 일찌감치 포기했다. (웃음) 그것은 불가능하더라.”

그의 노래는 공중파가 아닌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알음알음 소개로 유통되고 있다. 그래도 요즘 SNS의 위력이 크다 하지 않는가. 특히 그의 공연실황은 유튜브에 적지 않게 올라 있다. 그는 페이스북에서 “20대, 30대들은 재빠르게 음원사이트를 통해 사서 들었다고 하는데 40대, 50대에선 그런 이야기마저 들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의 노래를 아는 40~50대가 음반 발매 소식을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요즘 가수 안치환이 공중파 방송에 나와 노래를 부르는 것은 촛불정부여서 가능한 일이다. 그는 “나는 개인적으로 그런 실력이 준비되지 않았다”며 겸손을 보였다. 하지만 겸손 차원일까. 지난 촛불혁명 때 윤민석의 ‘헌법 제1조’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가장 많이 불렸다. 그러나 그 노래를 통해 만들어진 촛불정부에서 윤민석 노래조차 자유롭게 공중파를 타지 못한다.

이는 음악에서도 지독히 깊은 편견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 편견은 권위주의 시절 종북몰이를 통해 찍힌 국가보안법 위반 전과다. 그런 전과를 가진 많은 사람들이 청와대 비서실장도 했고, 현재 여당 대표도 그렇고, 심지어 대통령까지 배출했지만 여전히 ‘낙인’이나 다름없다. 많은 사람은 재빨리 보수정당으로 옮겨 자신을 탈색했다. 그러나 소신을 유지하며 진보정치를 추구했던 사람들은 여전히 편견과 낙인 속에 살고 있다. 특히 박근혜 정권 시절 해산된 통합진보당 출신은 진실 여부와 상관없이 진보세력 내에서도 짙은 낙인이 찍혀 있다.

가수 우위영이 스스로 “나는 가수다”를 유독 절규하다시피 강조하는 것도 그 지독한 편견과 낙인에서 탈출하려는 몸부림일지 모른다. 그는 “한때 같이 진보운동을 하던 사람들, 독재에 항쟁했던 세대들이 우리(통합진보당)에 대한 편견이 깊다”고 토로했다. 그는 민주노동당에서 시작해 통합진보당 대변인을 만 4년 동안 했다. 고 노회찬 의원과 공동대변인도 했다. 그는 당 행사에서 ‘혁명동지가’를 불렀다는 이유로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고 2017년 11월 8일 출소했다.

첫 독집 음반 <아무도 슬프지 않도록>

첫 독집 음반 <아무도 슬프지 않도록>

국가보안법 위반 전과, 여전히 낙인

그는 요즘 일주일의 절반은 울산에 있는 어머니와 서로 ‘위로’하면서, 또 절반은 서울로 올라와 노래 연습과 꼬마들에게 노래를 가르치면서 산다. 그는 출감 후 몇 번 콘서트도 가졌다. 그는 지난해 7월 14일 광화문광장에서 가진 양심수 석방을 촉구하는 콘서트에서 ‘지금은 우리가 만나서’ ‘백두산’을 불렀다. 이 콘서트에는 안치환은 물론 대중가수 이상은도 참석해 노래를 불렀다.

그가 매달린 것이 또 하나 있다. 책을 쓴 것이다. 그는 2011년부터 진보정당에서 벌어진 굵직한 사건들을 기록했다. 스스로 “내가 잘못한 것이 무엇인지, 더 이성적으로 찾고, 스스로 정리하기 위해 책을 썼다”고 했다. 기자가 “복기를 해보니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가”라고 물었다. 그러나 그는 딱 부러지게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회의록을 많이 인용했고, 여러 사람 인터뷰를 기록해 팩트 중심으로 썼다”고 말했다.

참 잔인한 일이다. 가수임을 자처하는 그에게 언론에 왜곡되고 비정상적 정치권력에 의해 해산된 진보정당의 진실을 기록하게 한 것은 잔인한 일이다. 이 작업은 당시 주요 당직자, 최소한 글을 썼던 당보 편집인 정도가 해야 하는 것 아닐까. 이런 지적에 그는 “당시 핵심에 있던 사람들은 아직도 자기 표현에 일종의 콤플렉스가 있다”고 오히려 그들을 두둔했다. “왜 복당하지 않는가”라는 기자 질문에 그는 멀리 창밖만 쳐다본다. 그리고 “묵묵부답”이라며 가벼운 웃음을 보였다.

그는 1964년 울산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노래를 잘했다. 초등학교 때 기타를 배워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을 치며 놀았다. 울산여고 시절 언니의 남자친구가 준 서울대 노래패 ‘메아리’ 악보집을 통해 민중가요를 이미 섭렵했다. 1984년 대학(외국어대 스페인어학과)에 진학해 대학가요제에서 대상을 받는 등 노래솜씨는 여전했다. 그는 당시 유명 음악방송 진행자인 이종환씨의 가요 프로그램에 출연하기도 했다.

그러나 85년 대학에 노래패 ‘해무리’를 만들고 친구들과 민중가요를 부르며(그는 주로 가르쳤다) 서서히 변했다. 그는 “노래 동아리 활동만 했지 소위 운동권이지 않았다”면서 “민중가요 가사와 정서가 나를 변하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1987년 6월항쟁을 거치면서 그는 ‘대중가수는 내 가치에 반한다, 문화·문예운동을 통해 사회에 기여하자’는 생각을 굳혔다. 그는 1988년 서정적이고 토속적인 사회참여 노래를 주로 부른 포크 그룹 ‘노래마을’을 통해 정식 가수로 데뷔했다.

-그때 대표곡이 ‘굽이치는 임진강’과 ‘파랑새’였나.

“1991년 노래마을 2집에 수록된 노래다. LP판으로 만든 ‘굽이치는 임진강’은 당시 20만장이나 팔렸다는 소문이 있었다.(웃음)”

-그럼 돈도 많이 벌었겠다.

“가수는 음반 수입과 별개다. 음반 수입은 제작자가 가져간다. 저작권은 창작·제작·편곡자 몫이다. 가수는 공연해서 돈을 벌어야 한다. 이런 수익구조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한창 잘나갈 때인 1993년 갑자기 노래를 그만뒀다. 이유는 뭐였나.

“갑자기 ‘내가 계속 이렇게 살아야 하나’ 회의가 들었다. 공장에 취업하려다 지역운동을 하기로 했다. 성남에 있는 ‘터사랑 청년회’에 상근하면서 학생·청년·여성활동을 했다.”

지난해 12월 민주노총이 마련한 ‘겨울나기 문화제’에서 우위영이 노래를 부르고 있다./ 우위영 제공

지난해 12월 민주노총이 마련한 ‘겨울나기 문화제’에서 우위영이 노래를 부르고 있다./ 우위영 제공

1984년 대학가요제에서 대상 받아

2002년 6월 경기 양주에서 여중생 효선·미선양이 미군 장갑차에 깔려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온 국민이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왔다. 이것이 우리나라 촛불시위의 시초다. 성남에서 지역운동을 하던 그는 ‘여중생범대위’ 문예위원장으로 광화문에 올라와 마이크를 잡았다. 밤에 촛불을 켜고 구호와 함께 적당한 노래와 춤이 어우러지는 촛불시위를 만든 주역 중 한 명이 바로 그다. 그는 “2002년 12월 14일 시청광장 10만 촛불시위, 12월 25일 광화문광장 성탄촛불 시위 등 주요 촛불시위 사회는 다 내가 봤다”고 말했다. 촛불시위를 통해 사회를 바꾸는 힘을 절감한 그는 진보정당에 뛰어들었다. 그는 “지역활동이나 문예활동보다 정당운동이 사회를 바꾸기에 훨씬 효율적이라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그는 2008년 민주노동당 최고위원까지 됐다.

-정치권에 입문해 보니 어떻던가.

“하루하루가 전쟁터 같았다. 내가 최고위원을 할 때는 분당 직후라 더 그랬다. 다시 맡으라면 안한다.”

-2008년 대변인을 맡아 만 4년을 했다. 아마 역대 정당, 남녀 통틀어 최장수 대변인 아닐까. 대변인 하면서 언론사와 기자를 많이 상대해 봤을 텐데, 어떻던가.

“그렇게 어려운 질문을 하나.(웃음) 개인적으로 만나면 다 좋은 사람이다. 그러나 시스템, 구조 속에서는 (음~) 왜 저럴 수밖에 없을까 생각을 많이 했다.”

-가장 힘들었을 때는 언제였나.

“2012년 당 비례대표 경선사태 때다. 그때 정말 죽음에 대해 구체적이고 실체적으로 생각했다. 내가 죽음으로써 누명을 벗길 수 있다면 그러고 싶었다. 나중에 검찰 수사 결과가 나왔지만…. 우리가 좀 과격하고, 부족할 수는 있지만, 거짓말을 할 사람은 아니라는 확고한 신념이 있었다.”

사실 그와 인터뷰는 첫 독집 음반 위주로 하기로 했었다. 그도 “이제 나는 분노도 없고 자유로워졌다”고 말했다. 그러나 ‘인물탐구’라는 꼭지를 빌미로 기자가 자꾸 과거 아픈 상처를 들추는 것 같았다.

그는 앞으로 한 5년 정도는 음악실력을 쌓기로 했다고 한다. 그는 “음악을 듣는 실력과 부르는 실력, 그리고 평론하는 실력을 쌓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민중가요를 좋아하는 40·50대(8090세대)가 정서적 공감을 나눌 수 있는 문화공간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민중가수를 초청해 라이브 공연도 할 수 있는 공간이다. 그리고 성가집도 내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 기자의 나쁜 버릇이 또 작동했다. 기자가 “원래 잘 우나?”라고 물었다. 갑작스런 기자의 질문에 그는 “그렇다. 좀 잘 우는 편이다. 그런데 오늘 나는 울지 않았다. 굉장히 이성적으로 대응했다”고 정색을 하고 대꾸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는 인터뷰 중간중간에 울려는 모습을 여러 번 보였다.



(출처: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901130939001&code=960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