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서와 소설 사이, 그 어디쯤

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인도네시아 262

우리동네 천사들 (5)

ep5. 떠나 보내기 루디 하디수와르노가 스텔라 자매에게 마련해 준 새로운 환경은 나나 메이가 당초 기대한 것을 훨씬 넘어서 있었습니다. 내가 원래 기대했던 것은 스텔라에 대한 처우였지 스테피에 대한 것까지는 아니었거든요. 스텔라가 루디 밑에서 교육을 받고 근무하는 동안 루디의 각별한 관심을 받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나머지 문제들, 예컨데 집에 남은 스테피를 돌보고 등하교를 돕는 일 정도는 어떤 식으로는 해결될 것이라 생각했었죠. 물론 스테피의 학교 숙제를 봐주거나 음식, 옷가지 하나하나에 신경을 써주는 것이 거의 여력이 없을 것임을 감안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미스터 루디가 스텔라와 스테피가 당면한 문제들 대부분을 한 방에 해결해 준 것입니다. “내가 한 일이 아니에요..

우리동네 천사들 (3)

ep3. 모래지옥 외근 길에 일이 있어 메이가 센티옹 부모집을 들른 적이 있는데 함께 갔던 나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까위까위(Kawi-Kawi) 골목길에 차를 세우고 기다렸습니다. 어디나 그렇듯 할렘의 동네 아이들이 좁은 골목에서 공도 차고 달리며 몰려다니면서 자꾸 차를 건드려 신경이 쓰였습니다. 그런데 짖고 까부는 아이들 사이에 확 눈이 띄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다른 취학 전 코흘리개 아이들보다 머리 하나 정도 더 큰 깡마른 단발머리 여자애였습니다. 팔 다리가 유난히 긴 그 아이는 선명한 이목구비를 하고 있어 앞으로 남자들 마음을 무척이나 흔들 미인으로 자라날 것이 틀림없어 보였는데 그래서 걸치고 있는 넝마 같은 옷가지나 레게 머리를 하려다 만 듯한 떡지고 삐죽삐죽 뻗친 머리칼이 흰 피부와 티없는 ..

밑바닥 블루스 (5)

ep5. 에필로그 - 밑바닥 사람들 메이의 가방을 스넨 폴섹에서 찾아온 건 그 해가 거의 저물어가던 2011년 12월 27일의 일이었습니다. 원래는 다시 아쩨 북방 어딘가의 시추선으로 돌아간 우신이 돌아오길 기다려 함께 경찰서에 가방을 찾으러 갈 예정이었으므로 그게 2012년 1월이나 2월 쯤이 될 예정이었지만 알정을 당긴 이유는 시추선에 있던 우신이 이삔(Ipin)이란 친구를 대신 붙여주었기 때문입니다. 말레이시아에서 만든 3D 만화영화 을 기억하는 사람들이라면 이삔이란 이름의 예쁜 대머리 어린이를 떠올리겠지만 우신의 친구 이삔은 아직도 스넨 지역에서 활동하는 현역 쁘레만이었습니다. 폴섹에서는 가방을 내주면서 따로 돈을 더 요구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예상대로 없어진 내용물이 많았습니다. 당연히 메이..

밑바닥 블루스 2021.12.27

잊을 수 없는 첫 커피

잊을 수 없는 첫 커피 자카르타에 부임하기 몇 해 전 딱 한 번 인도네시아에 출장한 적이 있었습니다. 1990년대 초였던 그 당시 난 인도네시아에 대한 터무니없는 환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발리의 새하얀 백사장을 사진으로만 몇 번 보았는데 상상 속에서는 그 평화로운 낙원이 지리학적 사실과는 아무 관계없이 자바섬 남부해안을 따라 끝없이 펼쳐지고 늘씬한 서양 미녀들이 손바닥만한 비키니 수영복을 입은 듯 안입은 듯 해변에서 선탠하는 장면을 머리 속에 그리다가 나도 모르게 흘러내린 입가의 침까지 훔치며 출장출발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인디아나존스 영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거지와 행상들이 활주로까지 몰려나와 트랩에서 내리는 여행객들을 에워싸는 자카르타 공항을 상상하기도 했고 그곳 주민들이 아침마다 타..

매일의 삶 2021.12.08

지사에서 생긴 일

1. 우리 공장장은 고교시절 입시준비의 강박관념 때문에 한때 피해망상적 편집증에 시달렸다는 말을 자주 했습니다. 그는 정신병원에도 잠시 다녔고 결국 기독교계 기도원에서 치료도 받으면서 증세가 사라졌다고 합니다. 당연히 그는 교회 일에 열심을 내는 독실한 신자가 되었습니다. 처음 발령을 받아 자카르타로 떠날 당시 그는 교회학교 선생을 하고 있었고 내가 자카르타에 도착하던 해에는 모 한인교회 집사로서 남선교회 총무까지 맡고 있었습니다. 내 부임 초창기 시절엔 일요일 아침마다 내 집 앞에 차를 대놓고 교회 가자고 강요했던 것도 당연히 우리 공장장이었습니다. "목사 아들이 교회 안다니면 쓰나?" 공장장이 늘 하던 소리였습니다. 난 어린 시절부터 교회에서 많은 일들을 보았습니다. 열정적인 교인들, 교회 안을 메아..

매일의 삶 2021.12.04

교민사회에선 입조심

끝말 잇기 1997년 태국발 외환위기로 시작된 아시아 경제위기가 지나고 한국과 인도네시아의 금융계 판도가 한바탕 정리된 시점에, 한 금융사에서 파견나온 한 고교동창은 자신이 속한 금융기관이 그 사이 합병된 상대 은행 자카르타 지점 청산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철저한 보안유지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업무와 관련되지 않었음에도 해당 상황에 호기심을 보이는 교민들과의 접촉을 최대한 자제하고 극도로 말을 아낀 것은 물론 식사자리에 참석할 초대받아도 웬만하면 정중히 거절했습니다. 스트레스를 풀려고 개인적으로 술을 마실 때마다 나를 대작 상대로 불러내곤 했는데 혹시라도 술 먹다 업무상 어려움도 토로하고 문제를 복잡하게 만드는 사람을 씹게 될 경우 아무 이해도 엮이지 않고 절대 말도 옮기지 않을 사람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일반 칼럼 2021.12.01

조코위 대통령, 옴니버스 법안 폐기 가능성은?

조코위 대통령, 옴니버스 법안 폐기 가능성은? Endy M. Bayuni / 2013년 3월 13일 / 자카르타 포스트 논설 조코위 대통령은 마치 프로 체스 선수처럼 상대방 탐색을 위한 첫 수를 두는 것으로 그의 두 번째 임기 첫 행보를 떼었다. 그의 지난 4월 재선을 도운 이들조차 강력히 반대하고 있는 논란의 ‘일거리 창출에 관한 옴니버스 법안’을 꺼내 든 것이다. 이 행보는 어떤 방향으로 전개되든 응분의 리스크를 안고 있다. 하지만 헌법 상 2024년 대선에 다시 연임출마가 금지된 그로서는 날아드는 오물에 셔츠가 좀 더러워질 각오만 있으면 잃을 것이 없다. 조코위 대통령의 현재 행보는 정치평론가들이 말하는 마지막 임기 대통령이 보편적으로 취하는 행보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즉 재선을 염두에 두지 않..

영웅본색

1. 그 두 사람을 처음 보았을 때의 느낌은 뭐라 설명하기 좀 애매한 것이었습니다. 현지 부유한 화교들의 사무실이나 집에 가 보면 관상용으로 키우는 물고기 중 입가에 촉수 같은 굵고 짧은 수염이 좌우로 한 가닥씩 나 있고 사람으로 치면 앞에서 봤을 때 코가 있어야 하는 부분에 아랫입술이 올라 붙어 있는, 그래서 아래턱이 위로 불거져 올라와 강인하면서도 매몰찬 인상을 풍기는 꽤 크고 몸통도 긴 '아르와나'라는 이름의 물고기가 있습니다. 50줄에 막 접어든 석사장은 그런 인상을 하고 있었어요. 한편 처음 봐서는 그 견고한 화장 때문에 20대 초반인지 30대 후반인지 가늠하기 어려웠던 여자는 넘어질 듯 휘청거리는 높은 하이힐을 신고서도 남자의 가슴 정도밖에 오지 않는 키에, 매직스트레이트로 쫙 펴서 허리까지 ..

[펌글] 인도네시아 인권의 역사적 시험대, 무니르 독살 형사소송의 ‘마지막 비상구’

인도네시아 인권의 역사적 시험대, 무니르 독살 형사소송의 ‘마지막 비상구’ 아시아 생각/아시아 칼럼 2011.04.11 09:55 인도네시아 인권의 역사적 시험대, 무니르 독살 형사소송의 ‘마지막 비상구’ 왼쪽: 인권변호사 무니르 사이드 탈립(Munir Said Thalib) 오른쪽: 전 인도네시아 국가정보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