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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켈광산 영적방어작전

니켈광산 영적방어작전 (16)

beautician 2022. 1. 26. 11:45

ep16. 떠날 준비

 

황금알을 낳는 거위와도 같았던 니켈광산들은, 가동이 중단된 이후에도 언제 끝날지 모를 금수조치의 해제를 하염없이 기다리면서 오히려 큰 돈을 들여 각종 관련허가들을 연장해야 하는 애물단지가 되었습니다. 돈이 벌리는 동안 어떤 식으로든 유지할 수 있었던 릴리의 조직들도 서서히 붕괴조짐을 보였고 특히 로니는 까마루딘이나 당 지역위원장 등 릴리의 적들과 공공연히 내통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릴리가 부당하게 자신들을 회사운영에서 배제했다며 소송을 걸어왔고 로니는 폭력과 감언이설로 사람들을 위협하며 그들에게 유리한 증언을 해줄 증인들을 만들어 내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좀 더 많이 생산해 좀 더 빨리 수출해 돈을 벌겟다는 목적으로 연합했던 다양한 이해관계의 개인과 조직들은 이제 그간 수출을 통해 축적한 부를 얼마다 더 많이 뜯어내고 그 과정에서 파생한 비용과 벌금들을 어떻게든 다른 사람들에게 떠넘기기 위해, 힘 좀 쓴다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다시 합종연횡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일부 관련자들에게 그것은 더 이상 수출할 수 없게 된 니켈광산을 통해 돈을 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했습니다.

 

나타샤 쪽에서도 처음 돈을 끌어왔던 싱가폴의 아랍계 펀드가 원금회수를 시도했고 디스타로 현장의 니켈 품위미달로 거래불발이 발생한 2013년 상반기 벌크선 체선료 문제도 뒤늦게 제기되고 있었습니다. 싸게 나온 광석을 잡으려는 급한 마음에 바이어 측에서 판매계약도 맺기 전에 배부터 보냈지만 서로 조건이 맞이 않아 합의에 이르지 못하면서 거액의 디머리지가 발생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큰 돈이 걸린 만큼 바이어 측에서는 말이 되든 안되든 일단 온갖 이유를 들어 릴리의 과실을 주장했습니다.

 

또한 모셈파 현장에서 작업했던 컨트랙터 3군데 중 한 곳은 자신이 선적한 여러 척의 벌크선 중 한 척 분의 물량을 은행이 지불을 담보하는 L/C(신용장) 조건이 아니라 거래 당사자들이 모든 리스크를 지는 DP(Document against Payment) 조건으로 수출했다가 대금입금 전에 모종의 과실이 벌어져 은행으로부터 B/L(선하증권)을 먼저 손에 넣은 산동성의 중국 바이어가 화물을 인수한 후 배째라며 대금결재를 거부한다고 보고해 왔습니다. 물론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일 가능성이 컸습니다. 그 회사의 사장은 릴리 못지 않은 여걸인 키라나(Kirana)라는 화교 여인이었는데 그와 내연관계인 중국인 실소유주가 산동성 출신이었습니다. 따라서 설령 그들의 주장대로의 사건이 실제로 벌어졌다고 해도 사실상의 내막은 인도네시아 광물수출환경이 급격히 악화되자 키라나 측에서 사기를 핑계로 벌크선 한 척 분의 대금 수백만 불을 중국으로 빼돌린 것이란 심증이 강했습니다.

 

 

 

당시 신축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자카르타 시내 센트럴파크몰(Central Park Mall) 컴플렉스의 비지니스 건물인 APL 타워에 있던 그들의 화려한 사무실은 지금도 이름만 바꾼 채 그대로 있고 그들은 당시 그 사기사건에 대해 중국 업체에 소송도 걸지 않았습니다. 아무튼 그들은 그런 수상쩍은 이유를 대며 모셈파 명의로 수출한 벌크선 여러 척 분 니켈에 대한 로열티 전액의 지불유예를 요청했으므로 릴리의 자금계획도 덩달아 꼬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로열티 정산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릴리는 자기 광산에서 물건을 공짜로 내준 것을 넘어 수출허가를 위해 미리 지출한 적잖은 일부 관련 비용들까지 정산받지 못하는 큰 손해를 입게 되었습니다. 모셈파의 전 소유주인 까마루딘이 뒤에서 그들과 짜고 장난을 친다는 냄새가 짙었습니다. 어쩌면 그들은 까마루딘과 모종의 딜을 하며 뒷돈을 쥐어주었는지도 모릅니다. 이제 키라나에게 채권을 회수하는 것은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하는 골치 아픈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릴리는 깔리만탄 반자르마신에서 생산한 석탄을 국내 거래처에 판매해 그 수익으로 니켈광산 운영자금을 조달하려 했습니다. 릴리는 쉽게 포기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원석수출금지조치는 2017년에 이르러서도 약간 완화되었을 뿐 결과적으로 해제되지는 않았는데 2014년 당시만 해도 불과 몇 개월이면 금지조치가 해제되고 수출이 재개될 것이라 굳게 믿는 사람들이 많았고 그래서 당연하게도 저마다 힘을 써주겠다며 비용을 요구하는 관료들이 넘쳐났습니다. 어떤 이들을 수많은 중소 광산업체들이 이미 긴 줄을 서고 있는 국영 제련소들에 니켈을 공급할 수 있도록 연결해 주겠다고 장담하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제련소를 건설하지 않고도 매월 벌크선 네 척 규모의 원석을 수출할 수 있는 뒷문을 열어주겠다며 릴리를 비롯한 광산업자들에게 접근해 왔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유력한 지방관료들의 전-현직 참모들이었으므로 절박한 이들은 그들의 네임밸류를 믿고 뒷돈을 뿌리며 매달렸지만 대통령 선거를 코앞에 둔 엄중한 시절에 그런 편법들 어느 것 하나 성사될 리 없었습니다. 그들은 진행비라는 명목으로 쇼핑백 몇 개 분의 뒷돈을 받아 먹은 후에 나 몰라라 조용히 뒤집어진 것이 아니라 신청한 업체들의 자격요건에 중대한 결격사유가 있다며 오히려 적극적으로 모든 것을 돈 준 업체들의 잘못으로 돌렸고 이에 반발하며 항의하는 업체들에겐 허가연장신청 반려나 세무조사 등으로 압박을 가했습니다. 한 번 피해자가 되는 순간 그 피해를 복구하려 분투하는 과정에서 간단히 2-3차 피해를 당하는 경우는 국가나 민족을 막론하고 세계 곳곳에 얼마든지 널려 있습니다. 그런 곳에서 관료들의 적반하장이란 하나도 놀랄 일 없는 일상적인 관례일 뿐입니다.

 

미스터 배는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

 

나타샤가 정곡을 찔렀습니다. 그것은 지난 1년 동안 내가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이기도 했습니다. 외국에 나와 산다는 것은 어쨌든 적잖은 비용이 드는 일입니다. 결국 그 비용을 누가 지불하느냐의 문제인 것이죠. 그 지출들, 즉 비자, 주택, 자녀교육, 차량 등과 관련된 비용들의 전부, 또는 대부분을 책임져 줄 소속회사 없이 자비로 그 모든 것을 감당하려면 물려받은 재산이 많거나 돈이 벌리는 사업이 순조롭게 돌아가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아이들의 유학비용까지를 포함한 대부분의 경비를 감당해 준 지난 10년간의 미용사업이 이제 거의 막을 내린 상황에서 수없이 시도해 본 다른 대안들 중 딱히 유망주라 할 만한 것이 아직 보이지 않았는데, 그래서 나름대로 전력을 다해 도우며 큰 기대를 걸었던 릴리의 니켈광산마저 급격히 동력을 잃는 모습애 참담한 기분이 들 뿐이었습니다. 이대로라면 이제 내 비용을 더 이상 감당하지 못할 순간도 조만간 도래할 것입니다. 싱가폴의 도심의 화창한 오후, 아름다운 강변에 앉아서 최악의 상황을 떠올려야 한다는 것이 너무나 비현실적으로 느껴졌습니다.

 

글쎄, 아무래도 베트남을 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베트남요?”

 

마침 호치민에서 자기 일을 도와달라는 후배의 요청을 오랫동안 받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아무리 20년 넘게 알고 지낸 후배의 부탁이라 해도 그런 소리 한 번 들었다고 당장 짐 싸 들고 나설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는 집요했고 그해 1월 말엔 직접 자카르타에 찾아와 진지하게 설득하기도 했습니다. 원석수출금지조치가 발효되고 2주 후의 일이었습니다. 자기 사업이 어떤 식으로든 돌아가던 시절엔 절대 곁눈질 할 리 없었지만 전후좌우의 길이 하나 둘 막혀가는 가운데 호치민으로 가는 선택지는 마치 신이 이때를 대비해 미리 마련해 놓은 비상구처럼 영롱한 아우라마저 감돌고 있었습니다.

 

호치민의 후배는 둘째 아들의 대학진학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첫째의 뒤를 따라 한국으로 진학시킬 계획이었죠. 그렇게 두 아들이 모두 한국으로 진학하면 평생 아이들만을 바라보고 살았던 후배의 아내는 남편과 호치민에 남기보다는 아이들을 따라 한국에 가려 할 터였습니다. 그렇게 되면 호치민에 모셔온 노모를 후배 혼자 모시기 어려운 상황이 됩니다. 그래서 그는 해외사업의 연륜과 내공이 어느 정도 되고 모아놓은 돈도 충분한 사람들에게 곧잘 찾아오는 유혹에 빠져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었습니다. 현지 사업을 믿을 만한 사람에게 맡기고 자기는 일선에서 한 발 물러서는 대신 서울을 근거지로 가끔 베트남을 오가며 현지 사무실을 빡세게 관리하면 가족도 사업도 잃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마도 그는 그런 취지에서 하노이 지점엔 이미 그의 고교 선배를 한국에서 불러와 앉혀 놓았고 내겐 호치민 사무실을 제안했습니다.

 

내가 한국에 바로 가는 것도 아니에요. 형님이 하루라도 빨리 오시면 1년 가까이 같이 일하면서 업무 파악도 하고 베트남어도 배울 시간이 넉넉해요. 물론 인도네시아 일도 같이 하시면서 필요할 때마다 잠깐씩 자카르타 돌아가서 일보셔도 돼요.”

 

자카르타에서 만난 후배는 그렇게 말했습니다. 여러 번 겪는 일이지만 하던 일을 같이 해도 좋다는 조건은 절대 호의적인 제안이 아닙니다. 대개의 경우 그렇게 선처해 주는 대신 자기 일을 해주는 부분에 대한 급여나 처우를 대충 낮춰서 하겠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대부분의 시간을 호치민에 앉아 전화와 SNS로 관리하고 두 세 달에 한 번 인도네시아를 다녀오는 정도로, 당시 숨이 깔딱깔딱 넘어가고 있던 자카르타의 내 미용사업을 살려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우리한테 필요한 건 공급선이에요. 자카르타에서 물건 파는 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미스터르는 해외에서 공급선을 찾아 오세요.” 

미용사업을 위해 만나야 할 공급선의 대부분은 한국이나 중국, 일본에 있었지만 해외란 어차피 다 통하는 거라고 자기 편한 대로 생각한 메이도 호치민을 향해 내 등을 떠밀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어쨌든 맞는 말을 한 겁니다. --일에서 공급선을 찾는 것은 자카르타보다 지리적으로 가까운 호치민에서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 수도 있었습니다.

 

결국, 릴리 언니를 진심으로 도울 사람들은 다 떠나는 셈이네요.”

릴리는 형제랑 조카들만도 몇 트럭 분이야.”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나타샤의 생각에 어느 정도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난 릴리를 절대 배신하지 않을 진정한 후원자는 나와 루벤 뿐이라고 늘 생각했습니다.  물론 나타샤도 몇 년 전부터 그 리스트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루벤은 이미 상해에 갔고 나타샤는 조호바루에 있는데 이제 나 역시 자카르타를 떠나 호치민으로 가려는 겁니다.

 

릴리를 겹겹히 감싸던 경호부대들 중 코파수스와의 관계는 당시 아직 유지되고 있었고 우린 남부 자카르타 찌잔뚱(Cijangtung) 소재 코파수스 사령부에서 사령관 이취임식 만찬에 초청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생산이 중지되고 광산현장이 더 이상 가동되지 않자 그 방어선이 점차 느슨해지다가 언젠가 소멸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었습니다. 릴리의 친인척들은 광산이 활발하게 가동되는 동안 서로 앞다퉈 릴리를 수행하며 친분을 과시했고 요청하지도 않은 여러 가지 도움을 먼저 제의해 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오래 전 릴리의 큰 오빠이자 짜맛이라는 직책의 현직 지방단체장이던  아미르가 우리 검사관을 납치, 감금하고서 그의 목숨을 인질로 협박해 아세라의 제재소 사업을 빼앗으면서 마침내 우리를 파산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을 당시 그걸 뻔히 보면서도 침묵으로 일관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 상황 속에 릴리를 놔두고 베트남으로 떠나려는 발길이 무거웠습니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는 점점 더 좁아지고 있었습니다. 현지 노동부와 이민국의 날로 더욱 빡빡해지는 규정도 많은 사람들을 궁지로 몰고 있었습니다. 기본적으로 인도네시아 정부의 기조는 월급 주러 온 외국인 사장, 이사들은 남고 월급 받으러 온 외국인 매니저들은 모두 나가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이 대사관이나 대기업에게는 피부에 와 닿을 리 없는 부분입니다. 큰 신장을 가진 사람들이 문턱을 넘는 일은 너무나도 쉬운 일이지만 문턱보다도 작은 키를 가진 사람들에겐 그 문턱이 때로는 결코 넘을 수 없는 깎아지른 절벽처럼 느껴진다는 것을 키 큰 이들은 알지 못하는 법이죠. 솔직히 말하면 그들은 이 세상에 나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도 알지 못할 가능성이 큽니다. 

 

나 같은 외국인 영세 사업자들의 설 자리는 당연히 줄어들었고 알고 지내던 교민 선후배들 중에선 실제로 현지사업을 접고 한국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습니다. 마치 찬란한 장밋빛 미래가 때 맞춰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말입니다.

 

광산이 다시 돌아가게 되면 돌아올 거죠?”

 

광산이 재가동된다고 해서 인도네시아 정부의 외국인 비자정책이 변할 리 없습니다. 그보다는 나에 대한 릴리의 생각이 먼저 변해야 했습니다. 정말 가까운 사람에게 차를 팔 때 그토록 가까운 사이이니 남들보다 좀 더 비싸게 사주길 바라는 것처럼 사는 사람 입장에서는 남들보다 더 싼 값에 주기를 바라는 게 인지상정입니다.  당시 나와 릴리의 관계도 그랬습니다. 릴리는 광산사업을 위해 자신이 무티아라의 육아를 포함한 많은 것들을 희생하며 전력을 다하는 것과 같이 내게도 같은 희생을 요구하곤 했습니다. 한편 305천불을 은행에서 찾아 자기 월급으로 5천불을 가져가는 나타샤와 달리 내 비용은 늘 릴리의 우선순위 리스트의 맨 마지막에 있곤 했습니다. 그것은 그녀가 날 그만큼 편하게 생각한다는 의미였죠. 하지만 릴리가 한 번에 수십만 불씩 비용을 결재하더라도 거기엔 내 비용은 결코 포함되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했습니다. 만약 그녀가 나를 조금이라도 우선순위의 상위권에 두었다면 왕구두에서 송구영신 파티에 그 막대한 비용을 퍼붓기 전에 내 빈 지갑을 먼저 채워주었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당연한 일이지만 나도 베트남에 가려고 마음먹지 않았겠죠.

 

당연하지.” 

입 밖으로 내는 대답이 꼭 진심을 담는 것은 아닙니다.

 

오래 전, 전 직장 현지법인에 5년 임기로 부임했던 것인데 어쩌다 보니 너무 오래 눌러 살고 말았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난 인도네시아를 떠날 마음의 준비를 마쳤습니다. 

 

(2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