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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 술라웨시 민화] 마카사르(Makassar) 도시이름의 유래

beautician 2022. 5. 31. 11:57

마카사르(Makassar)의 유래

 

술라웨시 전도. 마카사르는 지도의 왼쪽 밑(B)

 

남부 술라웨시 주도인 마카사르(Makassar)는 발음상 중간에 거칠다는 의미의 ‘까사르(kasar)’라는 단어도 들어 있고 술라웨시 사람들이 자바사람들에 비해 좀 뻣뻣하고 직선적이니 아마도 ‘거친 사람들이 사는 곳’ 정도의 어원이 아닐까 추정하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16세기 고와-딸로 왕국(Kerajaan Gowa Tallo) 여섯 번째 왕의 꿈과 관계가 있고 좀 더 이슬람적 뉘앙스가 짙게 깔려 있습니다.

 

고와 딸로 왕국은 고와 왕국과 딸로 왕국이 결합된 것으로 처음엔 협정에 의해 각각의 영토에 각각의 왕이 각각 다스렸으나 이후 한 개의 왕국으로 통일됩니다. 마카사르라는 이름은 14세기 음뿌 쁘라빤짜(Mpu Prapanca)가 지은 나가라끄레타가마(Nagarakretagama) 경 3장 14절에 마자빠힛 왕국의 점령지역 중 하나로 등장합니다. 한편 고와 왕국의 아홉 번째 왕 뚜마빠리시 깔로나(Tumaparisi Kallonna 1510-1546)가 실제로 마카사르 도시를 발전시킨 인물입니다. 그는 수도를 내륙에서 해안으로 옮기고 제네브랑 강(Sungai Jeneberang) 어귀에 요새를 세운 후 도시의 책임자를 임명해 교역을 관리하도록 했습니다.

 

16세기에 이르러 마카사르는 인도네시아 동부 전역을 아우르는 교역 중심지가 되었고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큰 도시로 성장했습니다. 마카사르의 역대 왕들은 자유무역을 정책을 펼쳐 마카사르에 방문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자유롭게 상행위를 할 수 있도록 했고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가 이 도시를 독점하려는 시도를 막아내려 노력했습니다.

 

고와 딸로 왕국 역사에 따르면 고와 왕국의 딸로 왕조 여섯 번째 망꾸부미(Mangkubumi)인 이 말링까랑 다엥 마뇬리 까라엥 까땅카(I Mallingkaang Daeng Mannyonri Karaeng Katangka)가 딸로에서 빛이 나와 인근 왕국들로 번져 나가는 모습을 꿈 속에서 보았답니다. 심지어 왕은 똑 같은 꿈을 세 번 연속으로 꾸었습니다. 다르와 라시드 MS(Darwa rasyid MS)가 쓴 ‘14~19세기 남술레웨시 사건 연대기’에 따르면 이슬람역 1014년 초 주마딜 달의 9일 금요일, 즉 1605년 9월 22일 그의 세 번째 꿈 속에서 작은 배 한 척이 딸로 해안에 정박하는 모습을 보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날 해안에 있던 사람들은 실제로 하얀 옷을 입은 남자가 탄 배가 해안 선창에 들어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하얀 옷의 남자가 배를 선창에 묶은 후 묘한 행동을 하는 것을 사람들은 신기하게 바라보았는데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그 행동은 숄랏(sholat), 즉 이슬람식 기도를 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숄랏

 

그날 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그 남자의 몸이 빛을 발하더니 그 빛이 사방으로 뻗어 나갔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두려워한 사람들이 다음날 아침 이 신비로운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왕궁에도 전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왕은 심상치 않은 일이라고 여기며 급히 달려 딸로 궁전을 나서려 하는데 예의 하얀 혹의 남자가 갑자기 궁전 정문 앞에 나타났습니다. 마치 하늘에서 떨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말입니다. 남자의 얼굴은 평온했고 사람들이 말한 것처럼 그의 몸에서 빛을 뿜어져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 남자는 두려워 자기 얼굴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는 왕의 손을 잡았는데 갑자기 왕의 오른손이 저절로 움직여 왼쪽 손바닥에 자신도 전혀 알지 못하는 아랍어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 사람은 놀란 왕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잠시 후 해안에 배를 정박할 남자에게 당신이 쓴 글을 보여주세요.”

왕이 뭐라 대답도 하기 전 그 남자는 또 다시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습니다.

 

왕은 그 남자가 말한 대로 급히 딸로 해변으로 나갔습니다. 거기엔 정말 막 배를 정박한 외지인 남자가 있었습니다. 왕이 곧바로 그 남자에게 다가갔는데 그는 수마트라의 꼬토(Koto)에서 이슬람 포교를 위해 온 울라마 다뚝 리 반당(Datuk Ri Bandang)이란 사람이었습니다.

 

딸로 왕은 자기 손바닥에 쓴 아랍어 문장을 그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다뚝은 이를 기이해하며 왕의 손바닥의 글이 샤하닷(syahadat)에 나오는 두 문장이라고 말했습니다. 왕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샤하닷은 종교가 명령하는 것을 믿고 수행할 것이며 종교가 금지하는 것을 멀리하겠다는 무슬림의 신조를 말합니다.

 

샤하닷: 권능의 주는 오직 알라뿐이며 알라의 진정한 종은 무하마드 뿐임을 내가 증거합니다.

 

다뚝이 딸로에 온 것은 왕이 이슬람을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두 사람의 이 만남은 남부 술라웨시에 이슬람이 전파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라자 딸로는 이슬람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이름도 술탄 압둘라 아왈루딘 아와울 이슬람 까라엥 딸로 뚜머낭아 리 아가마나(Sultan Abdullah Awaluddin Awawul Islam Karaeng Tallo Tumenanga ri Agamana)라고 바꾸었습니다. 이로서 이슬람은 고와 탈로 왕국의 정식 국교가 되었습니다.

 

마카사르라는 지명은 ‘아카사라키(Akkasaraki)’라는 마카사르 어에서 왔는데 이는 스스로를 드러낸다는 뜻입니다. 해변에서 빛나는 몸을 가진 사람이 스스로를 드러낸 것을 지칭한 것입니다. 즉 마카사르라는 지명 자체에 당시 왕국이 이슬람을 받아들인 사건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17세기 포르투갈 문헌에도 발견되는 마카사르는 이미 그 당시 고와-탈로 왕국의 중심지가 되어 있었습니다. 한때 도시 이름이 우중빤당(Ujung Pandang)으로 잠시 바뀐 적이 있지만 다시 마카사르라는 이름을 되찾은 것은 탄탄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남부 술라웨시의 고와 탈로 왕국에 상륙한 이슬람은 술라웨시 전역으로 퍼져 났고 오늘날 남부 술라웨시 인구 대부분이 이슬람을 따르고 있습니다.

 

한편 다뚝 리 반당은 다뚝 리 띠로(Datuk Ri Tiro), 다뚝 술라이만(Datuk Sulaiman) 형제와 함께 남부 술라웨시 이슬람 전파에 큰 영향을 끼친 울라마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습니다. 미낭까바우 출신인 다뚝 리 반당은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마카사르에서 세상을 떠났고 그의 묘소는 마카사르의 딸로면(Kecamatan Tallo) 깔루꾸 보도아(Kaluku Bodoa) 지역의 시나사라 거리(jalan Sinassara)에 있습니다.

 

마카사르에 있는 다뚝 리 반당의 묘소

 

출처:

https://histori.id/legenda-sejarah-asal-mula-nama-kota-makasa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