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서와 소설 사이, 그 어디쯤

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카테고리 없음

라크마와티 수카르노뿌트리 별세

beautician 2021. 7. 3. 11:50

 

다음은 수카르노 인도네시아 초대 대통령이 종신대통령 직에서 끌려 내려와 몰락의 길을 걷던 시절의 이야기 입니다.

 

(전략)

다른 여인들과 수없이 새장가를 들면서 멀어져버린 본처 파트마와티의 집에서 처음엔 참으로 뻘쭘했을 그는 하루종일 멍하니 앉아 있었고 기껏 화단식물들의 입을 쳐주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그는 폐에도 문제가 있었고 특히 신부전으로 인해 늘 약을 먹어왔지만 대통령궁을 떠난 후엔 약을 받지 못했습니다. 대통령궁에 남아 있던 그의 약품들은 군인들에 의해 모두 폐기처분된 상태였습니다.

 

길거리에서 군것질할 돈도 없을 정도로 수까르노나 그를 모시는 남은 사환들도 극도로 궁핍했습니다. 그나마도 그가 자주 외출하며 주민들 앞에 얼굴을 보인다는 소식을 접한 수하르토측 장교들은 이를 불쾌히 여겨 어느날 파트마와티의 집에 트럭을 몰고와 수까르노를 태워 보고르로 옮겨갔습니다. 한때 그와 연대를 맺었던 나수티온이 의장으로 있는 MPRS에서 그의 보고르궁 연금을 결정한 것입니다. 연금기간 동안 적절한 진료나 약품은 여전히 공급되지 않았고 심지어 수의사가 수까르노의 진료를 맡았으므로 수까르노의 건강은 더욱 악화되고 말았습니다.

 

 

어느날 딸 라크마와띠의 방문을 받은 수까르노는 더욱 병이 깊어 자신을 자카르타로 보내달라고 수하르토에게 부탁하는 친필편지를 써 라크마와티 편으로 수하르토의 쯘다나(Cendana) 자택에 보냅니다. 오래 숙고한 수하르토는 수까르노의 자카르타행을 허락하지만 파트마와티의 집 대신 위스마야소(지금의 사뜨리아만달라 군사박물관)에 머물게 했습니다. 그러나 자카르타로 돌아온 후 그는 오히려 군인들의 더욱 가혹한 감시와 통제를 받아야 했습니다. 방에서 나오는 것부터 아예 금지되었고 그가 무엇을 하든 군인들은 큰소리를 치며 닥달을 했습니다. 음식포장에 사용된 신문조각을 읽는 것조차 군인들은 문제 삼았고 수까르노는 매우 더럽고 열악한 환경에서 살며 고작 비타민과 수면제 외에는 정작 그의 망가진 신장이나 그 합병증을 치료할 약품을 전혀 공급받지 못했습니다.

 

그가 위스마야소에서 고통받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지자 그를 구하려는 움직임도 있었고 실제로 그의 숙소까지 뚫고 들어가 그를 빼내려는 일단의 부대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수까르노는 자신이 도망가면 동족상잔의 전쟁이 일어날 거라며 탈출을 거부했다고 전해집니다.

 

1970년 초 수까르노는 라크마와티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파트마와티의 집에 가는 것을 허락받았습니다. 그가 도착한 것을 알고 많은 인파들이 몰려 그의 이름을 연호했지만 손을 들어 화답하려는 그를 군인들이 제지해 급히 집안으로 끌고 들어갔습니다. 그는 정치적 포로의 신분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군인들은 이 일로 인해 더욱 더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고 통제했습니다. 2월에 접어들면서 수까르노의 병은 더욱 깊어져 그는 잠도 못들 고통에 못이겨 비명을 지르곤 했지만 경비병들은 이를 모를 채 할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명령받았던 거였죠.

 

여기 등장하는 라크마와티 수카르노뿌트리는 수카르노의 딸이자 PDI-P 메가와티 수카르노뿌트리의 동생입니다.

그녀가 오늘(2021년 7월 3일) 코로나-19를 극복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2021. 7.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