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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속과 괴담 사이 (43)] 아쩨에 새겨진 거인 발자국

beautician 2022. 8. 7. 11:54

[아쩨 민화] 뚜안 따파 전설

 

거인의 발자국:따빡 뚜안따파(Tapak Tuan Tapa)

 

따빡뚜안(Tapaktuan)은 남아쩨군(Kabupaten Aceh Selatan)의 군청 소재지입니다. 그곳에는 매력적인 관광지들이 많이 있고 신비로운 전설들도 깃들어 있습니다. 따빡뚜안은 꼬따나가(Kota Naga), 용의 도시라고도 불립니다. 이 도시가 용의 전설과 관련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죠.

 

그곳엔 거인 발자국 같은 것이 해안 바위에 찍혀 있어 사람들 이목을 사로잡는데 따빡 뚜안따파(Tapak Tuan Tapa)라고 부르는 유적입니다. ‘뚜안따파의 발자국이란 뜻이죠. 그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색상이나 모양이 어딘가 인의적 손길이 닿은 듯한 느낌도 들지만 그게 정말 뚜안따파라는 엄청난 거인의 발자국이라고 믿어 보기로 합니다. 사림이 손을 댔다면 도대체 누가 왜 저 외딴 해변 바위 위에다가 엄청난 노력과 시간을 들여 세상이 놀랄 예술작품이 아니라 고작 저런 엉성한 발바닥 조각을 해 놓았겠어요.

 

사실 거인 발자국 화석이나 유적들은 세계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고 신장 4~8미터 정도 거인들 유골발굴도 적잖이 이루어져 관련 사진들이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인도네시아에도 거인에 대한 전설들이 넘쳐나죠. 네피림의 후예들이 정말 이 땅에 살았던 흔적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저 뚜안따파의 발자국도 그리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너무 선명해서 오히려 의심을 사는 경우입니다.

 

그 발자국이 있는 남아쩨 따빡뚜안면 감봉빠사르(Gampong Pasar) 마을은 따빡뚜안 도심에서 1.5km, 아쩨주 주도인 반다아쩨나 북수마트라의 메단시에서는 500km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이곳에 가려면 바닷가의 험한 바위들 몇 개를 힘겹게 지나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만나게 되는, 따빡뚜안 람뿌산(Gunung Lampu)이 뻗어나와 해안까지 이어진 곳에 길이 6미터, 2.5미터의 발자국이 바위에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발가락 하나하나가 너무 선명해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모습이 아닙니다.

 

발자국이 6미터 길이라면 거인의 신장은 최소 30~40미터쯤 되는 진격의 거인 수준이란 거겠죠? 그 발자국은 거인 따빡 뚜안이 바다 한가운데로 큰 도약을 하기 위해 발디딤을 한 곳이라고 전해지는데 전말은 이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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쉑 뚜안따파(Syekh Tuan Tapa)라는 이름의 거인이 그곳에서 은거하며 도를 닦았습니다. 잘 때나 깨어 있을 때 언제나 창조주를 기억하며 경배하고 기도했다는 묘사로 보아 그는 신앙심과 도력이 깊은 인물이었습니다. 신앙심 깊은 거인…… 좀처럼 만나기 힘든 캐릭터입니다. 띠문마스(Timun Mas) 동화에 등장하는 녹색거인 부토이조, 발리 바뚜르 호수의 거인 꺼보이와(Kebo Iwa) 등 민화 속에 등장하는 거인들은 모두 종교나 인간사회에 동화하지 못한 거칠고 치명적인 존재들이었으니까요.

 

뚜안따파는 늘 산 속의 한 동굴 속에서 깊은 명상에 잠겨 일반인들이 절대 알 수 없는 세상과 우주의 비밀을 추구했습니다. 따파(Tapa)란 신비주의적 명상을 뜻하는 단어이고 뚜안은 경칭이니 뚜안따파는 실제 이름이라기보다는 명상도인정도의 의미로 보면 될 듯합니다.

 

한편 그 지역에는 한 쌍의 용이 살고 있었는데 자식을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자기 나라에서 멀리 쫓겨난 이들이었습니다. 여러 판본들이 이들을 중국에서 온 용이라고 묘사하는데 그것은 뚜안따파에게 이슬람적 요소가 덧씌워진 것처럼 아마도 후대에 각색되어 첨가된 이미지일 것으로 보입니다. 여의주를 물고 신출귀몰하는 중국의 용들, 날개 달린 강력하고도 사악한 서양의 용들 이미지가 들어오기 전, 인도네시아에는 니블로롱(Nyi Bloron)으로 대변되는 힌두의 큰 뱀이 드래곤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인도네시아 설화와 전설 속에서 등장하는 나가(naga)’ 즉 용이란 현대적 의미의 드래곤이 아니라 고대의 거대한 뱀이라고 이해하는 게 맞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그들이 바다 한 가운데에서 바구니 안에 담겨 표류하는 한 인간 여자 아이를 발견했을 때 마음이 복잡했겠죠. 그들은 아기를 급히 뭍으로 데리고 나왔는데 마침 그곳은 뚜안따파가 명상수련을 하는 곳에서 멀지 않았습니다. 용들과 뚜안따파는 사실상 같은 생활권 안에 살고 있었던 겁니다.

 

용들은 아기가 성인이 될 때까지 지극정성으로 잘 키웠습니다. 용들은 그곳 산양들을 보호하며 아기에게 산양 젖을 먹였고 밤에는 산양 무리 속에서 잠재워 온기를 나눠 받도록 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아기가 인간이란 것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아기에서 귀여운 소녀로, 다시 아름다운 처녀로 성장해 가는 동안 동족들에게 배척당하지 않도록 인근 지역 주민도 우호적으로 대했습니다. 그들은 고기잡이 나가는 어부들의 뱃길을 지켜주었고 사람들을 공격하는 맹수와 마물들로부터 마을을 지켜주었습니다. 처음엔 반신반의하던 마을 사람들도 나중엔 용들이 사람들을 해치지 않는다는 것과 그들이 인간 아이와 함께 사는 것을 알고서 시시때때로 아이가 입을 옷과 장신구를 용들이 사는 숲 앞에 놓아두며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문제는 그 인간 아이가 인도양 건너에 있는 아스라라노카 왕국(Kerajaan Asralanoka)의 공주였다는 것입니다. 인도에서 태어난 아기가 어떻게 광주리에 담겨 아쩨 앞바다까지 표류하게 되었는지 이 전설에서는 자세히 설명되어 있지 않습니다. 공주의 부모인 아스라라노카의 국왕과 왕비는 십수 년간 공주를 찾기 위해 본국의 왕좌까지 동생에게 양위하고서 선단을 이끌고 온 세상을 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쩨 지역에서 용이 키우는 아름다운 소녀의 이야기를 들었고 그 아이가 공주와 함께 없어진 왕실의 펜던트를 가지고 있다는 소문에 자신의 딸이라 확신하여 인도양을 건너 남아쩨까지 항해해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용을 만나 공주를 돌려 달라고 했지만 용들은 그 요구를 일언지하에 거절했습니다. 친딸처럼 여기며 사랑했던 공주를 용들은 결코 양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거기서 문제가 생깁니다.

 

국왕은 용들이 적의나 경계심을 품지 않고 있던 것을 틈타 무작정 공주의 손을 잡아 끌어 배에 태웠습니다. 공주로서는 자신을 키워준 용들과 자신을 낳아 주고 오랜 세월 동안 온천지를 돌며 자신을 찾으려 애썼던 인간 부모 사이에서 마음의 결정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부모의 독단과 공주의 우유부단이 결국 큰 사달을 일으킵니다. 격분한 용들이 배를 뒤쫓아와 바다 한복판에서 격전이 벌어진 것입니다. 한 번도 인간을 해친 적 없던 용 부부가 아스라라노카 선단의 강력한 화력과 정면으로 부딪힌 것입니다.

 

그 요란한 싸움 소리 때문에 명상을 방해받은 뚜안따파가 짜증이 내며 동굴에서 나와 자신이 늘 가지고 다니던 나무 봉을 들고서 바닷가로 나가 바위를 세차게 딛고 날아올라 전투가 벌어지고 있던 바다 한 가운데를 향했습니다. 그때 발디딤을 한 그 발자국이 그곳에 남은 겁니다.

 

쉑 뚜안따파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봉을 휘두르며 용들과 치열하게 싸운 끝에 용들을 모두 죽여버렸습니다. 그것은 일방적인 싸움이 아니라 바다가 갈라지고 섬들이 박살나 일대의 지형이 완전히 바뀔 정도로 엄청난 호각의 전투였지만 결국 뚜안따파의 승리로 돌아간 것입니다.

 

왕과 왕비는 공주를 되찾을 수 있도록 도와준 뚜안따파에게 감사하며, 본국으로 돌아가는 대신 아쩨에 남기로 마음먹고 쉑 뚜안따파가 사는 곳 가까이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평생 뚜안따파에게 감사하며 섬기겠다는 생각이었죠. 어차피 본국의 왕좌를 동생에게 물려준 지 오래였으므로 용들과의 싸움으로 큰 피해를 입은 배를 굳이 고쳐 다시 먼 뱃길에 오를 필요가 없다는 이유도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훗날 따빡뚜안 사람들의 선조가 됩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이슬람 근본주의를 내세우는 오늘날의 아쩨인들 상당수에게 인도인 힌두교도들의 피가 흐르고 있는 셈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애당초 아쩨에 뿌리내리고 살 마음이 있었다면 왜 굳이 공주를 납치하는 소동을 벌여 용들과 싸워야 했을까요? 우호적인 용들이 뿌드리 나가와 가까이 살며 보살피려는 인간부모들을 절대 내치지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그리고 적지 않은 시간을 멀지 않은 곳에 살면서 용들의 존재를 분명 알고 있었던 뚜안따파는 그들이 인근 마을 인간들을 어떻게 대해왔는지도 잘 알았을 텐데 왜 무작정 날아와 척살해 버린 걸까요? 그가 위대한 도인일지는 몰라도 그 인성이 심히 의심되는 대목입니다.

 

또 다른 버전에서는 뚜안따파와 싸운 두 마리 용 중에 수컷만 목숨을 잃고 암컷은 살아남아 더욱 치열하게 후반부 전투를 벌였다는 전개도 있습니다. 남편의 죽음을 본 암컷 용이 크게 분노해 날뛰는 과정에서 섬 하나가 둘로 갈라져 버렸는데 그 곳은 지금 뿔라두 두아(Pulau Dua), 두 개의 섬이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뿔라우 두아

 

암컷은 다른 큰 섬 하나를 산산조각 내버리기도 했는데 그 잔해들이 바다 위에 쏟아져 작은 섬들이 되어 지금도 아쩨 싱낄 군(Kabupaten Aceh Singkil)에 뿔라우 반약(Pulau Bayak), 많은 섬이란 이름으로 남아 있습니다.

 

뿔라우반약

 

이 전투에서 끝내 살아남아 복수를 맹세하며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이 암컷 용의 이야기가 아쩨의 오래된 전승들 속 어딘가에 숨어 있을지 모릅니다.

 

그 일이 있은 지 얼마되지 않아 뚜안따파도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는 명색이 은둔자이며 우주의 비밀을 찾는 도인이었으니 세속적인 명예나 아스라라로카 국왕 부부 같은 인간들과의 관계가 그리 소중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떤 면에선 인간들과의 관계를 중시했던 용들보다 못했던 거죠. 평생 선하게 살았고 인간 아기를 귀하게 키운 용들을 문답무용, 거두절미하고 무작정 때려죽인 뚜안따파의 행적에 대해서는 재평가가 필요합니다.

 

자신의 원하는 바를되찾은아스라라노카의 전 국왕 부부나, 우주의 진리를 추구하는 명상을 방해받았다며 용들을 쳐죽인 뚜안따파보다 어떠한 대가도 바라지 않은 채 버려진 인간 여자아기를 정성들여 키우며 돌본 두 마리 용이 이 전설 속 가장 선한 등장인물이 아닌가 합니다. 그 공주가 뿌뜨리 나가(Putri Naga), 용의 공주’, ‘용들의 딸이라고 불렸다는 것은 그녀가 인근 주민들과 교류가 있었거나 최소한 인간들에게 목격되는 일이 있었지만 용들이 그녀를 보거나 그녀에게 접근하는 인간들을 공격하는 식의 적대적 태도를 취하지 않았음을 반증하는 대목이니까요.

 

그런 착한 용들이 뿌뜨리 나가를 잘 키워준 공로로 치하를 받은 게 아니라 뚜안따파를 영웅으로 만드는 이 전설 속에서 오히려 한 마리는 일방적으로 억울한 죽음을 맞고 다른 한 마리는 쫓겨나는 모습이 매우 부조리해 보입니다. 용들은 악해서 토벌된 것이 아니라 그냥, 뱀이기 때문에 또는 인간이 원하는 바에 부응하지 않아 죽임을 당한 겁니다. 뱀들이 인간의 가치관을 따라야 할 이유가 하나도 없는데 말입니다.

 

거구의 도인 뚜안따파는 이 전설에서 슬며시 모습을 감추지만 알루에 나가(Alue Naga) 같은 아쩨 지역의 다른 전설에서 말만 하면 다 알 만한 기존인물격의 조연 캐릭터로 다시 등장하기도 합니다. 거기서 뚜안따파는 위대한 이슬람 도인으로 묘사되죠.

 

뚜안따파의 전설이 남긴 유산들은 따빡뚜안 지역 많은 지형지물에 깃들어 있습니다.

해안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해상에는 전투 중 벗겨져 떨어진 뚜안따파의 터번과 전투에 사용했던 나무 봉도 돌이 되어 있다고 합니다.

 

발자국이 있는 곳에서 5km 정도 떨어진 바뚜이땀 마을(Desa Batu Itam)엔 용의 간이 떨어져 산호초가 된 곳이 있고 바뚜메라 마을(Desa Batu Merah)엔 용에게서 우수수 떨어져나온 비늘도 돌이 되었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이 간과 비늘은 당시 뚜안따파에게 패한 수컷 용의 잘린 몸 일부라고도 하는데 사진을 보면 꽤 그럴 듯합니다.

 

바뚜메라 마을의 용비늘 바위

 

발자국 바위에서 20km 정도 떨어진 다마르 뚜똥 마을(Desa Damar Tutong) 바뚜 버르라야르 해변(Pantai Batu Berlayar)엔 마치 범선의 돛처럼 보이는 암초들도 있습니다. 아스라라로카 국왕 부부가 타고 온 범선이 변한 모습이란 거죠.

 

한편 따빡뚜안 감봉빠당(Gampong Padang)에는 폭 2미터, 길이 15미터의 뚜안따파의 묘지라고 일컬어지는 거인묘가 발자국 바위에서 1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뚜안 따빠의 것으로 알려진 남아쩨의 거인묘.오른쪽은 항공사진

 

정말 뚜안 따빠의 묘인지 발굴해보고 싶은 마음이 갑자기 용솟음치지 않습니까? 이래서 후세의 호사가와 인류학자, 고고학자들 호기심에 시신이 능욕당하지 않으려면 화장 만이 답입니다. 이곳에 그의 무덤이 남은 것은 뚜안따파가 용과 싸우면서 얻은 상처가 화근이 되어 4년 후 라마단 금식월에 결국 세상을 떠났다는 또다른 버전에 따른 것입니다. 이 무덤도 따빡뚜안 지역에 있는 람뿌 산(Gunng Lampu) 인근에 위치하며 예로부터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왔고 네덜란드 식민지 시대에도 여러 차례 정비하여 새 단장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물론 해안 바위에 새겨진 발자국 폭이 2.5미터였던 걸 감안하면 이 곳은 뚜안따파의 묘지라기엔 너무 작습니다. 정말 뚜안따파의 묘지라면 이보다 두 배쯤 되는 크기여야 할 것입니다. 어쩌면 아쩨엔 뚜안따파 외에도 많은 거인들이 살았고 그들을 뚜안따파라는 이름으로 통칭했던 것인지도 모르죠. 그래서 필자는 이 곳이 또 다른 거인의 묘지라고 추정합니다. 정말 뚜안따파의 묘지였다면 살아남아 어디론가 사라져 은거하던 암컷 용이 저걸 온전히 놔두었을 리 없습니다.

 

 

이 전설을 알게 된 후 곧바로 들었던 생각은 거인 뚜안따파를 기릴 것이 아니라 그 두 마리의 용을 기려한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인간들의 사피엔스 이기주의가 이 전설 속 용들을 어떡해든 악당으로 만들고 뚜안따파를 영웅으로 추앙하는 데에 주력해서 용들은 사당이나 신전에 모셔지는 대신 현지 놀이공원 조형물 정도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아스라라노카의 국왕부부와 거인 뚜안따파를 물리친 두 마리 용이 수호하는 뿌뜨리 나가의 왕국이 아쩨에 펼쳐지는 그런 전설이었으면 좋았겠다는 진한 아쉬움이 남습니다. ()

 

놀이공원 조형물로 전락한 따빡뚜안의 용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