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가 낳은 불안장애
아들이 2016년 싱가포르에서 딸과 합류한 후 아파트를 계약해 함께 지내면서도 한동안 호주에서 가져온 가방을 풀지 않고 언제든 들고 나갈 수 있는 상태로 준비해 머리맡에 놓고 잤다고 한다. 그게 호주에서 대햑 4년, 결국 나오지 않은 취업비자를 기다린 4년, 그렇게 8년을 지내면서 낯선 사람 집에 방 한 칸을 빌려 홈스테이를 하며집주인에게 부대끼고 비자 사기까지 당하는 등 어린 나이에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생긴 트라우마 탓이란 말을 딸을 통해 듣고 짠한 마음이 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두 아이를 싱가포르와 호주의 대학으로 유학보낸 것은 돈이 남아나서가 아니라 본국의 대학으로 보내려면 반드시 첨부해야할 내 경력 관련 서류를 전직장으로부터 협력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대부분 매우 안좋게 헤어졌고 일부는 문을 닫아 이미 존재하지 않던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아이들이 유학할 수 있었던 것은 아이들 스스로의 노력와 유학 컨설턴트의 조력도 있었고 마침 나와 내 아내가 그 시기에 꽤 벌이가 괜찮았기 때문이었다. 다 아이들이 타고난 복이라 여겼다.
하지만 비용이 충분치 않아 아이들을 외국으로 보내면서 부모가 함께 가 현지 생활이 안정뒬 때까지 얼마간 같이 있어 주는 과정을 생략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게 아이들에겐 많이 섭섭한 일이었고 낯선 곳에서 충분치 않은 비용으로 살면서 사뭇 기죽어 지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을 것이다.
그나마 자카르타에서 가까운 싱가포르의 딸은 졸업식은 물론 때가 되면 자주 방문할 수 있었지만 난 8년간 한번도 아들을 만나러 호주에 간 적이 없었다. 그 시기에 아들은 다 꾸려놓은 짐들을 머리 맡에 두어야만 잠을 이룰 수 있는 어떤 처절한 경험을 했던 모양이다.
그 심정이 공감되니 더욱 찐했다. 나 역시 이사짐을 다 싸놓은 상태에서 몇 개월을 지냈던 기억이 있다. 6개월 만에 해고당하는 형식으로 나왔던 빠룽의 봉제공장을 다닐 때 일이었다. 첫 월급 날 입사할 때 정했던 월급이나 근무조건을 그곳 사장이 깡그리 무시하고 그 절반을 내밀며 싫으면 그만두고 나가라도 하던 날부터, 난 회사가 구해준 집에서 이사짐을 하나둘 싸면서 가장 빠른 시간 안에 이곳을 떠나고야 말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 마음의 저변에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억울함, 불안함 등이 깔려 있었는데 호주에 살던 시절 아들이 그런 상황을 겪었다는 것이 안타깝지 않을 리 없었다. 꼭 겪을 필요 없는 경험을 하고 만 것이다.
싱가포르에 넘어온지도 5년이 넘어 이제 제대로 짐을 풀고 생활한다는 아들은 이제 어느 정도 마음의 안정을 찾은 것이라 보인다. 그 사이 싱가포르에 취직해 두 번 이직하며 급여와 처우가 괘 나아졌다.2020년 코로나 발생 직후엔 자카르타에서 함께 7개월을 지내기도 했다.
상처는 언젠가 아무는 법이니 아들의 다친 마음도 아물고 있을 것 같다. 그런 마음 고생을 부모에겐 그동안 내색도 하지 않은 아들의 마음이 어땠을까 다시 한번 헤아려보게 된다.
2022. 7. 1